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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10/26 13:12:45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스포O]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극장에 걸린 자서전 또는 은퇴선언문
1. 극장에 걸린 자서전

이 영화는 결국 영감님의 자서전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 영화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건 꽤나 노골적으로 암시됩니다.

얼핏 보기에 아버지가 제로센을 납품하고, 전쟁통에 시골로 이사갔으며, 어머니가 건강하지 못했던 주인공 소년은 영감님 본인의 투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뜯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풍과 일본풍이 섞인 집은 메이지유신 이후 개화된 일본입니다.
그 안에서 책을 읽고 살다가 미쳐버렸고, 탑 속으로 사라진 할아버지는 영감님 본인입니다.
탑은 느닷없이 외부(서방)에서 운석처럼 떨어진 핵(애니메이션)을 토대로, 일본인이 외관을 덧붙인 스튜디오입니다.
영감님이 만들고 유지해온 지브리죠.

탑에는 의인화된 동물들이 주민이 되어 살아가고, 지브리에서 만들어낸 작품들은 각각 하나의 문이 되어 외부 세계와 연결되며, 그로써 탑은 여러 개의 세계와 시점에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탑속으로 사라졌다가 행복한 얼굴로 돌아오곤 합니다.
주인공의 가족을 도와주는 노파들은 지브리에서 함께 늙어간 여성 애니메이터들로 볼 수 있겠네요.
'현재'의 키리코가 늙어 탑속의 어부 키리코만큼 역할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이전의 지브리 작품에 비해서는 확연히 떨어지는 작화품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집과 탑을 연결해주던 다리는 어느순간 끊어졌습니다.
영감님이 추구하던 작품상과 세계관, 인물들은 이제 현대의 일본과 유리되어,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탑속의 노인은 아직 후계자를 얻지 못했습니다.
후계자는 반드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라야 합니다.

미야자키 고로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만, 사실은 그 집(지브리)에서 나고 자랐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년배인 타카하타 이사오는 2018년에 타계했고, 후계자로 점찍었던 콘도 요시후미는 요절했으며, 안도 마사시는 감독직을 선호하지 않으며, 미야자키 고로는 아버지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진 못했습니다.
소년은 스스로 머리를 돌로 찧어 다른 이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감님 자신은 탑 속에서 홀로 늙어가면서, 낡아 부서져가는 지브리를 어떻게든 연명시키고 있습니다.

작품 내에서 후계자로 점 찍었던 소년은 탑을 이어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탑속에 거두어 키우던 앵무가 결국 탑을 파괴합니다.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나츠코가 잉태한 아이는 결국 탑 밖에서 출산되었고, 탑을 이어받을지 선택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꽤나 씁쓸한 자서전인 동시에, 영감님의 은퇴 선언 그 자체로 보입니다.
내가 그동안 이끌어왔던 스튜디오는 머지않아 무너져내릴 것이며, 그 업을 이어받을 후계를 찾는 데에는 실패했고, 탑을 벗어난 사람들은 이내 그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잊어버릴 테니까요.

반면에 주인공 소년을 대하는 작품의 태도에서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탑속의 노인은 주인공 소년의 탑을 잇지 않겠다는 의지를 존중하고, 소년은 부적과 돌조각을 들고나간 덕에 탑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처럼 잊어버리지 않으니까요.


2. 또는


지브리와 영감님이 처해있는 외부사정들과 이 작품을 연관시켜서 생각한다면 꽤나 재밌는 은유들이 많습니다.
제가 캐치하여 위에 적어놓은 것들 이외에도 더 많은 것들이 숨어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영감님이 의도적으로 심었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었든지 말이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게 잘 만들어진 좋은 작품이냐 하면, 거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작품 속 이야기 뒤에 숨어있어야 할 작품 밖 이야기가, 오히려 작품 자체를 잡아먹었거든요.

기본적으로 작품 내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탑속의 노인이 홀로 고군분투한 것이 외부세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나츠코는 난데없이 왜 탑으로 이끌려 들어간 것인지,
산방에 주인공 소년이 들어간 것이 왜 잘못된 행동인지,
탑속의 노인은 왜 굳이 그런 방식으로 후계자를 불러들였는지,
탑속의 키리코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이며, 왜 주인공 소년과 같은 위치에 흉터를 가지고 있는지,
펠리컨은 무엇이고, 또 주인공 소년이 열었다는 무덤은 누구의 것인지...

작품의 시퀀스들은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은유를 하고자 도입된 장치들에 불과해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는 허술해지고,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커녕 서사조차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작품에 대한 혹평들도 이해가 되는 것이죠.


3. 은퇴선언문


영감님은 이번 작품을 내면서, 앞으로는 은퇴하겠다 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인터뷰한 걸로 압니다.
제게는 이 작품 자체가 하나의 은퇴선언문으로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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