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6/25 12:10:54
Name   골든햄스
Subject   한 시기를 보내며 든 생각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것을 깨닫는 최근이었습니다.
예로 들어 20대의 저는 일기에 이렇게 써놨습니다. "진공포장된 채 질식사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 비명이 밖으로 들리지도 않는 느낌이다." 저는 그때의 흉흉한 기분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이야. 착한 딸인데 그만 건들라 그래. 아주 훌륭한 딸이야." 계속해서 위가 아파서 결국 아버지와 대학병원까지 내방했을 때, 참다 못해 한마디 던진다는 듯이 나이 든 교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저혈압이 나오자 그럴 리 없다고 혈압 재는 기계를 5번은 계속 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운이 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제가 아버지에게 학대 당하고 있다는 정확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환자를 본 의사 선생님 눈에는 직감적으로 보였나 봅니다. 아버지가 딸을 괴롭혀서 딸이 위장이 아픈 거라고, 어찌 보면 큰 용기를 갖고 말씀해주신 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소주병을 던지고 휴대폰을 던지고 책상을 덮은 유리를 깨고 제 뺨을 때려 의자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지만, 제 친구는 어느 날 침대에 묶여 아버지에게 벨트로 맞았다고 했습니다. 제 친구들 중에는 가정이 정상인 아이들이 없었고, 경찰은 출동해도 비웃었고, 교사는 오히려 절 혼냈기에 저는 제가 피해자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은 마치 제가 무도회에서 올바르지 않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것처럼, 당신은 지금 문화적으로 실례를 하고 있지만 제가 봐드리겠습니다-와 같은 표정으로 순간 눈썹을 추켜올리며 모른 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래도 좋은 아버지일 거야. 널 사랑할 거야.'

그러다 보니 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진공 포장된 뽁뽁이 안에 사람이 갇혀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30대가 된 지금은, 20대의 그의 힘듦을 이해합니다. 조금이라도 매운 것, 튀긴 것, 차가운 것, 뜨거운 것은 다 먹지 못하고 하루에 3시간 가량은 출혈로 부푼 배의 아픔 때문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다 겨우 의식이 가물가물해져서야 잠에 들던 저를 이해합니다.

그러다 보니 전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왜 힘든지, 이것도 지나고 나면 알 일입니다. 지금은 왜 좋은지, 이것도 지나고 나야 알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대화는 본질적으로 그들의 현재와의 대화가 아니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말처럼 사람에게 그 사람을 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 눈짓만 보내도 '자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무리한 사업에 뛰어들었고, 망했습니다. 그의 장점은 누가 보아도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를 이야기하지 않았고, 설사 이야기했더라도 그는 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시기의 빛나던 그를 기억합니다. 자기객관화 능력이 없는 그는 오히려 그렇기에 너무도 빛났고, 대화하기에 편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 자신의 이미지는 절대 흔들리지 않아서, 그는 자기확신에 차서 성큼성큼 걷고 먼저 말을 걷고 언제든 마음도 동요가 없었기에 단체생활을 잘 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상태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무리한 욕심을 부렸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가 결국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앙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현재를 모른 체하기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서로의 현재가 이 순간에 당연히 다 임하게 된다면 '내가 제일 예쁘고 싶어' 하는 사람과, '내가 못생겨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어떻게 같이 편의점에 한순간이라도 있을 수 있을까요? 직장에서 대화를 나누며 사실은 속으로, '내가 여기서 제일 잘났지' 하는 사람과, '나는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해서 커서는 항상 행복하고 싶어' 라는 사람이 웃으며 서로 칭찬을 나누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절대적 망각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현재를 죽이고 있고, 억압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의 상담 쪽 분파나 명상에서는 '그것이 죄다!' 라든지 '그것을 고쳐라' 라고 말하지만, 저는 사회생활을 위해 발전한 인간의 이 오랜 본능을 다르게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모를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깨뜨리려 한 소크라테스에게 신앙부정이라는 죄명이 씌워진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언어의 한계 속에서 가능한 한, 최대한 나아간 그의 죄에 대한 묘사였나 봅니다.

이제 30대가 되어 다른 셋팅 속에 있게 된 저는 20대의 저를 보고, '너는 끝까지 고등교육을 받고 싶어서 당장 돈 없이 독립도 힘들고 주위에 학대 받은 것을 이해해줄 사람도 없으니 모른 체 아버지를 사랑하고 덮고 가고 싶은데 아버지가 계속 괴롭혀서 힘들구나' 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한편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걸 다 알아도 관심 가져줄 사람은 거의 없어.'

그럼 20대의 저는 "나도 알아(그래서 내가 진공 속에서 소리 지르는 거 같다고 한 거잖냐?)" 라고 할 겁니다. 알아서, 다들 현재를 감추고 있습니다. 부풀려진 방어기제들과 열등감과 우월감, 유머러스한 기믹과 개그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잘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서로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그 운명대로 가고 있고 아인슈타인 말마따나 달이 자기 길을 자기 의지로 가고 있다고 착각하듯이 인생을 '산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갖고 사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3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877 육아/가정영국 교육 이야기 14 기아트윈스 19/10/23 4755 31
    9722 기타강다녤 스벅 깊콘 당첨자 안내(카톡 계정 주신분은 쪽지함 확인요망) 31 tannenbaum 19/09/28 4460 31
    9570 육아/가정부부 간의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47 임아란 19/08/22 6189 31
    9551 의료/건강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환자 10 Jace.WoM 19/08/15 4893 31
    9268 일상/생각이방인 노숙자 7 멍청똑똑이 19/06/02 5266 31
    8696 일상/생각2018년의 사회진화론 19 구밀복검 18/12/28 5803 31
    8695 일상/생각초보운전자들을 위한 안전운전 팁 23 기쁨평안 18/12/28 4945 31
    8631 사회한 전직 논술강사의 숙대 총학의 선언문 감상 39 烏鳳 18/12/11 6570 31
    8372 여행이별 후 홀로 여행 7 곰돌이두유 18/10/14 5665 31
    8240 일상/생각레쓰비 한 캔 5 nickyo 18/09/17 5014 31
    7148 일상/생각따듯한 난제 9 Homo_Skeptic 18/02/23 4433 31
    5392 사회김미경 교수 채용논란에 부쳐 191 기아트윈스 17/04/07 8269 31
    5247 도서/문학소소한 책 나눔을 해보려 합니다 42 서흔 17/03/20 4849 31
    4667 게임'헌티드 맨션' 후기 18 별비 17/01/21 5658 31
    11878 요리/음식라멘이 사실은 일본에서 온 음식이거든요 41 철든 피터팬 21/07/13 5789 31
    14611 사회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2 joel 24/04/20 2313 30
    14751 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5 삼유인생 24/06/19 1946 30
    14002 일상/생각한 시기를 보내며 든 생각들 2 골든햄스 23/06/25 2015 30
    13994 일상/생각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 최종 입니다 17 이웃집또털어 23/06/20 3716 30
    13547 일상/생각8년 프리터 수기 11 아이솔 23/02/06 2840 30
    13020 기타[홍터뷰] 서당개 ep.1 - 과도한 관심은 사양합니다 15 토비 22/07/25 3823 30
    12891 일상/생각나머지는 운이니까 16 카르스 22/06/05 4277 30
    12495 꿀팁/강좌학습과 뇌: 스스로를 위해 공부합시다 11 소요 22/02/06 4219 30
    11638 일상/생각어느 개발자의 현타 22 거소 21/05/04 7512 30
    11512 육아/가정그럼에도 사랑하는 너에게. 8 쉬군 21/03/22 4146 3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