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13 14:09:15
Name   Cascade
Subject   아빠의 쉼 총량제
아빠는 바빴다.

그냥 바쁜 것도 아니고 정말 많이 바빴다.

지금 내 나이 25세, 아빠는 25세에 결혼해서 26세에 나를 낳았다.

아무런 기술도 없이 서울로 올라온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쉬었다. 첫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IMF가 닥쳤다.

내가 3살 때 아빠는 직장을 잃었다. 아빠는 그렇게 아들과 3개월을 매 순간 함께했다. 행복했지만 누군가는 다시 돈을 벌어야 했다.

짧은 3개월을 뒤로 하고 둘째 산후조리까지 마친 뒤 아빠는 다시 일터로 나갔다.

아빠 나이 28살. 아빠가 쉬는 날은 한 달에 한 번이었다. 설날과 추석에는 쉴 수 있었다.

일년에 14일을 쉬었다.



내가 나이를 먹고 아빠가 직장을 옮겼다. 예식장은 주말이 제일 바빴다.

나는 아직도 아빠와 주말을 함께 보내는 게 어색하다. 아빠는 주말에 없었던 사람이니까.

직장을 옮기며 아빠는 한 달에 두번을 쉬었다. 추석 다음 날과 설 다음날에도 쉴 수 있게 되었다.

일년에 28일을 쉬었다.




아빠는 큰 모험을 했다.

예식장에 지분을 넣고 키우기 시작했다. 아빠는 더더욱 바빠졌다.

그래도 명목은 사장이라 일주일에 한 번 쉴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매주 화요일에 쉬었다. 설 연휴도 3일씩 쉴 수 있게 되었다. 이따금씩 여름 휴가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일년에 62일을 쉬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아빠는 지금 나와 똑같이 구직 중이다. 사실 구직 중, 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정말 직장을 필사적으로 잡아야되는 상황은 아니다.

이야기하던 도중 아빠가 이런 얘기를 했다. 자기는 남들이 주말 쉴 때, 공휴일 쉴 때 못 쉬어서 지금 좀 쉬고 싶다고 했다.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 1년에 주말 104일을 쉬고 거기에 이런저런 휴가와 공휴일을 합치면 120일 넘게 쉴 거고 그게 25년이면 3000일인데 자기는 25년동안 1000일 정도밖에 못 쉬었으니 나머지 2000일의 절반은 채워야 되지 않을까 라고 하셨다.

그래서 아빠 보고 쉬라고 했다. 푹 쉬라고 했다.






요즘 우리 아빠의 가장 큰 취미는 엄마가 준 1000만원으로 매일 주식을 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2만원, 3만원 오른거에 일희일비하는 아빠를 보고 있자면 되게 재밌다.

자영업 하다 보면 일이 바빠서 주식은 쳐다볼 수도 없었는데 이렇게 나이 먹고 하니 재밌다고 하신다.

열심히 하시라고 했다.

금액은 올리지 말라고 했다.



끝.





37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아빠 마음 헤아려주는 착한 아들이 있으니 든든하실 거예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372 여행아시아나 인천 - 프랑크푸르트 A380 퍼스트 탑승기 18 졸려졸려 18/04/12 5981 4
7787 사회아시아나 기내식 대란 사태를 나름 개조식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5 CIMPLE 18/07/04 4475 7
644 생활체육아스널에 대한 경영학적 접근[펌] 22 세인트 15/07/24 8161 0
10099 스포츠아스날의 신임 감독 아르테타의 첫 프레스 컨퍼런스 2 손금불산입 19/12/21 5019 1
12026 스포츠아스날은 왜 몰락해가는가. 6 joel 21/08/29 4884 5
6134 정치아쉬운 살충제 계란 파동 3 Leeka 17/08/20 3321 0
13050 의료/건강아산병원사건 서울대 교수 실명글과 개인적인 견해 17 cummings 22/08/04 3697 22
3339 일상/생각아빠이야기 35 기아트윈스 16/07/24 4981 18
11129 일상/생각아빠의 쉼 총량제 22 Cascade 20/11/13 3697 37
3125 요리/음식아빠요리 만들기 - 폭신폭신 팬케이크 16 졸려졸려 16/06/26 4723 1
3161 요리/음식아빠요리 만들기 - 스테이크를 맛있게 굽기 위해 필요한 도구 21 졸려졸려 16/06/29 6552 4
2427 일상/생각아빠와 알파고 6 nickyo 16/03/18 4160 5
8047 기타아빠랑 또 좀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13 태정이 18/08/13 5109 2
7845 음악아빠는 아빠상어야 8 바나나코우 18/07/14 4536 4
13639 육아/가정아빠. 동물원! 동물원에 가고 싶어요! 27 쉬군 23/03/14 2639 54
10013 일상/생각아빠 직업은 무역업.. 근데 제 직업은 아닌데요.. 38 집에가고파요 19/11/22 6007 6
11147 정치아브라함 협정에 숨겨진 트럼프의 셈법 2 소원의항구 20/11/19 3492 1
8580 일상/생각아부지와의 대화 - 주제는 재테크 5 벤쟈민 18/11/30 4246 3
14369 일상/생각아보카도 토스트 개발한 쉐프의 죽음 8 Soporatif 23/12/31 1910 19
8263 정치아베 3선에 대한 일본 유명 신문들의 반응 1 Raute 18/09/22 5084 14
4008 일상/생각아버지의 한마디 6 피아니시모 16/10/25 3294 2
12747 일상/생각아버지의 제자가 의사였습니다. 11 Regenbogen 22/04/21 4156 12
1633 일상/생각아버지의 다리가 아픈 이유는 22 YORDLE ONE 15/11/25 10044 16
13585 일상/생각아버지와의 관계 12 마아아대 23/02/21 2443 0
6108 기타아버지를 묘지에 모셔두고 왔습니다. 23 어제내린비 17/08/15 4325 8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