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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1/04 02:10:50
Name   알료사
File #1   악이란_무엇인가.jpg (81.0 KB), Download : 5
Subject   악이란 무엇인가


철학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다윈님 탐라에서 라스콜리니코프 나온다는 말에 낚여서 사버렸습니다ㅋ 읽다보니 죄와벌은 초반에 조금 언급하고 나머지는 죄다 칸트철학 얘기라 아 이거 속았네 싶었지만 내용이 묘하게 사람 잡아끌어서 결국 끝까지 읽었어요. 다 읽고 나니까 확실히 죄와벌하고 통하는 면이 있는거 같아 신기하네요. 살았던 장소도 시대도 달랐던 사람들이 제각기 쓴 완전 다른 분야의 저작물에서 이정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니.. 저자가 의도적으로 공통적인 부분만 부각시켜 설명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철학 문외한인 저는 대중교양서를 주로 읽게 되기 마련인데 그런 책들의 특성이 어려운 사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기본적인 개념을 좀 길게 반복설명해 주거든요. 이게 처음에는 그 친절함에 고마워하다가 나중에는 아 됐고 좀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하고 짜증이 나게 됩니다.. ㅋ 근데 또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면 어렵고 머리아파요.. ㅋ 그래서 쉽고 지루한 부분에서 어려운 부분으로 넘어갈 때 집중을 잘 해야 하는데 이런 독법이 소설을 주로 읽는 저에게는 익숙치 않아서 다소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신기하게 한 호흡에 완독을 해서 뿌듯하네요. 이런 책이 되게 오랜만이었거든요. 아마 제가 지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 있어서 그런것도 좀 작용했나봐요ㅋ 아래로는 딱히 맥락 없이 그냥 읽으면서 시선이 멈췄던 부분들 요약발췌한 것입니다. 좋은 책 추천해주신 다윈님께 감사드립니다.







공포정치 시대가 아닌 한 누구라도 사회 비판을 하기는 쉽다. 세상의 규범을 조소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행을 위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모든 것은 바뀐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세상의 선인들처럼 사회의 규범을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그의 성실함이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사색했다. 하지만 그가 사색을 실행으로 옮겼을 때, 노파의 정수리에 도끼를 휘둘렀을 때, 그는 온몸이 떨릴 정도로 깨닫는다.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런 사람은 정작 도덕적 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노파를 죽임으로써 무엇이 선한지 또 무엇이 악한지 쉽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할게 없었다.



절대 법을 어기지 않으며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선인이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다고 해서, 그렇다고 살인자가 그들보다 더 선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공간이 열린다. 이것은 견해에 따라서는 어린아이도 알고 있다. 외형적 행위만은 합법성을 유지하며 범죄자를 거세게 비난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은 것처럼, 고통에 허덕이다 범죄에 치달은 사람이 어느 순간 모든 것은 사회 탓이라고 태도가 돌변하는 바로 그 순간 -가령 그 모든 것이 옳다 해도- 사라져버리고 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날 것 그대로의 자기사랑을 감추고 영리함을 갈고닦는다. 자기사랑에 영리함의 옷을 여러 겹 입히고 이 얽히고설킨 현실세계에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은 타인에게 칭찬받으며 잘만 풀리면 다양한 물질적,정신적 이득이 굴러들어온다. 우리는 영리함에 이끌려 항상 합법적 행위를 실천하려 한다. 그렇게 외형적으로 선한 행위는 자기사랑에 점철되어 있다. 이렇듯 영리함과 도덕적 선 사이에는 천 리쯤 거리가 벌어져 있다. 아니 둘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인간은 영리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도덕적 선에서 멀어진다.



순진무구함은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잘 보호되지 않고 유혹되기 쉽다는 면에서 매우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에서 자기사랑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결여된 인간을 그려냈다. 뮈쉬킨 공작은 자기사랑이 이상하리만치 결여되어 있어서 백치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그는 도덕적 인간일까. 그는 분명 사랑스럽지만 딱히 도덕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도 자기사랑이 희박해서 그 안에 투쟁이 없기 때문이다. 뮈쉬킨을 만난 사람들은 완전히 자기사랑이 결여된 뮈쉬킨을 보고 경악하고 신기해하고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고 매료되어 휘둘리다가 그들 자신의 자기사랑과 싸우기 시작한다. 뮈시킨 공작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들을 도덕적 상황에 던져넣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 저 일에 대해 무엇이 가장 현명한 처치인지를 묻는 대신 무엇이 가장 사랑의 깊은 방법인가를 묻는 편이 대개 확실하고 좋은 방책이다. 왜냐하면 후자가 훨씬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랑의 깊은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재능이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는 한, 그리 간단히 착각에 빠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저 영리함만으로는 장래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정당함을 예견하고 판단할 수 없다.



흑인을 해방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비합법적 행위라고 믿고 있는 것을 개혁하려고 할 때 수많은 재앙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주저하고 괴로워한다. 스스로 행동에 나서지 않고 수많은 흑인의 불행을 모른 채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더라도 흑인 해방에 나서야 할지 칸트 윤리학 안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다만 의지의 자율의 원칙만이 우뚝 솟아 있다. 이 원칙 아래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라도 우리는 무엇이 지금 합법적인지 알고 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상황이 덮쳐오면 갑자기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한 채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안다. 이렇듯 우리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모든 인생과 정언명령에만 의지해서 [자신의 판단으로 합법적이라고 믿는 행위]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여기에 악이 입을 벌리고 있다.



프란테라는 낙태하지 않으면 아내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태어나는 아이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낙태는 허락할 수 없다고 가톨릭 신부는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절대 인간의 손으로 말살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의한 것이다. 아내는 출산했고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내는 환희에 전율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흘 후에 죽고 만다. 프란테라는 그 사실을 아내에게 전할 수 없었다. 그는 같은 날 태어난 다른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속여서 아내의 품에 안겼다. 아내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다. 그녀는 행복을 가져다준 신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그녀도 숨을 거둔다. 프란테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우리 아이는 죽었다고 말해야 했다. 그것이 칸트의 제안이다. 그 방향에 최고선이 있다. 프란테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죽지도 못했다. 다시 돌아와서 고향의 작은 교회에서 '왜라고 물어서는 안된다'는 아내의 말을 떠올린다. 하지만 칸트가 제안하는 바는 '왜?'라고 거듭 묻는 것이다. 욥처럼 목이 쉴 때까지 묻고 또 묻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행한 일은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는 도덕적으로 선하고 싶었을 뿐이다. 행복해지고 싶었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이런 형태로만 최고선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론적인 사색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며 세상의 규범에 있는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손에 쥐어진 보잘것없는 해답을 보며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라고 절규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다. 이 세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실재성을 깨닫는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이러한 갈망을 가능성으로서 알고 있다는 것이며 도덕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옳은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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