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3/26 01:57:45수정됨
Name   Fate
Subject   오늘은 천안함 피격 사건 10주기입니다.




오늘은 천안함 피격 사건 10주기입니다.

제가 장교 후보생일 적에 문무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달 간의 하계 입영훈련을 마치고 퇴소하기 전날, 걸그룹 공연과 장기자랑을 합친 행사였는데, 사회와 완전히 차단된 채 TV도 없이 주말마다 종교행사 가서 짤막하게 밖의 소식을 듣던 저희들에겐 굉장히 기대되는 이벤트였죠. 또 맥주 한 캔씩을 지급해 주고 임관을 위한 종합평가를 모두 마친 뒤 즐기기만 하면 되는 이벤트여서 그저 웃고 술 한 잔 할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북한이 고사포 한 발을 분계선 너머 대북 확성기에 쐈습니다.

문무제를 기대하던 우리는, 이미 행사 전부터 온 간부들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리고 학군교에 있는 모든 스피커가 진돗개 1호를 방송하는 걸 들었습니다. 설마 이러다 취소되는 거 아니냐. 그리고 걸그룹이 탄 벤은 도착했지만 그들은 내리지 않았고, 그녀들 대신 올라온 건 전투복 입은 준장님이었고, 준장님은 오늘 행사가 전면 취소되었다고 발표하셨습니다. 

동기들은 웅성웅성댔고, 어떤 이들은 우우 하면서 야유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지만, 그때는 한달 동안 산속에서 새카맣게 탄 원시인에 가까웠습니다. 굉장히 일차원적이었죠.

"조용히 해!" 준장님이 소리쳤고, "조국을 수호하는 방패인 너희들이, 국가가 공격당한 이 상황에, 웃고 떠들 수 있느냐! 국민은 여러분을 믿고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임을 다하라." 

그 순간 모두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간부는 군대의 기간(基幹)이다' 하는 말은 자주 들었어도, '조국을 수호하는 방패'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서 그랬을까요. 처음엔 행사 취소에 야유하던 오천명의 동기, 후배들이 자기가 누구인지, 지금이 어떤 상황이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천천히 받아들이던 광경은 압도적이었어요. 우리는 조용히 생활관으로 들어가 모두 완전군장을 하고 10시까지 조용히 대기했습니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전쟁이 날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그 희박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질 때 내가 가장 최선봉에 서 있고, 내가 모두를 위해 가장 먼저 희생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성 저편에 있었습니다. 그날 28사단이 대응사격으로 대남한계선 북방으로 36발을 사격했고, 다음날 퇴소하고 돌아오는 길에 북한의 준전시상태가 선포되고 김정은이 최후통첩 시한을 발표하고, 그에 다시 대응하며 옥신각신하고, 다음 날에서야 안보실장과 통일부장관, 총정치국장과 당비서간 사이의 고위급 접촉을 갖기로 한 뒤에야 사태는 진정세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제 기억에서 잊혀졌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임관을 하고, 최전방에 배치되고, 하필이면 고사포가 날아왔던 인접 사단 GP에서 근무하며 1년 전의 해당 GP에서 기록된 TOD영상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 때 영상에서는 약 3km 떨어진 산 능선에 천천히 병력들이 집결하더니, 나중에는 수백 명이 산을 온통 빼곡히 채우더군요. 그 당시 GP에서 근무하던 수색중대 병력들, 최전방에서 적이 집결하는 걸 보고, 좌표를 산출하고 있던 관측반들, 모니터를 돌리고 있던 TOD병사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후 GP에서 내려와 GOP에서 약 1년여를 근무하면서, GP/GOP가 실제 전면전 상황에서 몇 분을 버틸 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어요. 몇 시간이 아니라 몇 분이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FEBA선단의 아군들이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주는 것이었고, 우리의 작계에는 재집결 장소도 한 줄에 불과했습니다. 즐거운 때도 있었지만 탈북한 병사가 내려올 때,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 늘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초계(哨戒)와 경계(警戒)의 나날들... 그리고 초계함...

제게 천안함은 음모론자들과의 싸움으로 기억됩니다. 진짜 증거들을 무시하고, 가능만 한 온갖 음모론들과 싸웠던 시간들, 피로파괴, 기뢰, 잠수함, 암초, 붉은 멍게... 그들은 아마도 핵심증거인 인공지진과 지진파, 탄약재, 절단면, 인공추진체를 바라볼 용기가 없는 자들이지요. 혹은 정권에 대한 증오심으로 진실로부터 시선을 외면한 자들이거나요. 정권에 대한 호오는 그들의 자유지만, 천안함에 대해 나온 첫 번째 영화가 그들의 죽음을 모욕하는 음모론자들의 영화였다는 사실은 저를 언제나 힘들게 합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요. 

그럼에도 오늘은 바다에서 조국을 수호했던 젊은이들에 대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방패를 내려놓고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지만, 대잠능력이 없는 노후된 초계함이 적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칠흑의 바다에서 침몰했을 때, 조국은 끝까지 임무에 충실했던 병사들로, 조국을 수호했던 방패로 당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천안함 46용사, 그리고 전우를 구하기 위해 순직하신 故 한주호 준위의 명복을 빕니다.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가스터어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
디젤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하기 전에 귀대(歸隊)하라.

772함 나와라.
유도조정실 안경환 중사 나오라.
보수공작실 박경수 중사 대답하라.
후타실 이용상 병장 응답하라.

거치른 물살 헤치고 바다위로 부상(浮上)하라.
온 힘을 다하여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

772함 나와라. 

기관조정실 장철희 이병 대답하라.
사병식당 이창기 원사 응답하라.

우리가 내려간다.
SSU팀이 내려 갈 때까지 버티고 견디라.

772함 수병은 응답하라.
호명하는 수병은 즉시 대답하기 바란다.

남기훈 상사, 신선준 중사, 김종헌 중사, 박보람 하사, 이상민 병장, 김선명 상병,
강태민 일병, 심영빈 하사, 조정규 하사, 정태준 이병, 박정훈 상병, 임재엽 하사,
조지훈 일병, 김동진 하사, 정종율 중사, 김태석 중사, 최한권 상사, 박성균 하사,
서대호 하사, 방일민 하사, 박석원 중사, 이상민 병장, 차균석 하사, 정범구 상병,
이상준 하사, 강현구 병장, 이상희 병장, 이재민 병장, 안동엽 상병, 나현민 일병,
조진영 하사, 문영욱 하사, 손수민 하사, 김선호 일병, 민평기 중사, 강준 중사,
최정환 중사, 김경수 중사, 문규석 중사.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戰線)의 초계(哨戒)는 이제 전우(戰友)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命令)이다.

대한민국을 보우(保佑)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 772함 수병을 구원(救援)하소서.

우리 마흔 여섯 대한(大韓)의 아들들을 
차가운 해저(海底)에 외롭게 두지 마시고
온 국민이 기다리는 따듯한 집으로 생환(生還)시켜 주소서.
부디
그렇게 해 주소서.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4-08 10:3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9
  •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2 일상/생각슈바와 신딸기. 24 Schweigen 20/05/26 5677 33
961 과학고등학교 수학만으로 수학 중수에서 수학 고수 되기 11 에텔레로사 20/05/22 6197 7
960 일상/생각웃음이 나오는 맛 13 지옥길은친절만땅 20/05/17 4601 11
959 일상/생각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에 대한 반성, 무식함에 대한 고백 18 메존일각 20/05/16 6241 49
958 일상/생각제주도에서의 삶 16 사이시옷 20/05/13 5746 26
957 기타출산과 육아 단상. 16 세인트 20/05/08 4993 19
956 일상/생각나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9 켈로그김 20/05/06 5119 34
955 일상/생각할아버지 이야기 10 私律 20/05/03 4454 17
954 일상/생각큰고모님 4 Schweigen 20/05/02 5059 27
953 일상/생각한국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와 영미(英美)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의 차이점 16 ar15Lover 20/05/01 5958 5
952 정치/사회[번역-뉴욕타임스] 삼성에 대한 외로운 싸움 6 자공진 20/04/22 5583 25
951 일상/생각돈으로 헌신에 감사 표하기 28 구밀복검 20/04/22 7452 25
950 일상/생각자아를 형성해준 말들 30 ebling mis 20/04/21 5843 32
949 역사도철문, 혹은 수면문 이야기 2 Chere 20/04/18 5257 16
948 일상/생각아싸, 찐따, 혹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11 이그나티우스 20/04/17 6224 17
947 문화/예술[번역] 오피니언 : 코로나 19와 동선추적-우리의 개인적 자유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39 步いても步いても 20/04/13 6186 6
946 창작기대 속에 태어나 기대 속에 살다가 기대 속에 가다 3 LemonTree 20/04/09 5110 15
945 창작그 애 이름은 ‘엄마 어릴 때’ 14 아침 20/04/08 5123 12
944 정치/사회해군장관대행의 발언 유출 - 코로나 항모 함장이 해고된 이유. 4 코리몬테아스 20/04/07 5727 11
943 창작말 잘 듣던 개 6 하트필드 20/04/04 5384 4
942 정치/사회[데이빋 런시만] 코로나바이러스는 권력의 본성을 드러냈다. 10 기아트윈스 20/04/02 6181 22
941 일상/생각한국이 코로나19에 잘 대처하는 이유 24 그저그런 20/03/31 6351 10
940 역사오늘은 천안함 피격 사건 10주기입니다. 23 Fate 20/03/26 6242 39
939 정치/사회가속주의: 전세계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을 고무하는 모호한 사상 - 기술자본주의적 철학은 어떻게 살인에 대한 정당화로 변형되었는가. 18 구밀복검 20/03/24 7667 23
938 정치/사회섹슈얼리티 시리즈 (4) - 젠더는 BDSM 속에서 작동하나요? 6 호라타래 20/03/23 5290 1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