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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4/13 00:41:20수정됨
Name   임아란
File #1   [크기변환]k552532313_1.jpg (98.3 KB), Download : 110
Subject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감상.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을 필두로 여섯 편의 이야기가 자기 영역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방향은 조금씩 다른데 나름 농익은 향을 풍기고 있어 깜짝 놀랐네요.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 가지들이 올곧게 뻗을 수만 있다면 한국 SF 문학의 장래도 밝을 겁니다.



김초엽_관내분실 / 죽은 이들의 마인드가 도서관에 기록되고, 유가족들은 접속기를 통해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게 보편화된 사회 속에서 엄마를 찾아가는 이야기.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소재를 가족에 대한 미움과 순간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 같은 그리움에 잘 버무렸어요.

사실 어머니란 소재는 참 무섭고, 어려워요. 꺼내기는 쉽지만 방향이 조금만 뒤틀려도 진부함이라는 바다에 멋대로 뛰어내리거든요. 예전에 떠돌던 글이 생각나는데 영화 수업이었나, 소설 창작 수업이었나. 어머니라는 심상을 떠올렸을 때 집밥이 따라왔다면 당장 창작 활동을 그만둬야 한다고 했었죠. 이 글도 살짝 빠지는 때가 있었는데 SF 소설에서만 활용할 수 있는 소재로 멋지게 빠져나왔습니다. 그 뒤로 적당한 타이밍에 화자의 내면 심리를 깊게 깔고 가는데 좋네요. 능숙하게 소재와 이야기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게 초짜의 감이 아니에요.

다만 마지막 마무리는 아쉬웠습니다. 결국 화자는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데 직접적인 대사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장면으로 끝냈으면 싶어요. 조금 더 여운을 느끼고 싶었는데 대사 한 마디에 그대로 가로막힌 느낌. 그래도 대상을 받기엔 충분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초엽_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블라인드 심사 결과 동일 작가가 두 편 수상. 고민하던 심사위원들은 '상을 줄 수밖에 없는 훌륭한 작품'이란 결론을 내리고 동시 수상을 결정하게 됩니다. 제가 이 책을 접한 것도 이런 화제 덕분이었죠.

앞에서 작가에 대해 더 언급하고 싶었음에도 참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요, 이 작품은...... 사랑입니다. 사랑. 그리고 이게 SF에요. 과학적 사실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어요. 어디까지나 소재는 보조입니다 보조. 본질은 이야기예요

이 작품도 내용은 크게 없어요. 가족이 있을 행성계에 갈 우주선을 기다리는 여자와 그런 여자의 퇴거를 촉구하기 위해 우주 정거장에 들린 남자의 대화가 핵심일 뿐인, 이야기. 근데 SF에서만 선보일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조미료가 우리를 말 그대로 우주로 보내버립니다. 급격한 기술 발전, 달라지지 않는 인간의 시간, 그에 반해 너무나도 크고 큰 우주, 순식간에 바뀌어 버리는 거리 감각, 그리고 찾아오는 아련함, 동경까지. 와... 어떻게 신인 작가가 이런 감정을 자연스럽게 뽐낼 수 있는 거죠. 이건 계산한다고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지독한 자기 사색과 이야기와 과학에 대한 사랑이 겹쳐져야 나오는 아지랑이입니다.

다른 작품들도 다 좋았지만 이 단편 하나만으로도 작품집의 의의가 생겨났어요. 작가님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 어떤 사고를 거쳐 이 사실을 작품에 도입했는 지 묻고 싶을 정도. 너무나도 황홀한 단편이었습니다.



김혜진_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 간병 로봇 TRS를 통해 바라본 암울한 미래상의 모습. 이야기를 억지로 끌고나간 점이 몇 군데 보인 게 아쉬웠지만 대사의 합은 좋았어요. 이 작가는 독자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정연_마지막 로그 / 안락사 호텔을 배경으로 존엄한 죽음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는 소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더불어 가장 마음에 들었네요. 죽음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골격이 단단하단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품의 향이나 순간적인 아련함은 '우리가...' 가 좋았지만 문장을 곱씹는 맛은 이쪽이 더 좋았어요. 단호한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왠지 이 작가라면 특정 소재에 함몰되지 않고 다양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거 같아요.



김선호_라디오 장례식 /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라디오를 고치고 싶어하는 안드로이드와 사람이 없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나는 노인의 여정을 담은 소설. 특출날 것 없는 구조에 결말을 함유하고 있지만 대단히 안정적이고 엹은 맛이 우려나는 게 특징.

근데 그 와중에서도 작가 출신답게, 문창과스러운 문장과 향이 풀풀 납니다. 비꼬는 건 아니예요. 저도 이 소재와 구조를 던져줬다면 이렇게 쓸려고 노력했을 거거든요. 문장에 문장을 겹쳐 의미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마무리를 위한 소재 분배와 결말 방식까지. 이렇게 써놓고보니 글 쓰는 방식에 대한 취향이 비슷한 거 같아요. 아, 역시 이 장면에서 등장한 이 물건은 이렇게 쓰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 같은 식으로. 대단히 안정적인데 앞으로 다른 소재를 어떤 식으로 소화할 지 궁금합니다.



이루카_독립의 오단계 / 기계와 인간 신체의 결합이 가능해진 시대에 인공지능을 둘러싼 윤리적, 법적 문제를 다룬 이야기. 이 작가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을 써도 괜찮을 거 같아요. 적절하게 펼치는 무대의 규모 / 꿈에 대한 향유 /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적절한 배분과 이야기를 관통하는 힘까지. 무엇보다 재미있어요. 흩어졌던 갈래들이 하나로 뭉쳐 후반부에서 날뛰는데 더 긴호흡으로 갔어도 만족했을 거 같아요. 작가가 얼마나 고민하고 이야기의 틀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는 지 느껴집니다. 다만 결말이 살짝... 불완전연소로 끝났는데 이건 그냥 기분 탓일까요? 연작을 위한 발판?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각각의 길이 다른데 다 그만한 동력과 향을 갖춘 거 같아서 기뻐요. 특히 김초엽 작가님이랑 오정연 작가님 글은 계속해서 읽고 싶습니다. 이 작품집이 작년 이맘 때쯤 나왔는데 이번에도 좋은 작품들이 양껏 실렸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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