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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9/02 23:40:14수정됨
Name   nickyo
Subject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판단이 명료할 때는 늘, 몇 다리쯤 건너 있었다. 마치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으로 사람을 바라보며, 저 사람은 절대로 알아볼 수 없지만 나는 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되면 생기는 오만한 판단력. 때로는 도사처럼 잘 맞기도 했고, 때로는 그게 옳기도 했다.


노회찬 의원이 자결했다.


시간이 좀 지나 사람들과 했던 이야기가 자꾸 맘에 걸린다. 우리는 그럼 어디까지 그를 보호해야 했던 걸까? 노무현 대통령이 죽었을 때, 나는 사실 슬프지 않았다. 그가 인간미있고 드라마틱한 삶을 산 좋은 변호인이었다 한들, 그를 무언가로부터 보호하고, 막고, 편들고, 슬퍼해야할 사람처럼 느낄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회찬이 죽자, 나는 그 때 수많은 노사모들이, 혹은 노무현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느꼈던, 생각했던, 마주쳤던 벽을 만난다. 분노, 회한, 좌절, 슬픔, 혐오 등을 지나 마주쳐야 했던 벽. 그래서, 나는 노회찬을 어떤 입장으로 마주했어야 했는가. 그가 진보의 입지적이고 신화적 인물이었다는 것 만큼이나, 그가 있기에 사실은 흙탕물에 몸을 적시지 않고도 도도하게 진보주의자로 떠들어 댈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같은 것을 마주쳤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더욱 숨어들고, 어떤 사람은 흙탕물에 뛰어들었다. 그의 자결이 어떤 이유와 정세적 판단이었던 간에 많은 사람들이 노회찬에대해 심상정과 같았음을 속상해했다. 말 하지 않아도, 특별히 위하지 않아도, 원리 원칙대로 대해도 괜찮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막연한 믿음의 끝에서, 우리는 도돌이표처럼 돌아온 질문을 만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을까.


사람의 마음을 어디까지 열지, 어디까지 쓸 지, 혹은 그래서 어떤 편을 들 지는 다들 다를거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에 옳은 것보다 그 사람의 편이 되고자 하는 순간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이 그와 함께 옳다 말해도 틀리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 나는 내 신념보다, 믿음보다, 혹은 정의나 기준, 가치를 포기하고 어겨서라도 그 사람의 편이고 싶은 마음의 깊이를 알고 난 뒤로, 그때 맞았던 것들이 지금은 잔뜩 틀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었나. 멀리서 떨어져 있을 수 있지 않다면, 혹은 뒤늦게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깨달았다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려버리게 된다.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늘 어렵고, 특히나 어떤 경계를 만들어 가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를 쭉 대했을까. 때로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쭉 잘못된 선택을 반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묻는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나.


흔들리고 싶지 않았던, 기준을 세우고 싶었던, 그래서 늘 어떤 삶의 형태로 살아가고자 했던 20대가 끝났다. 30의 나는 미련과 찌꺼기가 머리카락이 뒤섞인 수채구멍마냥 엮여서 하루가 시원하게 지나가지 않고 꼴꼴꼴, 꼴꼴꼴 느리고 천천히 흘러내려간다. 하루가 지나가는 시간보다 하루가 다가오는 시간이 빠른지 채 내려가지 않은 하수구 위에 새 물이 쏟아진다. 수채구멍을 비울 새도 없이 새로운 이별이 찾아오고, 비명이 찾아온다. 나는 어디까지 감당했어야 했을까. 어디까지 괜찮았어야 했을까. 어디까지 끌어 안았어야 했을까.  그 때는 명확히 맞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잔뜩 빨간 줄이 그어져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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