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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8/20 17:57:05수정됨
Name   새벽유성
Subject   시집 책갈피

1.
내게 금빛 은빛으로 짠
하늘의 옷감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옷감이 있다면,

그 옷감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서

이제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은 것이 나의 꿈이니

- 하늘의 옷감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2.
봄을 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이 오면 잊을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네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너는 여름이었나

이러다 네가 가을도 닮아있을까 겁나
하얀 겨울에도 네가 있을까 두려워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또 봄일까

- 너는 또 봄일까 / 백희다


3.
아픈 마음과 광활한 외로움은 잠시 뒤로 할게
세상에 당신 하나 남을 때까지 철없이 빛나기만 할게

나 아닌 아침과 오후를 사랑해도 좋아
밤이면 내가 너를 쫓아갈게

- 달의 이야기 / 서덕준


4.
힘있는 자들이 이 계절을 화려하게 사는 동안 힘없는 자들은 모든 계절의 추억을 안고 죽은 듯이 살아간다.

- 힘 / 맹문재


5.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별빛이 달려오는데
왜 이렇게 밤은 캄캄한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아직 별빛이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한 시인이 아직 쓰지 못한 말을 품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왜 도달하지 못하거나 버려지는가
나와 상관없이 잘도 돌아가는 너라는 행성
그 머나먼 불빛

- 우주의 어느 일요일 / 최정례


6.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을 탐했네
온 마음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어낸 몇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7.
격정(激情)은 두렵고
고독은 달콤했어
눈물 흔했지만
서럽진 않았어
몽롱한 사랑으로
둥둥 떠 다녔어
세상은 눈부시고
마냥 벅차기만 했어

- 내 청춘은 / 임영준


8.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 내 청춘의 영원한 / 최승자


9.
죽은 이름들이 너무 많아
내 이름을 잊는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불러줄 거지?

- 사과 궤짝 中  / 임현정


10.
땅에 부딪힐 것을 알면서도
비가 하늘에서 몸을 던지는 이유는
단지 너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

벚꽃도 네 향기를 맡고 싶어했고
네가 빛나는 밤이면 가끔씩
별들도 네가 있는 창가로 떨어졌다

너와 나,
언젠가 어떻게든 끝날 사랑이라도
온 몸을 던진 이유는

떨어지는 찰나라도 행복했다더라

- 열역학 제 2법칙 / 양찬우


11.
난 네가 누군지 몰랐어
너는 햇살이었고, 바람이었고, 즐거운 충동이었지
너는 가루같은 물방울이었고, 춤이었고, 맑고 높은 웃음소리
항상 내게 최초의 아침이었어.

- 검고 푸른 날들 / 황강록


12.
모든 소망을 열람하였으나
꿈은 여태 싱싱한 상처를 낸다
나는 회전목마를 탄 아이처럼
자꾸 뒤를 돌아본다
너와 함께 행복해지는 법은 알지 못하나
너 없이 삶을 버티는 법도 배우지 못하였으니
봄은 꽃으로 뚝뚝 떨어진다
언젠가 네 가까운 자리에 놓고 온 심장
자꾸만 뒤척이고 꿈틀거리는데
오월을 나는 어찌 견디나
사랑, 너를 어찌 견디나

- 오월 / 황경신


13.
당신을 생각하며
한참 뭇 별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손가락으로 별들을 잇고 보니

당신 이름 석 자가 하늘을 덮었다.

- 별자리 / 서덕준


14.
주제를 알면서 감히 꿈을 꿨다
남루하고 깨진 마음에 버겁게도 밀어 넣었다.

내 마음에 절망이 스미고
결국 가라앉아 강바닥에 묻힌다 한들
기어코 담고 싶었다.

당신을 구겨넣고 이 악물어 버텼건만
내가 다 산산이 깨어지고
강바닥에 무력히 스러져 눕고서야 알았다.

그대는 그저 흐르는 강물이었음을.

- 강물 / 서덕준


15.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해 당신이 비행한다.

나는 당신이 남긴 그 허망한 비행운에
목을 매고 싶었다.

- 비행운 / 서덕준


16.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이런 시 / 이상


17.
첫 숨부터
벌거숭이 삶에 연초록 옷 입혀
맑게 스며든 꽃 정

따스한 손잡고 죽는 날까지
어제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시들지 않는 바람으로 묶어
날려 보낸 숱한 연서들

ㅡ 당신 참 좋아했었는데

- 종이비행기 / 조경화


18.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여승 / 백석


19.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 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 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어찌할 수 없이

- 낙화유수 / 함성호


20.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 이 가을에 / 나태주


21.
조금도 독창적이고 싶지 않은 하루야.
오늘의 어둠은 어제의 어둠처럼 혹은
백년 후의 어둠처럼 펼쳐지고
나는 다만 읽는 자로서 당신을 바라보네.
맥주는 정말 달력 속 맥주처럼 시원하고
꼬치에 꿰인 양은 한 번도 매애매애 울지 않아.
고백 없는 고백록의 금빛 장정처럼
내용이 사라진 중세의 신비한 금서처럼
당신의 페이지는 당신을 기록하지 않지.
당신이 내게 밑줄을 긋는다면
나는 온순한 낱장처럼 활짝 벌어져
끓어오르는 사막의 한가운데를 펼칠 수도.
오늘 나를 돌아 나가는 피는 제법 피처럼 붉고
시시각각 식어 가지만.
당신은. 나는.
오늘의 양고기와 내일의 후회에 대해
새벽 한 시 무심히 터진 울음에 대해
서로 다른 길 위에서.
정말이지, 오늘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평행선의 날.
밤의 페이지가 천천히 넘겨지자
한 권의 책이 스르르 쓰러지듯
내 눈동자 밖의 당신이
잠시, 흔들렸을 뿐.
몸 안을 가득 채운 글자들이 쏟아지려다 말았을 뿐.
만년필에서 실수로 떨어진 한 방울 잉크처럼
당신은. 나는.

- 평일의 독서 / 김경인


22.
저기 저
푸른 비단을 구르는
진주 방울 좀
보아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나무 끝 잎사귀 위
사뿐 내려앉아
무지갯빛 밝혀주는
물의 방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손잡이가 없어
서성
서성이네

- 물방울 / 고성만


23.
저녁과 겨울이 서로를 만진다 초등학교 구령대 아래에서 누가 볼까 두려워하며

겨울이 저녁을 움켜쥐고, 저녁이 약간 떨고, 그 장면은
기억에 있다

어두운 운동장이 보인다 기울어진 시소와 빈 그네도 보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인다

누가 우릴 본 것 같아, 저녁이 말했고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 그러자 저녁이 검게 물들고

그 장면은 기억과 다르다
장면이 모이면 저녁이 되고, 기억이 모이면 겨울이 되는,

그런 세계에서

너무 어린 나는 늙어간다
늙어버릴 때까지 늙는다

이 학교는 나의 모교이며, 나는 여기서 따돌려지고 내쫓겼다 말하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저녁의 기억
겨울이 저녁을 핥았는데 그것은 기억 속에서의 일이었다

저 멀리서 손전등의 불빛이 다가올 때는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은유 / 황인찬


24.
당신이 있는 방향으로 바람이 분다
나는 당신에게만 어지러운 목소리를 가졌다

눈 내리는 날마다 악몽을 꿨다

왜 나는 당신에게 잠드는가
왜 나는 당신을 앓는가

어떤 고백에는 현기증이 없다

아무도 살지 못한 통증으로 모두가 죽어갈 때
당신이 앓는 아픔이 나를 병들게 한다

서러움에 빛이 들지 않으면 눈동자가 흔들렸다

몸의 내장된 쌍둥이가 마음을 잡아먹을 것이다

슬픔을 탕진하지 못한 사람들
간직하는 것만큼 아픈 관음이 있을까

당신을 죽여버리기에는 너무 가난한 날씨였다

폐가들이 모여 사는 폐허

삶이 과분하리만치 부유한 가벼움에
몸을 엎드리고

태어난 적 없는 언어를 고백하려고
세계는 언제나 어둠이 잘 표현될 수 있는 곳으로

당신의 잠을 내가 훔쳐 잘 수 있다면

당신의 잠을 내가 훔쳐 잘 수 있다면

- 꿈꾸는 불면증 / 이이체


25.
누가 내 꿈을 훼손했는지

하얀 붕대를 풀며 날아가는 새 떼,
물을 마실 때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자의 명치를 밟고 함께 주저앉는 일 함께 멸망하고온 것들

그녀가 나무를 심으러 나갔다 나무가 되어 있다

가지 굵은 바람이 후드득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아이들을 흔든다
푸르게 떨어지는 아이들

정적이 무성한 여름 정원, 머무른다고 착각할 법할 지름,
계절들이 간략해진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정원에 있다 슬프고 기쁜 걸 청각이 결정하는 일이라니
차라리 눈을 감고도 슬플 수 있는 이유다

정원에 고이 잠든 꿈을 누가 훼손했는지 알 수 없다 눈이 마주친 가을이
담을 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걸쳐 있다

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당신이 땅을 훑고 가는 소리

우리는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

- 여름 정원 / 성동혁


26.
그대 늙어 백발이 되고 졸음이 많아져
벽난로가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할 때, 이 책을 꺼내어보세요.
한때 그대 눈에 지녔던 부드러운 모습과 그 깊은 그림자를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다정하고 우아한 기품을 사랑했고
그대의 아름다움을 거짓, 혹은 진실함으로 사랑하였던 가를.
다만 한 사람만이 그대 순례자의 영혼을 사랑하였고,
그대의 변해가는 슬픈 얼굴의 사랑했음을.

그리고 달아오르는 쇠살대 곁에 몸을 구부리고서,
조금은 슬픈 듯이 중얼거려요.
어떻게 사랑이 머리 위에 솟은 산 위로 도망치듯 달아나
무수한 별들 사이에 그 얼굴을 감추었는가를.

- 그대 늙었을 때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27.
봄이 와도 죽음은 유행이었다

꽃이 추락하는 날마다 새들은 치솟는다는 소문이 떠돌고 창밖엔 하얀 유령들만 날렸다

네 평 남짓한 공간은 눈이 흩어진 개의 시차를 앓고

핏줄도 쓰다듬지 못한 채 눈을 감으면 손목은 펜 위로 부서지는 파도의 주파수가 된다 그럴 때마다 불타는 별들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심장 끝에서 은하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안다 늙은 항성보다 천천히 무너져가는 지구라면 사각의 무덤 속에는 더러운 시가 있을까

흙에서 비가 차오르면 일 초마다 꽃이 지는 순간 육십 초는 다음 해 꽃나무

퍼지는 담배 향을 골목에 앉아있는 무거운 돌이라 생각해보자

얼어붙은 명왕성을 암흑에 번지는 먼 블랙홀이라 해보자

천국은 두 번 다시 공전하지 못할 숨이라 하자

이것을 혁명이자 당신들의 멸망이라 적어놓겠다 몇백억 년을 돌아서 우주가 녹아내릴 때 최초의 중력으로 짖을 수 있도록, 모두의 종교와 역사를 대표하도록

두 발이 서야 할 대지가 떠오르면 세계 너머의 하늘이 가라앉고 나는 그 영원에서 기다릴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세상이 있었다

- 지구 여섯번 째 신 대멸종 / 최백규


28.
그대가 젖어 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머리를 감겨주고 싶었는데 흰 운동화를 사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도적이었는지 나비였는지 철 지난
그놈의 병을 앓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대에게 살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
이 나라에 살지 않는 것 이 시대를 살지 않는 것,
내가 그대에게 빗물이었다면 당신은 살아 있을까
강물 속에 살아 있을까

잊지 않고 흐르를 것들에게 고함

그래도 내가 노을 속 나비라는 생각

- 내가 나비라는 생각 / 허 연


29.
병원이란
네모나고 하얀 두부 같은 장소에서
당신의 목숨이 조금씩 갂여가는 동안
나는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어요

지금 당신의 찻잔은 여기 있는데
당신은 어디에도 없군요

먼 옛날
엄마가 어쩌다 찻잔을 깨뜨리면
당신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죠
슬퍼해서는 안 돼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는 부서지니까
슬퍼하면 엄마를 책망하는 셈이라고

당신의 갑작스런
-그리고 영원한-
부재를
슬퍼하면 당신을 책망하는 셈이 될까요

그날
병원 침대에서
이제는 지쳤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사실은
그만 길을 떠나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러지 못했지만.

그 조금 전에
담배를 피우고 싶다던 당신에게도
사실은
그냥 피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곧 먼 길을 떠날 테니까
라고.

그러지는 못했지만.

미안해요.

안녕,

저도 곧 갈게요.

지금은 아니지만.

- 아빠에게 / 에쿠니 가오리


30.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
두 주먹에 나누어 쥔 유리 구슬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이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만 맞히실까?

부드러운 작은 몸이 그렇게 굳어버렸다
어느 오후 미리 짜놓아 굳어버린
팔레트 위의 물감, 종이 울린 미술시간
그릴 것은 정하지도 못했는데

초봄 작은 나뭇잎에 쌓이는
네 눈빛이 너무 무거울까봐 눈을 감았다

좋아하던 소녀의
부드러운 윗입술이 아랫입술과 만나듯
너는 죽음과 만났다

다행이지, 어른에게 하루는 배고픈 개들
온종일의 나쁜 기억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그러니 개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줄 개들을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세월이 어서 가고 너의 아빠도
말랑한 보랏빛 가지를 씹어 그걸 쉽게 삼키듯
죽음을 삼킬 테지만

그 전에, 봄의 잠시 벌어진 입 속으로
프리지어 향기, 설탕에 파묻힌 이빨들은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비좁은 장소에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다란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봄날에 죽은 착한 아이, 너를 위해

- 봄에 죽은 아이 / 진은영

*
개인적으로 좋아한 시들을 모아봤어요. 더 있지만 30개로 컷할게요.


* Toby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9-06 14:0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6
  • 눈물짓게되네요. 고맙습니다.
  • 저도 파릇한 문학소녀일때가 있었는데...(쓸쓸) 시.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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