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잽에 대해 다루려고 했는데, 잽에 대한 이런저런 유의사항들을 쓰다 보니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잽 자체가 아니라 펀치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초심자들은 여러 팁이나 다양한 종류의 잽을 몰라서 힘든 게 아니고 펀치를 칠 때 자세가 무너지기 때문에 힘든 것이죠. 그래서 다소 어려운 부분까지 다루더라도 일반적인 펀치에 대한 개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Rewind : Once upon a time there were stance and step...
우리는 앞서 스탠스와 스텝에 대해 다뤘습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부분이죠. 다시 한 번 스탠스를 복습해보면, 발은 어께 넓이로 하고, 턱은 숙이고, 손은 턱에 올리고, 머리는 앞발을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게 요지였습니다. 또 스텝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중심을 하체로 낮추고,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 발로 밀면서,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발을 먼저 내딛고 반대발을 끌어당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운 이 모든 원칙은 우리가 거기에서 펀치를 얹기 시작하는 순간 모두 무너집니다.
펀치를 치는 순간, 우리의 발은 어께 넓이보다 넓어지게 되며, 손은 턱에서 떨어지고, 머리는 앞발을 넘어 휘청거립니다. 그뿐인가요. 중심은 상체로 올라가고 앞으로 나갈 때 어떤 발에 체중이 있는지조차 느낄 수 없게 되죠. 이 모든 원칙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은 링 위에서 가드가 내려간 채 허우적대는 모습 그 자체입니다.
스탠스와 스텝의 원칙은 쉽습니다. 하지만 펀치를 칠 때 그 원칙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앞에 샌드백이 있고, 미트가 있고, 헤드기어를 쓴 상대방이 있을 때, 상대를 맞추고 말겠다는 욕심이 모든 원칙을 무너트립니다. 따라서 내가 어느 정도 실력인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진단할 수 있습니다. '과연 지금 내 눈 앞에 샌드백이 없다고 해도, 내 몸은 휘청거리지 않은 채 다음 펀치를 던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초심자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맞추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좋지만 동시에 약점을 노출시킨다
욕심을 버리고 살살 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스텝과 스탠스에서 체중이 이동하는 것처럼, 펀치 역시 체중이동을 동반합니다. 오히려 펀치를 칠 때 이동하는 체중이 훨씬 많죠. 여기에서 문제는 스텝의 체중이동과 펀치의 체중이동을 얼마나 일치시키느냐입니다. 펀치의 체중이동이 스텝이 필요로 하는 체중이동을 넘어서면 몸은 휘청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텝의 체중이동과 펀치의 체중이동이 아예 일치하지 않을 경우 펀치에 충분한 힘을 실을 수 없는 것이고, 반대로 펀치의 체중이동에만 신경쓰는 경우 몸의 중심이 각운동량을 넘어서 휘청이게 됩니다. 상대를 충분히 타격하기 위한 적절한 힘의 펀치를 주면서, 동시에 중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샌드백을 칠 때, 샌드백이 네 체중의 일부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샌드백이 자신의 체중을 받아줄 것을 알고 세게 쳐 버릇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미트를 칠 때 몸이 휘청이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링 위에서 상대방은 항상 자신을 맞아주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식으로 연습하면 실전에서 낭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관장님들이 보통 타격연습 시 샌드백이 펑펑 흔들리는 걸 보면 눈살을 찌푸리곤 합니다. (이건 끊어치는 문제와도 연관이 있긴 하지만)
자신이 샌드백에 체중의 일부를 배분하고 있는지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진단할 수 있습니다.
-펀치를 칠 때 자신의 머리가 앞발을 넘어서는지 -앞무릎이 체중의 이동을 받아줄 만큼 충분히 굽혀져 있는지 -펀치를 칠 때 내 발이 뜨지는 않는지
반대로 힘을 싣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까요? 펀치에 힘을 싣지 못하는 사람들의 제일 대표적인 문제는 오른발과 왼발, 그리고 샌드백이 정삼각형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허리나 다리를 돌리는 것과 상관없이, 샌드백과 자신의 양발이 일직선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상대방의 위치는 자신의 오른발 앞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던지는 강한 펀치들, 라이트 스트레이트나 레프트 훅이 지나가는 최적의 경로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후 스텝을 오랫동안 밟다 보면 우리는 어느 새 스텝이 일직선이 되기 마련이고 시선으로 인해 샌드백이 일직선이 되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이 경우 펀치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을뿐더러 그러면서도 펀치를 치고 난 다음 중심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다음으로 펀치의 체중이동과 스텝의 체중이동이 서로 불협화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잽을 제외한 모든 펀치는 체중이동을 수반합니다. 예를 들어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오른발에서 왼발로 체중이 이동하고, 레프트 훅은 왼발에서 오른발로 체중이 이동합니다. 한편 왼쪽으로 위빙을 하면 체중은 오른발에서 왼발로 이동하죠. 따라서 왼쪽 위빙 이후에 우리가 던질 수 있는 펀치는 레프트 훅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라이트 훅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죠.
2.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지만...
두 번째로 턱을 낮추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제가 스탠스를 배울 때 턱을 숙이라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건 혼자서 쉐도우 복싱을 할 때는 잘 지켜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마주하는 상황은 상대방을 마주할 때 우리의 턱이 계속해서 들리는 모습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전체 감각의 70%정도를 시각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헤드기어를 쓰고 상대방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대단히 제한된 시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마에서부터 헤드기어는 계속해서 내려오고, 우리의 가드로 인해 광대 아래쪽 시야도 없죠. 이에 복싱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상대방이 나를 때리려고 하는 모든 장면을 자신의 눈에 아로새기고 싶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 순간 내 턱이 들려서 상대의 펀치가 날아오는 것을 감상한다와 동일한 의미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보려는 것은 좋지만 그 순간 우리는 약점을 노출한다.
실제 복서들은 상대를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드와 헤드기어로 인한 제한된 시각정보 속에서 상대방의 펀치를 예측하고 움직입니다. 흔히 복싱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복싱을 오래 하면 동체시력이 좋아져서 펀치가 느리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력과 경험이 쌓인다고 펀치가 느리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상대방의 펀치의 시작을 얼마나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 장정구 선수는 상대의 발만 보고도 연타를 피해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상대의 발이 주는 정보를 통해 펀치를 예측할 수 있는 링 아이큐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싱 역사에서 수비로 이름을 남긴 천재들은 모두 이런 예측에 대단히 능했습니다.
그건 제가 논할 도리가 없다고 보입니다.
살짝 첨언하자면, 선수의 성공에는 재능뿐만 아니라 어느 국가에서 태어나고, 어떤 식으로 초반 커리어를 쌓고(예컨대 us 올림피언) 어떤 트레이너를 만나고, 어느 매니저와 프로모터를 만나는지 같은 우연적 요소가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제가 그걸 정리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