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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6/03 21:38:44
Name   호라타래
Subject   애착을 부탁해
들어가며

1년 사이에 맺었던 새로운 인간관계 내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고 자부하는데, 3월 말쯤 이틀간 신체화 증세가 나타더라고요. '이거 좀 문제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지인에게 부탁해서 몇 가지 테스트를 했는데,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 수치가 아니라고 평가하길래 많이 쫄았습니다. 몇 가지 요인들을 정리하고, 또 몇 가지 요인들을 확인하면서 스트레스는 많이 줄였어요. 다만 새롭게 맺는 관계에서 전에 없던 불안이나, 피해의식이 침습하더라고요. 겪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면 자연스러운 방어기제기는 한데 역기능적인 측면이 많다고 느꼈어요. 주변의 도움과 상담을 통해 4-5월간 경감시켰습니다.

덕분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관련된 논문들을 찾아 읽었습니다. 관계 문제로 발생한 상황이기 때문에 '애착'이란 주제로 대부분 수렴하더라고요. 상담 선생님께서는 애착이 워낙 어디에나 들어맞는 이론인지라 구체적인 지침으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시는데, 역으로 심리/상담 분야에서 다루는 여러 개념들을 만져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이하에서는 애착 중에서도 '성인 애착'을 중심으로 검색하여 읽은 논문 78편 중, 묶어낼 수 있는 논문들을 나름대로 정리합니다. 비전공자 입장에서 광범위한 분량을 우겨넣다보니 세부적인 내용 정리가 깔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확인하시면 바로바로 댓글로 짚어주세요

여기에서 성인이란 후기청소년기인 대학생1)을 포함합니다. 사실 한국에서 시행한 경험적 연구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 많아요. 연구 편의성을 고려한 선택이겠지만, 아무리 정교한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샘플링의 한계 때문에 일반화가 제한되는 부분이 있지요.

애착이론과 성인애착

애착(Attachment)은 한 사람 또는 몇몇 특정인에 대한 정서적 결속 및 유대를 뜻합니다. 보울비(Bowlby)는 유아가 초기 양육자2)와의 반복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초창기의 애착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아동은 부모와의 애착 경험을 통해 자신, 다른 사람, 환경을 이해하는 신념 혹은 정신적 표상인 내적작동모델(internal working model)을 발전시킵니다. 이 내적작동모델이 인간의 인지와 정서에 긴밀히 결부되어 있으며, 자각이나 노력 없이 행동으로 연결되어 장기적 인간 관계의 뿌리를 구성한다는 것이 애착이론3)의 골자입니다.

(초기양육자가 나에게 이렇게 해주는 것을 보니)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없는) 사람이구나', '(초기양육자가 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을 보니) 타인이란 의지할 가치가 (있/없)구나',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하는구나' 등등의 인지/감정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내면화 되고, 새로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작동하여 우리의 향후 경험을 조형한다는 것이지요.

성인애착은 성인이 현재 지니고 있는 애착의 형태를 가리켜요. 애착이면 애착이지 또 구태여 성인 애착을 분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애착 이론이 내적작동모델의 전생애적 영향력을 강조한다고 짚었는데 말이지요.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현재의 인간관계 양상을 초기 애착을 통해서는 모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초창기 형성된 내적작동모델은 개인의 발달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지만, 그 모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콜린스와 리드(Collins & Read, 1994)에 따르면 내적작동모델은 위계를 지닙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표상인 일반적 내적작동모델, 부모-자녀 관계, 낭만적 관계 등 관계의 특성에 따른 영역 특수한(domain-specific) 모델, 특정 인물과 관련된 표상을 결정하는 관계 특수한(relationships-specific) 모델이 있습니다(이정희·심혜숙, 2007에서 재인용).

이러한 복잡화와 재조직화는 우리가 관계망의 형태를 다변화하고, 경험을 누적해가면서 일어납니다. 청소년기에 가족과의 심리적인 분화가 진행되면서 내적작동모델의 대상은 부모 뿐만 아니라 애인, 친구, 배우자 등으로 다양해집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애착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성공, 실패, 기쁨, 고통은 다양한 인간관계에 대한 내적작동모델의 층을 구성합니다. 이 내적작동모델의 세부 영역들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모와의 안정적인 애착 형성에 실패하여 또래 집단과의 애착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서도 초기 내적작동모델이 또래 집단과의 애착 형성에 부적응적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있을 거고요.

개별적인 관계와 경험의 누적은 내적작동모델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동기에 불안정했던 애착이 '획득된 안정애착'으로 변하기도 하고, 아동기에 안정적이었던 애착이 '현재의 불안정 애착'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서미경·정남운, 2016)4). 특히 사랑, 안정감, 편안함 등의 정서적인 잠재력을 유발하는 친밀한 낭만적 관계5)는 다른 어떠한 인간관계보다도 내적작동모델이 깊이 있게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 모델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보다 높습니다.

성인의 애착과 아동의 애착이 구분되는 또다른 양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양육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돌봄을 제공받는 유아기의 애착과 달리 성인애착은 돌봄을 서로 주고받는 상호호혜적 특징을 지닙니다. 또한 관계의 양상이 외부에서 관찰 가능한 수준으로부터, 신념, 기대감과 같은 내적 수준으로 옮겨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동애착은 신체적 생존과 정서적 안정이 똑같이 중요한 요소지만, 성인애착은 정서적인 안정에 중점이 맞추어져 있지요. 마지막으로 성인애착의 경우 애착대상과의 성적인 결합(sexual mating 혹은 sexual intercourse)이 중요하게 부각되기도 합니다(김지원·심혜원, 2016)

초창기의 성인애착 연구는 아동 애착 연구의 유형 분류를 받아들였습니다. 애인스워스가 낯선 상황 실험6)을 통해 분류한 아동 애착 유형의 세 가지 범주인 안정애착, 회피애착, 불안정/양가애착을 적용했지요. 하지만 심리학 내의 이론적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질적인 범주 구분의 타당성이 문제시 됩니다. 각 범주가 구분되는 지점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고, 통계적 검증력의 문제도 부각되지요. 성인애착 연구도 마찬가지라 20세기 후반부터는 브레넌(Brennan)의 제안을 따라 성인애착을 불안애착차원(attachment anxiety)과 회피애착차원(attachment avoidance) 상의 연속적인 값의 교호로 이해합니다. 성인애착의 값이 클 수록 불안정한(insecure) 것이지요.

이 때 1] 불안과 회피 모두의 수준이 낮으면 안정, 2] 불안이 높고 회피가 낮으면 몰두, 3] 불안이 낮고 회피가 높으면 거부, 4] 불안과 회피 모두가 높으면 두려움으로 분류 가능합니다. 이 네 가지 범주는 자신/타인에 관한 긍/부정 표상을 교차시키는 이원분류표를 통해서도 파악 가능하지요.


[그림 1] 자신/타인에 대한 긍/부정 표상의 이원교차표
(출처: https://believeperform.com/performance/using-attachment-theory-to-better-understand-your-athletes/)


[그림 2] 불안/회피 차원에 따른 애착유형.
(출처: https://www.psychologytoday.com/us/blog/the-mysteries-love/201503/how-change-your-attachment-style)

각 성인애착 차원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회피애착 수준이 높은 사람은 애착대상과 가까워지거나 의존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여기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파악하지요.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할 만한 타인이 많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정서에 대한 비활성화 전략이 두드러집니다. 관계에 대한 욕구와, 타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버리는 것이지요. 타인과 거리를 두려고 하며, 상대방의 의도에 대해 의심합니다. 타인이 보내는 조금의 부정적인 신호, 타인에 대한 작은 실망만으로도 관계를 빠르게 철회합니다. 스스로의 관계욕구를 부정하는 단계에 접어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정하고, 포기하고 싶다고 해서 가능한 영역이 아니지요. 문제없이 잘 살아가다가도 갑자기 찾아드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타인과의 심정적 거리를 100으로 벌리는 전략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계에서의 자극을 최소화 하기에 내적작동모델은 도전받지 않은 채 유지됩니다.

불안애착 수준이 높을 수록 애착대상으로부터 거절받고 버림받는 것을 경계합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이상화된 상을 그리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파악하지요.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타인들을 너무나도 크게 생각하지요.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끌기 위한 노력을 엄청나게 기울입니다. 이 경우 정서에 대한 과잉활성화 전략이 두드러집니다. 자신의 감정을 극적으로 과장하여 타인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감정의 고백과 공유는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 전략이기에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발전하기 시작한 관계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들에게 관계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갈등은 견디기 힘든 자극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너무나도 ‘상처입는’ 자들이랄까요. 또한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부정적인 정서에만 몰두한 나머지 상대방을 비판, 비난하고 나중에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요. 이들에게는 언제나 확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상대방과 자신의 거리를 0에 가깝게 만드려는 전략은 관계를 파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적작동모델이 역기능적으로 작용한 결과 이들은 또다시 인간관계에 대한 신뢰를 잃습니다. 일부는 그 결과 내적작동모델이 변화하여 회피를 택하기도 합니다.

위의 구체적인 작동 양상에서 살폈듯이, 대인관계 부적응은 자기 영속적인 순환 과정을 지닙니다. 이 중 고통을 더 야기하는 것은 불안/양가의 차원입니다. 회피는 관계에서 상처입을 여지를 봉쇄해버리는 전략이지만, 불안은 관계에서의 상처가 계속해서 누적될 수 밖에 없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여기에 해당하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자면 회피와 불안은 차원상의 연속적인 값이며, 누구도 완전히 안정적이지도, 불안정하지도 않습니다. 일반적인, 영역-특수한, 개별적인 층위에 따라 불안했던 그리고 회피했던 순간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성격에 따라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고요7). 또한 자동적 인지/정서적 도식인 회피와 불안애착이 우리의 심리적 상태로 이어지는 경로에는 매개변인들이 존재합니다. 비록 애착이론의 임상적, 통계적 타당성이 폭넓게 인정받고 있지만, 기계장치의 신처럼 끌어다 쓸 수는 없는 것이지요.

최근의 연구는 성인애착과 대인 혹은 자기 관계를 매개하는 구체적인 변인들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높은 일반성을 지니는 많은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애착 이론 또한 실천적 개입의 순간에는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질문에 봉착할 수 밖에 없거든요. 이미 형성된 애착 패턴 그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목표는 타인에게 미치는 우리의 영향력에 대한 과대평가이겠지요. 대신에 각자가 관계망 내에서 양상을 조절하는 다양한 방식들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긍정적인 관계 경험 혹은 재경험을 꾀하는 것이 더 실용적인 접근일 것입니다.

애착을 위한 조언들

앞서 부모와의 애착이 내적작동모델의 기본 도식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한 한국 맥락에서는 초기성인기 대학생들조차도 어머니들이 심리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는 경우가 두드러지지요(전혜경, 2015). 부모로부터의 심리적 독립은 초기에 구성된 내적작동모델로부터 변화하고(조영주·최해림, 2001; 나선영·안명희, 2011), 자신의 애착을 스스로 다루어 나가기 위한 기반이 될 거예요. 하지만 한 개인의 내적작동모델은 영역에 따라, 각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요. 부모와의 관계 개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요.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회피애착은 스스로의 정서적인 경험을 비활성화하고, 불안애착은 자신의 정서적인 경험에 과잉활성화 한다고 앞서 짚었어요. 따라서 회피애착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정서적인 경험을 수용해야 해요. 다른 일에 몰두하여 정서적인 경험으로부터 회피하는 건 스트레스를 다루는 전략 중 하나지만, 경험회피가 계속되면 내적작동모델을 교정할 기회를 잃어버리며, 때로는 억압된 정서들이 머리 속으로 스며들게(침습적 반추) 되지요. 반대로 불안애착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서적인 경험들을 한 발 물러나서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정서인식명확성이라 부르는 관점인데, 자신의 신체적 상태, 감정, 사고를 통해 스스로의 정서를 파악해내는 능력을 말해요(이인재·양난미, 2017). 여기서 한 발 물러나서 파악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내 마음의 상태가 이렇구나라는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다루는 관점이지요.

이 때 동원할 수 있는 전략은 의도적 반추와 자기자비가 있어요. 반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하나는 지나간 사건들이 불현듯 머리 속을 지배하는 침습적 반추(부적응적 반추), 다른 하나는 의도적이고 지나간 일들을 인지적·정서적으로 숙고하는 의도적 반추에요. 침습적 반추의 경우 위기 사건(외상 경험) 이후에 특히 활성화가 되요. 사건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재경험하고 인지적으로 분석하지만 정작 정서는 외면하기 때문에, 분석을 해도 해도 마음에서 풀리는 건 없거든요. 그러면 이제 잠 못 이루는 밤이 찾아드는 거지요. 그렇지만 사건의 인지적인 분석, 재구성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자신이 느꼈던 감정, 정서까지도 명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의도적 반추는 정서인식명확성으로 나아가는 길이에요(강혜림·정남운, 2018). 다른 말로 이를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고 합니다. 감정과 인지가 분리되어 있다는 접근은 심리의 실제와는 거리가 있어요. 우리의 정서체험은 기실 사건에 대한 해석의 경험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의도적 반추를 동원하기 이전에 갖춰야 할 자세가 있어요. 바로 자기자비지요(하진의, 2013). 이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인간 공통의 경험으로 바라보기, 불충분하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바라보기,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거리를 갖고 스스로를 바라보기를 뜻해요. 벌어진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비판단적으로 수용하고, 이후에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 때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적절함을 판단하거나 스스로를 비난하는 대신 자신에게 친절한 태도(self-kindness)를 유지할 필요가 있어요(이은지·서영석, 2014).

용서는 회피애착과 불안애착에 따라 양상이 갈려요. 불안애착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이 수용받기 위해서 쉽사리 타인을 용서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섣부른 용서는 안 하니만 못하거든요. 풀지 못한 증오와 분노가 남아서 또다시 땅을 파고 들어가게 되지요. 종국적으로는 용서하더라도 그 전에 스스로부터 용서하고 챙길 필요가 있어요. 반대로 회피애착 수준이 높은 사람은 타인을 너무 용서하지 않아서 문제에요. 이들은 타인에게 잘 공감하지 못하거든요. 후자의 사람들은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부족함을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전은숙·홍혜영, 2012; 윤성민, 2012; 정명선·이경준, 2014).

이를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을 갖춰야 해요. 자신과 타인에 대한, 혹은 특정 관계에 대한 비합리적인 신념이 크면 클수록 고통은 커집니다. 이는 '포기하면 편해'류의 시각과는 거리가 있어요. 타인에 대한 불신은, 타인에 대한 과신만큼이나 비합리적인 신념이거든요.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모순적이고 다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어요. 거기에 분노하고 실망하기 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바꾸어 나갈 수 있을지, 타인의 모순과 잔혹함을 어떻게 '잘 찌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편이 낫지요. 내가 지금은 어찌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하고요. 이를 [유한성의 수용]이라 부릅니다. 고통이나 실패를 인간의 불가피한 경험으로 인식하고, 심리적으로 고립되지 않으며 타인과 유대감을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에요. 보편적 인간성(common humanity)라 칭하기도 합니다.

감정표현은 중요해요. 감정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면서 이를 억제하고 마음 속에서 갈등하는 상태를 정서표현 양가성(ambivalence over emotional expressiveness)라 부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즉각적인 감정표현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가설에 기초(김민정·조민아, 2017)한 태도인데, 불안과의 관계가 더 밀접하기는 하지만 불안·회피 애착 모두가 이 정서표현 양가성과 연관이 됩니다.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두려움이 선행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친밀감 두려움이라 불리는 이 감정은 상대와 밀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부, 애정 상실에 대한 공포이지요. 이 때 거절에 각 개인이 얼마나 민감한가(거절민감성)에 따라 우리가 택하는 자기노출의 양과 질은 달라집니다(성정아·홍혜영, 2014; 윤석은 외, 2016). 회피애착의 수준이 높은 사람은 자기노출의 증가가 친밀감 두려움의 감소에 도움이 됩니다. 다만 불안애착 수준이 높은 사람은 이미 자기노출은 많이 하는 상태이지만, 그 방식이 적절하지 않은(일관성이 없거나, 지나치게 빠른 개방)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기노출양상 자체를 점검할 필요도 있습니다8).

어느 쪽이건 관계진솔성(relationship authenticity)은 깊이 있게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해요(이은지 외, 2013). 타인과의 관계에서 진짜 자기와 일치되는 태도와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정서적 불편함, 예상되는 상대방의 반감, 관계가 불안정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거든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적 지지를 증진시킬 수 있어요. 세계와 타인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상처는 필연적이에요. 하지만 자신을 지지해주는 의미있는 타자를 다양하게 확장해나가면서, 그리고 수용받는 경험을 늘려나가면서 우리는 자기대상(selfobject)을 응집시킬 수 있어요. 타인의 인정과 공감을 통해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취약한 자기를 보호하고 불안을 완화하며, 타인의 말없는 현존을 통해 내적인 삶을 이해받는 것이지요(김태사·안명희, 2013). 달리 말하자면 사회적 지지의 추구는 그 자체로 불안정 애착의 부적응적 영향력을 완화하면서, 사회적 지지의 내면화인 자기대상을 통해 직접적인 사회적 지지 없이 불안을 다루어나가는 힘을 주어요.

동시에 상호작용의 질과 양을 늘리고, 그 경험을 반추하는 과정은 정신화(mentalization)9)에 영향을 주어요. 정신화는 다른 말로는 메타/상위인지(metacognition)이라고 부르는데, [자신의 정서와 인지에 대한 정서와 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짚었던 정서인식명확성과도 연관이 되지만, 보다 상위의 개념이에요. 자기 마음 상태를 관찰하고 이해하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마음 상태를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성찰적 기능이지요. 기존의 내적작동모델이 재조직화 되어 습관화된 양식에서 '탈자동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정신화는 우리의 경험이나 표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박인숙·김은하, 2018)10).

이러한 전반적인 양상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관점은 영성(spirituality)이에요. 여기서의 영성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측면을 온전하게 통합시키는 내적 자원의 총체이자, 삶의 의미와 가치를 경험하게 하고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는 인간의 보편적 핵심 에너지를 가리켜요. 개인이 신체적, 정신적인 차원을 초월하여 역경에 대하여 반작용하고 삶의 의미와 함께 가치를 추구하는 힘이지요(박인숙·김은하, 2018). 앞서 언급했던 응집된 자기대상과 상당수 비슷하지만, 삶의 의미나 목적, 사명 등을 인식하고, 육성 및 증진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대인적인 상호작용과는 다른 경로로 증진될 수 있다고 느꼈어요11)12).

나가며13)

어찌보면 매우 단순한 이야기에요. 스스로에게 자비로워지고, 자신의 마음을 뚜렷하게 직시하고, 타인에 대해 현실적인 기대를 품고, 관계 속에서 깊이 있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사회적 지지를 확장하고, '나'를 단단하게 응집시키고, 타인의 마음을 성찰적으로 바라보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이야기이지요. 읽어만 보시면 너무나도 좋은 말들의 나열이라고 냉소지으실지 몰라요. 하지만 막상 자신의 고통에 본문의 렌즈를 적용해보면 느끼는 바는 다르실 거예요.

언제나 실천은 어려워요. 위의 지침들이 구체화 된 지침이라기 보다는, 막연한 태도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도 이론이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 속에서 함께 고려해야 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착과 우리의 경험 사이를 매개하는 변인들을 다양하게 탐색한 연구들을 보면서, 좋은 이론만큼 실천적인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so practical as a good theory)는 레윈(Lewin)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더라고요.

일정 이상의 나이가 되면(혹은 자아가 생겨나고 발전하면) 우리는 지나간 것들이 우리를 구성했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시기를 마주하게 되요. 경험으로 누적되어 습관으로 기입된 어찌할 수 없는 마음들에 책임을 져야할 때가 오지 않나 싶어요. 스스로를 배려해야 하는 시기가요.

그러니 너와 나의 애착을 부탁해요 :)

각주

1) 글을 읽으실 때 자아 탐색이나 관계 실험을 대학 이후로 유예하라는 압력이 강하고, 가족에 대한 기대가 다른 사회보다 높은 한국 사회의 특징을 고려하셔야 해요. 특히 성인기 중에서도 대학교 시기를 이해할 때는 후기청소년기 관점을 적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게 느껴집니다. 이전에 한국 학생들의 대학교 경험에 관한 글(https://kongcha.net/?b=3&n=5975)에서 후기청소년기 관점에 대해 짚은 적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생겨난 친밀한 관계의 변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추천합니다.
2) '초기 양육자'라고 중립적으로 기술했지만, 초기 양육자들의 영향력이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영주·최해림(2001), 이윤영·전효정(2009)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3) 작년에 작성한 대상관계이론에 관련된 글(https://kongcha.net/?b=3&n=6369)도 애착 이론과 연결됩니다. 애착이론을 대상관계이론의 후신으로 파악해주시면 될 듯해요.
4) 서미경·정남운(2016)이 470명의 만 25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속된 안정애착은 43.6%, 획득된 안정애착은 8.9%, 현재의 불안정애착은 28.1%, 지속된 불안정애착은 19.4%로 나왔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애착 유형이 변화한 경우는 37.0%였지요. 제 본문에서는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기실 획득된 안정애착은 지속된 안정애착과는 또다른 내적작동모델을 지니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인용한 논문을 확인해주세요.
5) 몇몇 연구에서 '이성 관계'로 지칭합니다만, 이성애 중심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친밀하고(intimate) 낭만적인(romantic) 관계로 적습니다.
6) 낯선 상황 실험의 내용은 다음의 블로그를 참고해주세요(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eadup1&logNo=22063233418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7) 성격심리학의 big5(https://namu.wiki/w/Big5) 중 신경성 / 정서안정성 요인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8)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노출이 타인의 자기노출에 끼치는 영향, 속도 및 내용의 조절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어빙 고프먼의 『상호작용의례: 대면행동에 관한 에세이』을 추천합니다.
9) 이러한 정신화 능력은 무한정하지 않아요. 로빈 던바는 '자연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뇌가 관리할 수 있는 최대의 인간관계가 150이라는 가설을 제시한 적이 있지요. 또한 '나의 마음에 대한 너의 마음에 대한 나의 마음에 대한 제 3자의 마음'과 같은 정신화의 복잡성 또한 평균적인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고요. 관심 있으신 분은 로빈 던바, 「멸종하거나 진화하거나」를 추천합니다.
10) 기아트윈스님이 작성했던 감동(https://kongcha.net/?b=12&n=605)을 함께 읽으면 더 재미있으실 거예요.
11)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삶의 의미, 목적, 사명 등에 대한 추구와 공개적인 발언에 대해 [중2스럽다]라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요거는 인상비평일 뿐이지만, 일베를 중심으로 결집되고 전파되었던 태도에는 영성에 대한 혐오가 있지 않나 싶더라고요. 또한 영성을 공개적으로 쉬이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타인의 검증을 자극하여, 정보게임의 무한순환에 빠질 가능성을 높이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12) 구체적으로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과정을 통해 영성이 증진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읽었던 많은 연구들이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요. 하지만 최근의 흐름에서는 인간 뿐만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actant)들도 분석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려고 해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 싶은데, 아직까지 신유물론은 입문 단계라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13) 예전에 메아리님이 올려주셨던 '푸코의 자기배려와 철학상담' 연작을 안 읽어보신 분은 꼭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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