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8/03/05 18:09:25
Name   판다뫙난
Subject   다들 좀 더 즐거웠으면 좋겠다.
정말 삶 자체가 모질게도 힘든 친구들도 있겠고
주변의 기대, 비교 등에 의해 마음이 너무나 힘든 친구들도 있겠고.

불투명한 미래, 앞으로의 계획, 닿을 수 없는 저 곳,
가질 수 없는 너, 떠나가는 친구들, 마음 둘 곳 없는 서울 한 구석.

늙어가는 부모님, 약해져가는 몸뚱이, 스러져가는 자신감,
텅 빈 주머니, 채워지지 않는 허기.

낭만의 시절에는 희망이라는 묘한 놈이 옆에 있어서 그렇게 위안이 되었었나 싶다.
아니면 다들 배고프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그랬던 건지.
요즘처럼 전역 날짜가 적히지 않은 입대일을 바라보는 느낌은 아니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참, 저 멀리 지방 구석에 있는 회사에서 먹던 자판기 커피 하나만으로도 오롯이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그럴싸한 까페에서 그럴싸한 커피를 냠냠챱챱 먹는것 보다 만족감은 더 컸었던거 같아. 일하다가 잠시 10분정도 나갈 수 없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달달하고 커피향 없는 그 누런 인스턴트 커피 한잔이 오히려 더 마음에 닿았다.

과거라서 미화되고 추억이라서 그리운게 아니라, 그때는 정말 그랬다. 오히려 학교 처음 입학하고 군대가기 전까지의 학창생활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누구 하나 괴롭히는 것 없고 어느것 하나 잘못된 것이 없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편의점에서 내용물이 부실한 햄버거 하나를 까 먹는데도, 유명하다는 수제 햄버거집보다 더 두근거리고 기쁜 적이 많았다. 당연함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거 같다. 어느새 내 삶에 익숙함이 묻어나는 순간부터 즐거움보다는 걱정과 괴로움이 찾아왔다.

좋아하던 정치인이 생을 마감하기도 했고, 티비를 틀면 배가 누워 있었다. 슬픔 속에서 분노가 생겼고 분노는 어느새 또 마음에 퍼런 멍을 남겼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여전히 남아있던 지난날의 멍 옆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꾸역꾸역 흐르고, 새삼스럽게 3천9백원하는 편의점 도시락을 전자렌지에 넣고 2분을 맞출 때의 두근거림이 여전히 즐겁다. 어느 돌잔치의 유명한 호텔 부페에서 먹었던 질좋은 고기와 디저트들도 충분히 좋았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계란 2개를 잘 구워다가 도시락에 얹으니 행복하고 즐거웠다.

어느새 감정이 섞인 날선 댓글을 단 후, 데자와 한모금을 마시고 나니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게 대체 무엇이라고 나는 그렇게 칼날을 날려댔었나. 누가 내 등뒤를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달달함이 내 분노를 사그러뜨렸다. 학교에서 처음 마셨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시간들은 뭐 괴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또 즐겁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그렇다. 저 멀리 우주에서 보면 돌부리에 자빠져 코피를 흘리며 죽어도 보이기라도 할까. 기억이 남아있기라도 할까. 아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부터 며칠간 편의점 도시락이 50%나 카드 할인을 해준다.
엄청 기뻤다. 겉옷을 챙겨서 나가려다 잠시 앉은 이 순간이.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3-19 07:54)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1
  • 정말 오늘 들은말중에 가장 좋은말 같습니다.
  • 일상의 느낌이 많이 나서 좋아요
  • 뒤늦게 봤습니다. 따뜻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게시판에 등록된 판다뫙난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 기타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873 32
1417 기타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47 31
1416 기타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919 20
1415 기타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751 18
1414 기타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938 36
1413 기타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4 심해냉장고 24/10/20 1563 40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865 16
1411 기타『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949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226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80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21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54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1986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604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44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910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692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590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93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63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84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31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086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53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54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