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12/14 10:51:13
Name   세인트
File #1   오락X.jpg (37.4 KB), Download : 33
Subject   그래도 게임은 한다.


* 편의상 독백 형식이라 반말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미리 밝히며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I. 나는 게임에 재능이 있다.

어렸을 때, 부산에 처음 생긴 피시방 (이름이 슬기방으로 기억한다)에서 스타크래프트 하면서 동네 애들 사이에 좀 잘한다 소리를 넘어서
[저놈 도사네 도사] 소리도 들어 보았다. 나중에 연산동 근처에서 대회 한다고 할 때 참여했다가 왠 꼬꼬마에게 처참하게 발렸었지만, 나중에 그게 당시 학생이었던 박용욱 선수였다는 걸 알고 [거봐, 내가 못해서 그런게 아녀. 상대가 프로게이먼데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며 종종 스스로의 실력이 프로게이머와 자웅을 겨룰 정도였다고 나이 지긋한 조사꾼 아재들이 허풍 좀 섞어서 전성기 무용담을 말하듯 써먹기도 했다.

이후 군대 가기 전 대학 시절에는 디아2가 열풍이던 때에 아마존으로 남다른 파밍능력을 보여주며 (그 당시만 해도 아마존은 대세가 아니었다) [나님 좀 탁월한듯!!] 이라고 겜부심을 뿜뿜거리고 다녔고, 전역 후 라그나로크 시절에는 누구보다빠르게 남들과는다르게 카드와 몹템 (몹템이란, 당시 상점에서 판매하는 일반 아이템과 같은 성능이지만 몬스터가 드랍하는 아이템 중에는 여기에 슬롯이 뚫려 있어서 카드를 박으면 능력치가 대폭 올라가곤 했다. 당연히 일반템과 가격은 하늘과 땅 차이었다) 을 줍줍하며 빠른 성장으로 동아리 후배들에게 시기 어린 부러움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나의 겜부심이 절정에 달한 때는 와우 시절이었다. 물론 와우 하면서 [딜미터기를 압도적으로 뚫어서 애드온이 고장이 났다] 느니 [공대 최고의 힐러인 내 앞에서 죽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느니 심지어 [내가 한국의 쿤겐이 아니라 그가 유럽의 나인 것이다] 등등의 무용담 늘어놓기가 일상이 된 곳이 와우 였다지만, 나는 정말 당시 와우에 미쳤었고 부심은 절정에 달했다. 내가 흑마를 키우면서 '나 좀 하는 딜러인데' 하는 이들을 보면서 늘 이야기했던 게, [내 딜만 보는게 아니라 나는 보이스로 오더하고 상황보고 등등 다 체크하면서도 딜이 톱클라스야] 라고 하고 다녔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단순히 레이드만 잘한게 아니라, 아무도 안하는 신기한 퀘스트들도 다 찾고, 아무도 못 간다던 이상한 산도 등산해서 올라가서 맵도 밝히고, 업적이 나오기 전에 확고한 동맹 30개인가 40개 업적을 넘어서는 평판을 달성하곤 그걸 주변에 자랑하며 마치 그것이 내 실제 생활에서의 평판이 엄청나게 화려한 것 마냥 취해 있었다.

서버 최초로 리치 왕을 쓰러뜨린 그 날, 나는 서버 최초 업적이 줄줄이 달린 내 캐릭터를 미련없이 접기로 했다.
[부모님, 일리단만 잡고 효도하겠다는 약속도, 킬제덴을 잡고 효도하겠다는 약속도 못 지켰지만, 부자왕을 잡았으니 이제 저도 효도르 아니 효도란걸 해야 겠지요] 같은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며 말이다.

그리고 한동안 취업시도(라 써놓고 미칠듯한 낙방의 연속이라 읽는다) 에 집중하느라 정말 오래 게임을 접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정도 여유가 생기고 롤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섭이 열릴 거라는 이야기가 돌던 때였고, 예전 도타랑 카오스 하던 시절 생각으로 냉큼 시작했는데, 당시엔 꽤 잘했다. 사무실에 남자직원들 사이에 롤이 유행이 되었을 때, 나는 당시 기준으로 잘 크면 혼자 다 해먹는다던 잭스, 블라디미르, 문도 박사로 딜탱을 다 해먹으며 협곡의 폭군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리고 저 셋이 내가 스킨에 처음 지갑을 열게 해 준 녀석들이다)

이제는 어느새 40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아내가 내 카드로 지른 PS4로 아직 녹슬지 않은 나의 게임재능을 뽐낼 게 무엇이 있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사람들이 '역시 난이도는 소울 시리즈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다크 소울을 구매하려...다가 [이게 더 스타일리시하고 재밌습니다!] 라는 매장 아재의 추천에 꽂혀서 산 블러드본을 하면서 나의 겜부심은 다시 한 번 용틀임했다. 솔직히, 1회차때 루드비히 2트라이 만에 잡아버리고, 코스를 하루만에 잡아버렸을 때, 나는 확신했다. [아!! 나는 정말 재능충이었구나!! 내가 작정하고 게임을 했으면 페이커 장재호 이영호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터인데!! 하늘이시어!! 왜 저를 낳고 제갈량을 아 아니 금수저를 주지 않으셨나이까!!] 같은 개소리를 하며 잘났다고 잘났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무자비했다. 셀프 마스터베이션의 세계에 빠져있던 나의 속살에 현실은 정직하게 푹푹 박혔다.

그러니까, 진실을 밝히자면














II. 나는 게임에 재능이 X도 없었다.

사실 나라고 모든 게임을 잘 하는 건 아니었다. FPS게임은 레인보우 식스 시절부터 나는 자그마한 교전이라도 일어날라치면 허둥지둥 우왕좌왕 에임은 애꿎은 벽과 화분을 향하고 죽기 일쑤였고, 잘한다 잘한다 소리만 듣고 부심 뽐내다가 잘 안되니 흥미도 빠르게 잃었다. 그리고 나의 대처는 참으로 치졸했는데, 그건 바로 나는 내가 못한다는 걸 [잠깐씩 하면 곧잘 하던데, 문제는 제가 FPS는 멀미가 심합니다] 와 같은 이상한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FPS멀미가 있는 분들이 다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사실 나는 FPS 게임을 하면서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밤새 술을 처먹다가 술집들이 다 문을 닫아서 갔던 피시방에서 만취한 상태로 게임한 날 이외에는 멀미를 느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FPS 게임들의 인기는 서서히 오르고 있었고, 소위 말하는 'PC방 대세' 게임 신작들은 전부 FPS가 되었다. [FPS...붐은...온다...]던 한 노인의 절규처럼, 그렇게 어느날 내가 찾아간 PC방에는 전부 오버워치와 배틀그라운드를 하는 이들만 보였다.





어렸을 때, 박용욱 선수한테 졌던 건 동네 피시방대회 결승이 아니라 [1차전] 이었다. 내 저그 병력은 하이 템플러 같은 고테크 유닛이 단 하나도 섞이지 않은 온리 질럿-드라군 병력에 처참하고도 끔찍하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났었다.

디아 2는 원래 다니던 피방에 아는 형님들 중 한 분이 군대간다고 장비를 다 넘겨주었고, 다른 한 분은 허구헌날 오락만 하고 정신 좀 차리라며 부모님께서 찾아오셔서 멱살 잡혀 개처럼 끌려나가신 다음 나에게 장비를 다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라그나로크와 와우 둘 다 솔직히 그냥 시간이 X나게 많아서 그런 거였고 내 실력이 좋은 건 절대 아니었다. 솔직히 시간만 많으면 어지간히 못하지 않는 한 잘하게 되어 있는 거였고, 실력이 바로바로 드러난다는 전장과 투기장에선 상대방에게 나만큼 좋은 명점자판기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보이스를 하면서도 딜이 상위권인 건 맞았지만, 그건 내가 원체 주의가 산만하고 잡기에 능하기 때문이었지, 사실 보이스를 끄더라도 내 딜은 거기서 거기였다. 애초에 보이스를 꺼도 내 딜만 못보고 주변 보고 파티원 상태 보고 탱커 위치 보고 있었으니 그냥 힐러를 할 걸 그랬나보다. 아니 힐러를 했으면 한 데로 엉망이었을 것 같다. 메인탱커 힐 주라고 전담 시켜놨는데 다른 애들 체력 보고 힐 넣다가 탱커를 죽게 만들 힐러가 아마 나였을 것이다.

서버 최초로 리치 왕을 쓰러뜨린 그 날도 효도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 [뒤로 갈 수록 내 허접한 레이드 실력이 뽀록날 것 같아서 옹졸한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안해요. 40명일때도, 25명일때도 나보다 못한 구멍들이 있으니까 잘난 체 할 수 있었는데 이제 10인이 대세라니 이건 뭐 내가 공대 내 제일 X신이 되는 건 시간문제인데 이걸 개선할 의지도 실력도 없는데 인정하긴 싫어요.] 가 내 마음 속 진실한 소리였지만 나는 그 소리를 외면하고 말았다.

롤 또한 별다를 게 없는게, 그냥 남들보다 많이 일찍 해서 동네 코찔찔이들 사이에서 잘했던 것일 뿐, 정신차려보니 내 실력은 끔찍했다. 봇 원딜을 하는데 서포터급 CS가 나오고 (물론 딜도 서포터만큼 했을 것이다. 아니 딜포터보다 딜 못했을 것 같다). 탑탱커 한다고 해놓고 브루저보다 못한 몸빵에 아군보호따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빴다. 미드는... 일단 스킬을 맞출 수가 없으니 하지도 않았다. 그래놓고 '일이 너무 바빠서 진지하게 빡겜할 시간이 안되서 칼바람만 소소하게 즐긴다' 라고 변명해왔는데, 얼마 전에 피방가서 칼바람 하는데 무려 8연패를 했다. 이쯤되면 MMR상 뭔가 하자가 있는 상대가 걸릴 법도 한데, 상대의 하자보다 내 손과 눈, 무엇보다 내 두뇌의 하자가 훨씬 심각했던 듯 하다. 9번째 패배를 경험할 때는 내가 봐도 상대가 정말 못했으니까. (내가 더 못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부끄러워서 적을 수가 없다)

그나마 마지막 겜부심을 뽐낼 수 있던 블러드본도 회차가 거듭될 수록 운과 렙빨 노가다 덕분이라는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지방 장기 출장 가 있을 때, 밤에 할 거 없으니까 유튜브로 공략 영상 계~속 보면서 보스의 솜털 무빙까지 익힌 덕분일 뿐, 그렇게 영상 안 본 애들한테는 맨날 쳐발린다. 성배 던전에서 정말 절절하게 나의 무쓸모함을 느꼈으니까.

결국 나는 그냥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게임을 정말 X라게 못한다.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재능없음을 알았으면 덜했을 것인데, 재능있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쳐바른 것을 감안하면
정말 끔-찍할 정도로 못한다. 흑흑. 이 글을 쓰는 데 한참이 걸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한다. 눈가가 촉촉하다.




근데, 그래도 나는 계속 게임을 할 것 같다. 왜냐하면.













III. [X바 오락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하는거지!!]

가장 실력이 상관없다는 완벽한 이스포츠, 하스스톤을 하며
반샤라즈 덱을 하는데 47판 연속 멀리건에 반즈가 안 나오는 걸 겪고
직업당 골고루 평균 200킬이 넘어가도록 코볼트의 지하미궁 깬 직업이 둘 뿐이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게임을 한다.
나같은 호구들도 있어야, 누군가는 안정적인 승리의 기쁨을 맛볼 것이고, 자신감을 얻을 것이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셀프 합리화 좀 해보겠다.


[옛날옛적 오락실에서도 50원 넣고 끝판까지 가는 애들은 오락실 주인이 안 좋아했어. 우리같은 애들이 이 바닥 먹여살리는 거지. 내가 한달 내내 하스스톤하고 15급을 못 달고, 시즌 내내 롤을 해도 브론즈를 못 벗어나도, 엘윈 숲에서 들창코한테 비참하게 죽어도, 나같은 유저들이 훨씬 많아. 힘내자 하수 동지들아!!]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2-26 08:17)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1
  • 춫천
  • 보이스는 온오프를 가리지 않고 늘 켜두고 계신 분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53 기타짧은 유치원 이야기 13 CONTAXS2 17/11/28 7030 7
554 일상/생각삶의 무게... 12 사나남편 17/11/29 5439 22
555 일상/생각SPC 직접고용 상황을 보며 드는생각.. 20 二ッキョウ니쿄 17/12/01 6944 15
556 일상/생각나도 결국 이기적인 인간 2 쉬군 17/12/02 6122 13
557 정치/사회온라인 공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상) 84 호라타래 17/12/06 7829 39
558 IT/컴퓨터'옵션 열기'의 정체 16 Toby 17/12/07 11775 37
559 의료/건강제목은 못 정하겠음 32 mmOmm 17/12/07 7220 23
560 일상/생각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눈 9 다시갑시다 17/12/08 7366 20
561 음악[번외] Jazz For Christmas Time - 국내 스트리밍 사이트를 중심으로 (3) 4 Erzenico 17/12/11 7016 3
562 게임그래도 게임은 한다. 25 세인트 17/12/14 8626 21
563 체육/스포츠필승법과 그그컨 사이(브금 주의) 17 구밀복검 17/12/20 8592 15
564 일상/생각이상하게도 슬리퍼를 살 수가 없다 21 소라게 17/12/21 7425 22
565 일상/생각20~30대에게 - 나이 40이 되면 느끼는 감정 25 망고스틴나무 17/12/24 9358 41
566 의료/건강완벽한 보건의료제도는 없다 ('완벽한 보건의료제도를 찾아서'를 읽고) 18 Erzenico 17/12/26 7215 24
567 일상/생각할머니가 돌아가셨다. 8 SCV 17/12/28 6808 27
568 IT/컴퓨터아마존이 만든 사고를 역이용한 버거킹의 혁신적인 광고 7 Leeka 17/12/29 9372 19
569 의료/건강타 커뮤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홍차넷 탐라를 찾는 이유 31 소맥술사 18/01/03 8023 16
570 IT/컴퓨터정보 기술의 발달이 지식 근로자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추억 11 기쁨평안 18/01/03 9695 23
571 일상/생각고3담임이 느낀 올해 입시 20 당당 18/01/04 7719 26
572 역사무굴제국의 기원 26 기아트윈스 18/01/06 6390 24
573 체육/스포츠잉글랜드 축구는 왜 자꾸 뻥뻥 차댈까요. 35 기아트윈스 18/01/07 8263 10
574 문학내 것이 아닌 것에 낄낄대며 울기. 메도루마 슌, 물방울 4 quip 18/01/08 6445 8
575 역사작전과 작전 사이 (1) - 이대도강 1 호타루 18/01/09 6347 12
576 경제원전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24 소맥술사 18/01/10 8368 18
577 음악자장가의 공포 81 문학소녀 18/01/15 10063 65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