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11/18 23:22:42
Name   알료사
File #1   2017_11_18_20_34_24.jpg (177.9 KB), Download : 33
File #2   2017_11_18_21_34_06.jpg (189.1 KB), Download : 32
Subject   남자. 꿈. 노오력.




만화책 이야기입니다.

'건방진 천사' 라는 만화가 있어요.

니시모리 히로유키가 '오늘부터 우리는'을 완결시킨 이후에 그린 후속편이라 할까요.

나름 꽤 유명한 만화라 제가 이제와서 이걸 소개한다고 하기는 뭣하고

이 만화를 보는 저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저는 이 만화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처럼 똑같이 생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저같은 사람을 만난적이 없어서 제 생각이 독특한 것인가 싶어서요.

당연히 스포 있습니다. 출간된지 20년 가까이 되는 만화라 별 상관 없다고 여겨지지만 아무튼..


.
.
.


9살 소년 메구미는 피아노레슨을 빼먹고 소꿉친구 미키와 거리를 노다니다가 마법사 행색을 한 아저씨가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구해줍니다.

아저씨는 보답이라며 마법 책 같은 것을 주는데 아이들과 싸우며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 책에 묻자 책 속에서 삐에로가 나와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메구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사람,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삐에로는 무슨 심술에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실수였는지, 메구미를 <가장 여자다운 여자>로 만들어버립니다.

메구미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경악하는 미키, 미키의 반응을 보고 자신이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된 메구미는 걱정에 가득차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에게 이실직고를 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어머니는 넌 원래 여자였는데 무슨 소리냐고 그러네요.. 어머니뿐만 아니라 메구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메구미는 여자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진 같은것도 모두 여자로 바뀌어져 있고, 삐에로 사건을 아는 사람은 단 한사람, 곁에 있었던 소꿉친구 미키 뿐입니다.

그렇게 여자인채로 성장해 고등학생이 된 메구미. 초등학생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여성적 매력이 흘러 넘치고 있지만 <가장 남자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학교 내외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남자들의 싸움에 끼어들고 그 과정에서 지역 제일의 깡패 겐조를 알게 됩니다.

겐조는 당연하게도 메구미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겐조 이외에도 후지키(가장 평범한 남자) 야스다(오타쿠) 코바야시(무도인) 모두 네 명의 남학생이 메구미와 친해지고 싶어 그녀의 주변을 멤돕니다.

메구미는 이미 전교생의 여신입니다. 남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메구미의 아름다움은 동경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인기와 위상이 높아질수록 <가장 남자다운 사람>을 꿈꾸는 메구미의 좌절은 깊어갑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 미키마저 그냥 여자답게 살아가라고 부추깁니다. 일부러 말투를 거칠게도 해보고 폭력적 성향도 내보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남자다움의 본질이 아닌 것은 메구미 자신도 알았구요.

하지만 상황이 악화될수록 메구미의 남자를 향한 열망은 더욱 커져 갑니다. 메구미에게 대시하는 수많은 남자들은 <남자라는 것이 고작 이런 존재였단 말인가,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 겨우 이거였다고?> 라고 실망감만 안겨 주는 동시에 <이 세상에 남자다운 남자가 없다면, 더더욱 나 자신이 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는 각오를 다지게 합니다.

포기를 모르고 자신을 쫓아다니는 겐조,후지키,야스다,코바야시에게 메구미는 드디어 자신이 남자임을 밝힙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죠. 마법 책을 받아서 삐에로가 나타나 자신을 여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누가 믿겠습니까. 하지만 메구미가 너무나 절박하게 믿어 달라고 하소연하는데다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네명의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 문제를 어떤 의미로든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구미의 주장을 허튼소리로 치부한다면 그녀에게 다가갈 길은 아주 막혀버리기 때문이었지요.

메구미를 좋아하는 네명의 남자들에게는 메구미가 원래 남자였느냐의 문제와 함께, 메구미가 꿈꾸는 이상적인 남자상에 자신들이 얼마나 부합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당면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들 중 누구 하나가 <가장 남자다운 남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메구미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면서 잘하면 메구미로 하여금 자신이 여자란 사실을 인정케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까지 품게 되지요.

그리하여 메구미와 네명의 남자들은 <사나이도>측정을 통해 <누가 먼저 남자 중의 남자가 되는지>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메구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아직은 소년?인 그녀에게 승부를 겨룬다는 요소가 흥미롭기도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남자들이 너무 한심해 보였기 때문에 자신의 압도적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였지요.

이렇게 시작된 남자답기 경쟁 - 학원 최고의 미소녀와 그녀를 추종하는 네명의 성별만 남자인 학생들간의 -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과연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작가 자신의 주관적이고 불완전한 대답이긴 하지만 대체로 <남자다움>이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이런저런 미덕들을 고루 아우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듯 합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 경쟁에서 가장 앞서가는 인물은 메구미이면서도, 메구미의 육체와 외모가 여자이기 때문에 얼마나 불리를 입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메구미의 발목을 잡는게 여자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여자에 대한 우대라는 겁니다. 메구미가 가장 힘들어하고 흔들리는 시기는 <예쁜 여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편리하고 달콤한가를 느끼고 그런 삶에 안주하고픈 유혹을 느낄 때였거든요.

메구미 일행의 남자다움을 시험하는 에피소드들은 점점 과격하고 극단적인 폭력적 상황으로 치닫고 극적인 반전과 함께 막을 내립니다.

그 마지막 반전은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었고 과연 니시모리 히로유키 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어요.

메구미 일행은 어떤 거대 조직이라 할만한 집단과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그 싸움에서 메구미의 친구들은 하나 둘 쓰러져 갑니다. 그 마지막에서 메구미와 겐조는 무너지는 건물을 탈출하다가 겐조가 콘크리트 덩이에 깔리게 돼요. 메구미는 그 콘크리트를 치워내려고 끙끙대면서 자신의 육체를 원망합니다. 아, 내가 남자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젠장 !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 그러다가, 자신을 구하려고 희생한 다른 남자들을 떠올려요. 그때까지 그렇게도 무시했던, 성별만 남자인 남자 같지도 않았던 남자들. 그리고 알게 돼요. 그들이 남자다웠던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그들의 성별이 남자여서가 아니라 그들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용기가 있어서였다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꿈꾸던 진정한 남자의 조건이라면 지금 자신에게 힘이 있고 없고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뭐 그렇게 콘크리트 밑에서 겐조를 구해내고 메구미는 기절합니다. 만화니까 가능한 일이었겠죠. 겐조는 나중에 메구미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메구미에게 <남자답기>대결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합니다. 그제서야 겐조의 마음이 전달이 되었는지 메구미는 겐조에게 입맞추고 삐에로의 마법이 풀리게 됩니다.

.
.
.


자, 마법이 풀렸습니다.

메구미는 남자로 돌아갔을까요?

메구미의 과거 기억이 재생되면서 진실이 밝혀집니다.

메구미는 원래 여자였어요.

메구미가 미키와 함께 피아노레슨을 땡땡이치던 그날,

미키가 성인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욕보이게 될 위기에 처하고, 메구미는 미키를 구하려 했지만 이때 당시에는 모르는 소년이었던 겐조가 끼어들어 크게 다치면서 미키를 구해냅니다.

겐조는 자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인 너희들을 지킨 것이라 말하고,

여자라서 미키를 구하지 못한 것이, 그리고 여자라서 보호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하고 원통했던 메구미는 삐에로가 나타났을 때 울면서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남자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삐에로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메구미의 성별을 바꾼게 아니라 메구미의 믿음을 바꿨어요.

그냥 우연히 남자로 태어난 것이 남자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남자라고 믿고 남자다움에 대한 이상을 설정하고 절대 불가능한(아무튼 육체는 여자니까) 그 꿈에 대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거죠. 그 노력은 현실의 변화를 보답으로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노력이 그 사람 자체를 증명해 줄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준 중요한 한가지, 그런 메구미의 바람이 허상이 아니라고 미키가 믿도록 만들어준것.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런 자신을 지지해주는 친구 한 명.

꿈을 꾼다는 것은 반드시 현실을 바꿔야만 가능하것이 아니고 자신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그렇게 받아들인 자신만의 세계에서 어떤 행동과 말을 취하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의 문제라고, 만화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20대 초반에 저는 그 이야기에 동의하여 지금까지 그러한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1-27 08:23)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2
  • 춫천
  • 알료사님의 믿음에 건배!
  • 멋진 요약글입니다
  • 노력이 자신을 증명한다고 사람들이 진짜 그렇게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능성 없는,혹은 적은 노력에 보내는 냉소가 줄어들 수 있게요.
  • 정말 멋지네요
  • 명작이죠
  • 추천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 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922 32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78 31
1416 철학/종교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950 20
1415 정치/사회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788 18
1414 일상/생각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955 36
1413 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5 + 심해냉장고 24/10/20 1592 41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890 16
1411 문학『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969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248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98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43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74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2009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626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66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934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711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610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817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86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98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50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108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73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75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