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07/14 13:50:23
Name   tannenbaum
File #1   고시낭인이라욕하지마라.jpg (245.3 KB), Download : 76
Subject   고시낭인이라 욕하지마라.


95년말이었습니다. 병장을 달고 제대가 10개월 남았을 때.... 제 머리속은 복잡해졌습니다. 복학을 하고 학점 맞춰 대기업 들어가는 게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문에서 우연히 변호사로 일하면서 회계사에 합격한 분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이거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쁜 변호사일을 하면서도 합격한다는 건 시간 여유가 많은 나에게도 승산이 있다 생각이 들었죠.

머릿속에서는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집에서 아버지와 불화로 독립한 상태였기에 부모님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입대전 모아둔 돈, 시험 준비기간동안 생활비, 학원비, 책값 등등..... 그래 이정도면 최소 1년 반은 버틸 수 있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약간의 여유자금을 만들기 위해 제대한 뒤 몇달간 다시 알바를 하며 틈틈히 시험과목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될 즈음 저는 알바를 그만두고 홍대 앞 모 회계사종합학원에 수강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요즘도 비슷하겠지만 방학기간 중 회계사 시험 과목들 전부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죠. 그때 돈으로 한달 48만원...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거기에 3끼 제공되는 고시원비 32만원. 모아논 돈은 한정적이었기에 제겐 시간이 얼마 없었고 그런 조급함은 스스로 극한까지 몰아치게 되었습니다. 수강하는 10주 동안 4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었습니다. 담배피는 시간도 아까워 담배도 끊고, 화장실에 자주갈까 물도 줄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전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아 들고 미친듯이 뛰어다녔습니다. 꽤 괜찮은 점수를 받았거든요.

그렇게 겨울은 끝났고 저는 복학을 했습니다. 모든 과목은 시험 해당 과목으로 선택했습니다. 학원에서 다 배웠던 내용들의 반복이라 학점관리와 복습 두가지 목적이었죠. 새벽별보고 도서관에 갔다 열람실직원과 같이 퇴근하는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차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날... 의외로 담담하더군요. 현실이 아닌 느낌이랄까요. 수험장을 나오며 느낌이 좋았습니다. 역시나...그 느낌대로 1차시험에 통과했습니다. 동차합격을 노리고 그날로 2차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새벽별 보는 몇달이 더 지나고... 2차 시험을 치뤘지만... 떨어졌습니다.

주위에서는 재수는 원래 기본옵션이고 준비한지 반년만에 1차 붙은것도 대단하다며 응원을 해주었습니다. 1년간은 1차시험 유예가 되기에 1년이면 해볼만하다 이유없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내년에 두고보자... 다 죽여버린다... 이를 갈며 다시 수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역시 합격자 200명 중에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선배, 후배, 동기들의 이름은 있었지만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공부하던 사람들끼리 합격자 축하모임이 있다는 초대를 받고 은행으로 갔습니다. 통장정리를 하고 잔고를 확인했습니다. 63만원... 세달치 생활비... 은행을 나와 공중전화로 가 아버지에게 거의 반년만에 전화를 했습니다.

잘 지내시죠?(시험에 떨어졌어요)
그래 별일 없다 너도 어디 아픈데는 없냐?
네. 잘지내고 있습니다.(오늘 많이 힘들어요)
그래.. 무슨일로 전화를 한게냐
전화드린지 오래 되서 안부전화 드렸어요(아버지..... 저 1년만 지원해주시면 안되나요...)
그래 알겠다. 종종 연락하고 잘 지내거라.
네. 알겠습니다. 건강하세요(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 한번 더 해보고 싶어요....)

그날 저녁 합격자 축하모임에서 시험 접는다 선언했습니다.

확실히 말이야. 사람은 자기 적성이 있나봐. 난 회계사가 잘 안맞는거 같아. 걍 취업해서 샐러리맨의 삶을 살아야겠어. 산업역군이 되는거지. 낄낄..
얌마. 한번 더 해보지 왜?
놉.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잘 살아. 내 능력이 이정도인거 확인했으니 됐어. 욕심 부리면 탈나.
그래도 야... 우리 중에 니가 제일 먼저 될 줄 알았는데... 모의고사 보면 니가 제일 좋았는데 아깝잖아.
그거 다 뽀록이야. 인자 하루 네시간 자는것도 지겹고 편안한 이지라이프가 내 천성인데 그동안 많이 참았다. 낄낄

그날 저녁 자취방에 돌아온 저는 한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네요. 상실감, 패배감, 합격한 애들 배아파서... 이런 이유는 아니었던것 같고... 그냥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났던것 같긴 합니다.

그 1년 반.... 아마.. 제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순간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저보다 더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모든 고시생분들 화이팅입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7-24 08:14)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6
  • 춫천
  • 인생글은 추천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92 철학/종교푸코의 자기 배려와 철학상담(1) 3 메아리 18/02/11 7733 10
353 요리/음식어떤 백작과 짝퉁 홍차 10 사슴도치 17/01/24 7731 16
776 일상/생각가난한 마음은 늘 가성비를 찾았다 18 멍청똑똑이 19/03/04 7729 46
630 문화/예술때늦은 리뷰 14 자일리톨 18/05/10 7727 18
472 일상/생각고시낭인이라 욕하지마라. 17 tannenbaum 17/07/14 7722 26
260 체육/스포츠국내 축구 이야기들 8 별비 16/09/02 7720 5
245 일상/생각아재의 대학생 시절 추억담들. 27 세인트 16/08/03 7713 5
881 기타낭만적 사랑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을까? 24 호라타래 19/10/29 7707 20
818 체육/스포츠심판 콜의 정확도와 스트라이크존 기계판정 4 손금불산입 19/06/15 7707 8
289 창작[한단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8 SCV 16/10/24 7697 11
705 기타퇴근하기전에 쓰는 나의 창업 실패기 7 HKboY 18/09/28 7695 16
740 일상/생각엑셀에 미쳤어요 24 Crimson 18/12/03 7685 27
455 일상/생각여사님을 소개합니다 (스압, 일기장류 징징글. 영양가X 뒤로가기 추천) 31 알료사 17/06/19 7681 20
801 문학고속도로로서의 템즈강: 18세기 템즈강 상류지역의 운항과 수송에 관한 연구 34 기아트윈스 19/05/11 7677 16
978 체육/스포츠깊게 말고 높게 - 축구력과 키의 관계 22 다시갑시다 20/07/03 7676 9
755 일상/생각노가대의 생존영어 이야기 25 CONTAXS2 19/01/06 7675 25
692 IT/컴퓨터Gmail 내용으로 구글캘린더 이벤트 자동생성하기 8 CIMPLE 18/09/06 7671 6
325 일상/생각지가 잘못해 놓고 왜 나한테 화를 내? 42 tannenbaum 16/12/18 7665 22
417 정치/사회군사법원은 왜 군의 입맛에 맞게 돌아가는가. 8 烏鳳 17/04/23 7661 17
911 경제파이어족이 선물해준 세가지 생각거리 6 MANAGYST 20/01/19 7660 10
1013 일상/생각나는 순혈 오리지날 코리안인가? 50 사이시옷 20/10/05 7647 24
539 일상/생각아주 작은 할아버지 20 소라게 17/11/03 7640 36
549 일상/생각그래도 지구는 돈다. 40 세인트 17/11/20 7637 46
620 일상/생각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26 탐닉 18/04/22 7635 25
131 정치/사회인용의 실패와 승리, 두 정치인의 경우 9 moira 15/12/15 7633 15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