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5/07/08 00:16:50
Name   ArcanumToss
Subject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모르겠다는 그대에게
pgr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봤습니다.

하고싶은걸 하라고? (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page=1&page_num=23&select_arrange=&desc=&sn=&ss=on&sc=on&keyword=&no=59650&category=&cmt=&bpw= )

이 글을 읽고 댓글을 하나 썼습니다.
쓰다 보니 평소에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해서 장문이 되어버렸네요.
홍차넷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이 있을것 같아 그곳에 단 댓글을 붙여넣어 봅니다.


*******************************************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입니다만 님의 '주장'에 전혀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님의 글 중 20대 시절의 저라면 100% 공감했을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하고싶은게 뭔지 모르고, 딱히 하고싶은게 없다는게 제일 큰 문제다.
하고싶은걸 하라고? 난 하고싶은게 없는데? 내가 좋아하는게 뭔지 모르겠는데? 라는 질문이 바로 튀어나오는게 지금의 청년들인데, 90년대에나 먹힐만한 하고싶은걸 하란다. 난 그게 딱히 없고 내가 하고싶은게 뭔지 모르겠는데?"

제가 경험해 온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테크트리 내에서도 역시 무엇 하나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을 할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에 그렇게 열광을 했었드랬죠.
님이 느끼는 그 취향의 부재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여건들, 그리고 20대의 제가 느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길들여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서도 님의 20대와 제 20대가 딱히 변한 것이 없다는 결론이 옳을 듯 합니다.
저와 제 친구들 역시 다들 님과 정확히 똑같은 고민을 하며 지냈던 것을 봐서는 이 결론은 거의 확실하다고 보고요.
그리고 당시에도 청년 멘토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님이 그러하듯 우리 역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기계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취업을 하게 되면 그게 자신 앞에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뿐이었고 그러다 맘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연애를 하고 결혼을 생각하지만 돈이 없어 결혼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혼 시기를 놓쳐 30대 후반에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님이 하는 그러한 방황은 우리나라에서 수평적으로도 수직적으로도 결코 특이한 경험이 아니라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청년 멘토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해왔던 고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어차피 죽을텐데 사람은 왜 사는가? (유치원 시절의 고민)
-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중학생 시절의 고민)
- 왜 사는지 모르는데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사는지 모르는 고통이 이렇게까지 심한데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고등학생, 대학생 시절의 고민)
- 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사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을텐데... (대학 졸업 후의 고민)
-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면 행복할까?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대학 졸업 후의 고민)

그리고 이 고민들에 대한 답을 간신히 찾은 듯한 시기가 20대 후반이었고 고민을 말끔히 해소한 때가 30대 후반이었습니다.
지금은 영적, 정신적, 경제적 방황기를 충실하고 치열하게 거쳤기에 이 모든 물음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최소한 제 자신에게는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제가 20대의 제 자신에게 충고를 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무엇을 하려 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되어라.
자기 자신이 되는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을 하고 감히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신의 기쁨을 방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라.
그러한 삶에 깨달음이 있고 구원이 있다."

문제는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슴이 뛰는지 모른다는 것인데 이것은 님의 말대로 충분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경험을 할 때 가슴이 뛰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슴이 뛰는지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누구나...
책을 읽을 때,
혹은 영화를 볼 때, 
혹은 음악을 들을 때, 
혹은 아이의 미소를 볼 때, 
혹은 그녀의 사랑스런 귀밑 머리를 볼 때, 
혹은 햇살이 눈부신 하늘을 볼 때, 
혹은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느낄 때, 
혹은 총탄에 쓰러져 가는 누군가의 눈을 볼 때, 
혹은 테러를 당해 죽은 부모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울부짓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 
혹은 아동 성범죄자 뉴스를 볼 때, 
혹은 생활고로 동반자살하는 가족의 소식을 들을 때, 
혹은 해수면 상승에 대한 신문 기사를 접할 때 등등
삶의 순간 순간에서 그것들과 공명을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의 떨림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힌트이고 그 힌트를 그 어떤 보물보다도 소중하게 차곡차곡 간직해 둔다면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서서히 알아가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일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음이 급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커다란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공을 들여야 할 정도로 굉장히 큰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20대 때에는 삶의 의미를 몰라 미칠 것 같았고 죽고 싶었습니다.
어서 빨리 진리를 알고 싶었고 고통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어렴풋이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게로 가는 길의 일부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금 돌아 보면 그 느낌이 맞았고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고 느낍니다.
아마 님에게 누군가 "지금 당신이 겪는 그 모든 과정이 구도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개할 것 같긴 하지만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 체험이 그러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다시 분명히 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님이 "내가 하고싶은게 뭔지 모르겠는데?"라며 느끼는 그 분노는... 아니 그 분노를 해결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님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누구도 해 줄 수가 없는 일이며 온전히 자신의 과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는 교육 체계를 이미 구성해 놓았다면 좋았겠지만 인류의 '삶에 대한 인식의 깊이'는 불행하게도 그렇게 깊지 않습니다.
님이 느끼는 그러한 불만은 결국 인간의 인간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깊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얼마 전에야 간신히 천부인권을 천명했고
얼마 전에야 간신히 평등을 인간의 삶의 기저에 놓았고
얼마 전에야 간신히 평화의 길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얼마 전에서부터야 우리 중 일부가 간신히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불과 얼마 전에서부터야 간신히 더 고귀한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을 구성하는 일은 제가 해야할 일이자 님이 해야 할 일이고 우리의 후대가 계속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과거 세대는 생존의 세대였고 우리는 생활의 세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이후의 세대가 다시 생존의 세대가 될지 아니면 삶이라는 자기실현의 유희를 온전히 누리는 세대가 될지는 저와 님의 손에 달린 셈이죠.
그러니 지금의 그 불만은 잠시 내려 놓으시고, 다른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잠시 접어 두시고 그저 님을 알아가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ps.
진정한 삶은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가슴뛰는 삶을 살고 마음껏 사랑하며 기쁨이 이끄는 삶을 누리라.
그것이 삶의 목적이며 깨달음이고 구원이다.

20년 뒤,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 때문에 더 실망할 것이다.
그러니 밧줄을 풀고 안전한 항구를 떠나라.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 Tob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7-14 00:5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
    이 게시판에 등록된 ArcanumToss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45 정치/사회한국 철도의 진정한 부흥기가 오는가 31 카르스 23/12/16 2065 7
    1233 정치/사회한국 인구구조의 아이러니 21 카르스 22/09/01 5446 57
    1165 정치/사회한국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의 역설 - 행복해졌는데 자살, 자해가 증가? 7 카르스 22/02/03 3501 8
    1239 정치/사회한국 수도권-지방격차의 의외의 면모들 45 카르스 22/09/20 5150 22
    591 철학/종교한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종말. 9 quip 18/02/11 7621 18
    1098 기타한국 만화의 이름으로. 고우영 수호지. 15 joel 21/06/15 4799 24
    1117 게임한국 게임방송사의 흥망성쇠. 첫 번째. 7 joel 21/08/15 3370 7
    1315 정치/사회한국 가사노동 분담 문제의 특수성? - 독박가사/육아 레토릭을 넘어서 24 카르스 23/08/01 2402 15
    743 정치/사회한 전직 논술강사의 숙대 총학의 선언문 감상 40 烏鳳 18/12/11 6877 35
    9 문화/예술한 잔의 완벽한 홍차를 만드는 방법 17 15/06/04 11313 0
    984 일상/생각한 가족의 고집, 그리고 나의 고집에 대한 고백 자몽에이드 20/07/14 3733 9
    1166 꿀팁/강좌학습과 뇌: 스스로를 위해 공부합시다 11 소요 22/02/06 5281 37
    1312 정치/사회학생들 고소고발이 두려워서, 영국 교사들은 노조에 가입했다 3 카르스 23/07/21 2457 20
    521 일상/생각학력 밝히기와 티어 33 알료사 17/10/01 7975 40
    892 일상/생각하루 삼십 분 지각의 효과 14 소고 19/11/26 6066 25
    262 일상/생각하나님 한 번만 더 할아버지와 대화하게 해주세요. 7 Terminus Vagus 16/09/09 4832 10
    41 기타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모르겠다는 그대에게 32 ArcanumToss 15/07/08 18171 3
    563 체육/스포츠필승법과 그그컨 사이(브금 주의) 17 구밀복검 17/12/20 7967 15
    161 정치/사회필리버스터와 총선, 그리고 대중운동. 11 nickyo 16/02/24 5351 13
    473 기타필름포장지 이야기 24 헬리제의우울 17/07/14 13673 3
    621 정치/사회픽션은 사회를 어떻게 이끄는가 (1) 13 Danial Plainview 18/04/22 5525 15
    584 문화/예술프사 그려드립니다. 72 1일3똥 18/01/28 8012 24
    778 역사프랑스혁명과 아이티(Haiti) 독립혁명 이야기 6 droysen 19/03/13 5052 15
    128 정치/사회프랑스 극우당의 승리에 대한 논평에 대한 이야기 15 nickyo 15/12/12 5762 5
    995 일상/생각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16 ikuk 20/08/12 4404 30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