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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2/04 23:19:02
Name   moira
Subject   인간의 일
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  (Heautontimorumenos,  1.1 25)

"나는 인간이다. 인간의 일로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I am a human; nothing human is alien to me.

몽테뉴의 집 천장에도 적혀 있었다는 이 멋있는 라틴어 경구는 다른 나라, 다른 인종, 다른 계급과 다른 문화를 넘어 '인간이라면 어찌 이를 보고 외면하랴'는 의미로 보편적 휴머니즘을 호출할 때 서구인들이 즐겨 사용해온 문장이에요. 사회운동가와 국제연대 지지자들은 아직 이 경구를 연대와 참여를 호소하는 슬로건에 종종 사용하고 있는 듯해요. 하지만 옛날 고사성어를 읊어대는 건 아무래도 좀 꼰대 같은 느낌을 주니까... 주의해서 써야죠.

제가 최근에 이 경구를 접한 건 '세계시민사상이라는 신화'라는 칼럼이었어요. 옆동네에 이 칼럼을 번역해 주신 친절한 분이 계시더군요. 로스 다우닷이라는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의 글인데, 이걸 보고 대통령 트럼프를 탄생시키는 데 공헌한 미국의 우파 저널리즘이 어떤 논법을 구사하는지 약간은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띈 것은 하버드 최우수 졸업자라는 다우닷이 위의 경구를 인용하는 맥락이 좀 이상했던 거였어요.

[Genuine cosmopolitanism is a rare thing. It requires comfort with real difference, with forms of life that are truly exotic relative to one’s own. It takes its cue from a Roman playwright’s line that “nothing human is alien to me,” and goes outward ready to be transformed by what it finds.]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69417&sn1=on&divpage=14&sn=on&keyword=OrBef

옆동네 번역도 아주 잘 읽히지만 의역이 많아서 약간만 수정할게요. "진정한 의미의 세계시민사상은 사실 구현하기 매우 힘든 것이다. 진정한 세계시민주의자라면 자신이 자란 문화권의 시각에서 볼 때 너무나도 다른 것들, 너무나도 이국적으로 보이는 삶의 방식들에 불편함을 느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세계시민주의자라면 어느 로마 극작가가 썼던 "인간의 일로 내게 alien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사를 신조로 삼고, 바깥 세계로 나아가매 그때그때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서 다우닷은 오늘날 서구의 '세계시민주의자'들은 그렇게 훌륭한 자들이 아니라 끼리끼리 모여서 외국 유람이나 하고 편하게 사는 위선적인 엘리트들이다... 라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아요.

"nothing human is alien to me"를 다우닷이 해석하는 방식은 많이 독특해요. 여기서 alien은 라틴어 alienum의 어원을 그대로 살려 영어로 번역하는 전통 속에서 굳어진 표현이에요. 우리도 예전엔 한문을 번역할 때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발음만 가져다가 전사하곤 했잖아요. 이 경구를 쓸 땐 문자로는 alien을 쓰더라도 새길 때는 현대 영어 alien의 '생경하다, 이상하다'라는 뜻으로 쓰면 안 되고, '무관한 것'으로 쓰는 게 정석이에요. 다우닷의 칼럼 맥락을 보면 이 문장은 "인간의 일로 내게 이상한/생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과 수용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이건 초마이너한 해석이에요. 좀 더 나가면 틀렸다고 과감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어째서 틀렸는가... 이 문장이 발견된 역사상 첫 출처로 거슬러올라가면 좀 재미있는 걸 발견할 수 있어요. 이 구절은 기원전 2세기의 로마 극작가 테렌티우스의 <자학하는 인간들>이란 세태극에 나오는데요. 아테네 근교의 시골 마을에 크레메스라는 지주와 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옆집에 새로 이웃이 이사를 와요. 이이는 아테네에서 대도시 생활을 하다 귀농한 메네데무스라는 사람이에요. 첫 막 첫 장면에서 크레메스는 이웃을 찾아가 벌써 친구가 된 것처럼 귀찮게 굴면서 장광설을 늘어놓아요. '야 우리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친하게 지낼 운명 같다. 너 나이는 60살쯤 됐냐? 너 땅도 좋은 거 샀고 노예도 많고 괜찮은 집안인 거 같은데... 근데 보니까 너 맨날 밭에 나와 있더라. 농사일은 노예들을 시켜야지 니가 왜 직접 하니, 그러면 농장운영 효율도 낮다 너...' 등등.

메네데무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해요. "너 그렇게 할 일이 없니. 너하고 상관없는 일인데 신경 좀 꺼주지?"

여기서 크레메스가 문제의 그 대사를 쳐요. "나는 인간이잖아. 인간의 일로서 나와 무관한 건 아무것도 없거든."

즉 이 오래되고 멋있는 모토의 원래 의미는 꼴사나운 오지라퍼가 자신의 무리한 오지랖을 합리화하는 억지였던 거예요. 네가 뭐래도 나는 네 일에 참견하겠다! 일이 (내가 보기에) 제대로 안 되어가고 있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지요. '내가 인식하기에 이상한 것은 없다'가 아니라 '내가 실천적으로 관여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뜻. 오늘날 원작의 풍자적 의미는 거의 잊혀지고 고상한 휴머니즘적 의미만 남았지만, 사회운동가들은 원전의 맥락을 나름대로 이어가 일종의 발전된 자발적 오지라퍼/프로불편러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해요.

다우닷이 칼럼에 이 경구를 끌어올 때는 '너 자신이 니가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는데 어떻게 진정한 세계시민주의자-리버럴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비난의 맥락에 사용하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메이저한 해석에 따라 이 경구를 적용하자면 세계시민주의자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외부를 변화시키는 사람, 세계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네요. 즉 다우닷이 싫어하는 바로 그자들의 행태가 되는 거죠. 미국의 세계시민주의자(제국의 전도사)들과 부족주의자(고립주의자)들 가운데 어느 쪽이 이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공헌하고 있는가, 그것은 또다른 논의의 주제가 되겠지요.


꿀팁/강좌글로 업적 달성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되었어요. 어느 세월에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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