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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0/06 15:32:31
Name   눈시
Subject   러일전쟁 - 상제는 황제를 도우소서

대한제국 애국가입니다. 상제야 뭐 옥황상제 같은 느낌, 지금 애국가의 하느님이죠.

https://namu.wiki/w/%EB%8C%80%ED%95%9C%EC%A0%9C%EA%B5%AD%20%EC%95%A0%EA%B5%AD%EA%B0%80#toc
가사는 여기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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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개혁은 고종이 의욕적으로 밀어붙이긴 했는데 영 아니었다...로 평가됩니다.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고종은 재정을 관리하는 탁지부 대신 자신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을 가지고 밀어붙입니다. 기껏 정부와 황실을 분리했는데, 정부가 허수아비가 된 거죠. 내탕금을 채운다고 매관매직도 했고, 개혁은 고종 자신과 소수의 측근을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부정부패가 뒤따를수밖에요. 고종을 비롯한 소수의 측근에게 근대화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기대하기도 어려웠구요. 유림은 개혁에 도움이 안 됐고, 개화파는 다사나다난했던 일들을 지나면서 죽거나 고종이 적대했죠. 이러니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는데 능력도 안 되고 돈도 없고 하는 식이 됩니다.


고종의 측근으로 경제에 관련된 개혁(및 돈 모으기)을 주도한 이용익. 그 과정에서 있었던 부패 등의 문제로 독립협회에 탄핵당하기도 합니다.

개혁 자체가 근대적이긴 했습니다. 양전지계사업을 통한 근대적인 토지제도를 도입하려 했고 화폐개혁과 은행설립을 시도했죠. 군대도 예산의 40%를 들여서 근대 무기를 잔뜩 사들이고 군함까지 사들였구요. 하지만 그 한계는 너무도 컸죠. 양전지계사업의 근대성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결되기에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모양이구요. 어쨌든 실시한 지역도 적었고, 무리하게 국유지로 편입하려다 백성들의 반발을 얻기도 했습니다. 화폐개혁도 제대로 못 돼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구요. 이것들은 후에 일본이 토지조사사업과 화폐정리사업을 하는 데에 좋은 명분을 줬구요. 무기를 잔뜩 사들였지만 통일성이 없었고, 군함은 말만 군함이지 그냥 무장 상선을 바가지 쓴 거였습니다.

이런 정책들이 고종의 한계였던 건 확실하죠. 그걸 무능으로 보느냐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라고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갈리구요. 어차피 일본에게 망한다는 엔딩이 정해진 상황에서 이걸 정확히 판단할 순 없을 겁니다.

열강에게 이권을 뜯기는 부분도 그렇죠.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해서 괜히 외우기 짜증나는 부분을 만든... 건 넘어가더라도요. 각종 광산 채굴권과 벌목권 등이 헐값에 열강에 넘어갑니다. 최혜국 대우 때문에 한 나라에 주면 다른 나라에도 줘야 됐고, 참 골고루 여기저기 뜯어갔죠. 이것도 고종의 의도로 보기도 합니다. 열강 모두가 한국에 이익을 가져야 어느 한 나라가 독점하려는 걸 막을 거라는 거죠. 실제로 국가뿐 아니라 각 외교관들에게도 이권을 잔뜩 줘서 한국을 포기하기 아깝게 만들었구요.

+) 전에 얘기했던 러시아의 베베르가 성공케이스로 볼 수 있겠죠. 미국의 알렌도 로또 맞은 것처럼 기뻐하면서 중립국화로 이권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구요. 러일전쟁 전후로 바뀌지만

어차피 돈을 아무리 모아도 어려웠을테고, 외교로 나라를 지키려 한 이상 이게 최선이었다 vs 그래도 너무 퍼주고 뜯겼다, 개혁할 돈, 백성 살리고 나라 살릴 돈을 다 뜯긴 거다... 뭐 이런 게 쟁점사항이 되는 거죠.

측근들 외에도 고종의 개혁 파트너가 없진 않았습니다. 죽기도 하고 척지기도 했지만 개화파는 여전히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개혁에 도움을 주지 못 합니다. 오히려 다시 고종의 적이 됐죠.


서재필은 갑신정변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갑니다. 어차피 역적이 돼서 집안도 망한 상황, 아예 시민권을 얻고 눌러앉게 되죠. 그러다 사면돼 박영효가 내각에 있을 때 불렀고, 미국인 신분으로 귀국합니다. 미국명 필립 제이슨, 이걸 다시 음차해 피재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죠.


개화파가 뭉칩니다. 이번엔 방향이 조금 달랐죠. 1896년 독립신문을 만들었고, 이어 독립협회를 만듭니다. 목표는 백성들의 계몽과 참여였죠. 만민공동회가 시작되었고, 다음 해에는 이들의 목표였던 독립문이 세워집니다.

서재필은 미국인인만큼 형식상 고문으로 뒤에서 지원하는 형태였습니다. 독립협회를 주도한 것은 역시 정동파였죠.  아관파천 때는 고종의 환궁을 주장했고, 자주독립을 외칩니다. 당연히 대한제국의 성립을 열렬히 지지했죠. 하지만... 독립에 대해서야 목표가 같았지만, 양측의 생각은 꽤나 달랐습니다.

갑신정변 때 무조건 위에서의 개혁을 외치다 실패한 것을 반성했던 걸까요.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신분을 막론한 집회를 엽니다. 나라의 현안, 근대화에 대한 토론과 연설이 진행됐죠. 여기서 나온 민권운동은 확실히 주목할만 합니다. (지방에 지부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서울 중심이긴 해도 백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석했으니까요. 이쯤되면 그냥 민중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아래에 다룰 헌의 6조를 주장할 때는 무려 1만명이나 되는 민중들이 모였고, 개막 연설을 한 사람이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었습니다. 이정도면 일제강점기 때도 이어지는 계몽운동의 좋은 시작이죠.

하지만 평화롭게 민권운동을 할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주요 현안들은 다 열강 가운데서 한국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 것이냐였으니까요. 독립협회는 이름대로 자주를 외쳤고, 열강에게 땅을 떼어주려는 모습이 보이자 거세게 맞섭니다.


(사진은 1910년) 20대의 젊은 이승만은 여기서 연설을 하면서 인기를 얻습니다. 그의 정치인생의 시작이죠, 그러고보니 반러는 그의 평생의 신념이었군요.

고종은 러시아에게서 군사교관을 파견받고 한러은행을 설립하는 등 인아거일을 계속합니다. 그 대신에 절영도(현재의 부산 영도구)를 석탄기지용도로 조차해주려고 했죠. 독립협회는 여기에 맞서서 싸웠고, 니콜라이 2세가 모두 없던 것으로 하면서 성공합니다.

러시아의 위협도 사실이었고, 미일 등에서 배우고 이들 외교관과 친했던 그들이 반러가 되는 건 필연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인아거일을 밀었던 고종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간 것이죠. 고종은 이들에 대한 경계를 바로 드러냅니다. 러시아의 교관, 고문들을 자르면서 서재필도 잘라버립니다. 이렇게 고종의 태도가 변하면서 관리들도 거리를 두게 되죠.

+) 이후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살아갑니다.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잠시 한국에 오긴 합니다만.

1대 회장은 안경수, 춘생문 사건 때 김윤식에게 고종의 도망을 밀고한 사람입니다. -_-; 강경파로 고종을 폐위(형식상 양위)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걸려서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이후 자수해서 재판을 받지만 사형당하죠. 2대는 그 유명한 이완용, 하지만 곧 전라도 관찰사로 갔죠.



그리고 3대 회장이 윤치호입니다. 부회장은 이상재였죠. (이상재는 젊을 때 사진이 없네요) 이들은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되죠. 근대화된 나라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것이요.

"또한 요즘 구라파의 여러 나라들에서 비록 전제 정치라고 하더라도 국사를 의논하는 상, 하 의원을 둠으로써 국시를 자문하며 언로를 널리 열어 놓았습니다."

의회를 만들자는 거였습니다. 고종의 답은 이렇습니다.

"아뢴 내용이 비록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일에 대해 지위를 벗어나 망녕되이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양측의 시선 차이를 참 쉽게 볼 수 있죠. 독립협회는 부패한 관리들, 곧 고종의 측근들에 대한 탄핵도 지속하고 있었기에 더 밉보이게 됩니다. 그들이 한 건 결국 고종과 연결돼 있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9월에 사건 하나가 터지니, 이른바 김홍륙 독다(독차) 사건입니다. 러시아 통역사로 고종-베베르 사이에 있었기에 고속 출세할 수 있었는데, 많은 돈을 착복한 게 걸려서 유배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고종이 좋아하는 커피에 독(아편)을 타는 참 어이없는 짓을 저지릅니다. 커피를 좋아했던 고종은 맛이 이상한 걸 알고 뱉었지만 (토했다고도 하는군요) 황태자는 모르고 마셨다가 크게 앓습니다. 다행히 죽진 않았지만 이것 때문에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 뭐 그런 카더라도 있죠.

문제는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이었습니다. 김홍륙 등 관계자들을 교수형에 처한 후 길거리에 내다버렸고, 분노한 민중들은 시신을 훼손했습니다. 이러자 잔인한 옛날식으로 했다면서 독립협회와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이 항의하고 나선 것이죠.

"오늘 이 의관들은 제멋대로 상소를 올려 잔인하기 그지없는 옛 법을 회복하여 폐하로 하여금 여러 나라들에게 망신을 당하게 만들었으니 의당 한 번 크게 징벌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모두 내쫓음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 윤치호

독립협회는 이 사건을 구실로 각 대신들을 탄핵합니다. 단지 협회 구성원들만 한 게 아니었고, 민중들까지 동원된 시위를 벌였죠. 고종은 별수없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의정부 의정, 참정, 궁내부, 법부, 군부, 탁지부까지 무려 일곱명... 지금으로 따지면 시위를 통해 각 부 장관들이 모두 갈린 겁니다. 지금 일어나도 대단한 일인데 그 땐 어땠겠습니까. 그 대신에 임명돼서 나온 것이 박정양 내각, 정동파로 독립협회의 편이었죠.대신들이 독립협회에 우호적인 인물들로 바뀐 겁니다. 이 때 그들의 힘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 왜 고종이 이렇게 밀렸는가 하면 열강 외교관들이 그들의 편이었으니까요. 정동파의 시작이 그들과의 사교 모임이었고, 서양의 정책들을 추진하는데 반대할 필요는 없었겠죠. 물론 고종이 명분쌓기로 봐준것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의회설립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대상도 있었으니 중추원이었습니다. 고려 때는 중요한 기구였고, 조선 초까지도 그랬지만 세조때부터 중추부로 이름을 바꾸고 유명무실해집니다. 갑오개혁 때 자문 기관으로 다시 나왔죠. 그리고 일제 때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으로 -_-; 친일파들에게 감투 던져주기용으로 바뀝니다.

독립협회는 이 중추원을 의회로 바꾸려고 한 겁니다. 의관은 총 50명으로 절반은 정부에서 (곧 황제가) 뽑는 칙선 의관, 나머지 절반은 국민들이 뽑는 민선 의관으로 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국민들의 대표로 이 25명의 의관을 뽑는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고종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그 중 8명을 황국협회에서 뽑게 하라고 했죠.

황국협회는 보부상 집단으로,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한다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고종 등 집권층은 이들을 권력 강화에 이용했구요. 이들 역시 장사하려면 위의 허락이 있어야 되었고, 이 때문에 이들은 왕의 친위세력이 되기 쉬웠습니다. 상인이니만큼 돈도 잘 갖다줬구요. 당연히 부정부패에 연관될 수밖에 없었고, 무력도 쓰는 정치깡패의 시작으로 봐도 됩니다. 황제야 자신의 친위세력을 더 넣고 싶었던 거지만 윤치호는 단호히 반대했고, 성공합니다.

자신감을 더 얻은 독립협회는 대신들을 만민공동회에 초대합니다. 역시 민중들까지 나서서 며칠이고 참여를 독촉하니 고종도 허락했고, 이렇게 관민공동회가 되었죠. 여기서 헌의 6조가 나옵니다. 1조는 자주적으로 관민이 힘을 합해 전제황권을 굳건히 한다는 것이었는데... 다른 건 다 황제의 권한을 줄이는 거였죠. 고종은 이걸 받는 척 (조칙 5조) 하면서 이상재 등 독립협회 핵심 14명을 체포합니다.

이전에 의정부 참정이었다가 독립협회에 탄핵당한 조병식, 그는 익명서를 만들어 갖다바칩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죠.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를 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조작의 내음이 강하게 풍기죠. 고종의 계획이었을 겁니다. 체포한 그 날이 바로 의관 25명을 투표하는 날이었거든요. 그러면서 독립협회에 우호적이던 대신들도 파면하고 협회라는 이름 자체를 금지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대로 되진 않았죠.

투표를 하러 모인 민중들은 분노했고, 자체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엽니다. 체포된 이들이 있는 경무청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자리를 옮기자 고등재판소에서 며칠이고 시위를 계속하면서 석방을 요구했죠. 고종은 다시 물러났고, 체포된 이들은 석방됩니다.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립니다.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등의 처벌과 헌의 6조 실행, 독립협회 해산 철회를 주장하면서요.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뒤로는 황국협회를 움직입니다. 만민공동회 자리를 황국협회가 습격한 것이죠. 교과서에 나오는 그 사건입니다. 하지만 분노한 민중은 다음 날 보부상들을 공격했고, 조병식, 홍종우 등의 집을 습격합니다.


홍종우. 김옥균을 암살한 사람입니다. 근황파로 활동했고, 황국협회를 이끈 사람 중 하나죠. 헌데 의외로 외교에서 자주적인 모습(물론 반러 중심이지만 열강들에 대해서 다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습니다)나 의회 설립 등의 부분에선 독립협회와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달랐죠) 차이가 있다면 전제황권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요. 김옥균 암살범이란 딱지가 꽤 크지만, 그래도 근황파 개화주의자로 나름 재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종의 측근이긴 했지만 큰 영향은 못 준 모양이네요. 1905년에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의 일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1913년에 죽었구요.

"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 모두는 짐의 말을 들을 것이다. 전후하여 내린 조칙(詔勅)에 대해서 너희들은 대부분 따르지 않고 밤새도록 대궐문에서 부르짖었으며 네거리에 가설로 문을 설치하고 제 마음대로 도리에 어긋나게 사나운 짓을 하면서 사람들의 가산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어찌 500년간 전제 정치의 나라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겠는가?"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립니다. 고종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겠다 생각해서 이들의 대표 200명을 만납니다. 각국의 외교관들도 불러서 말이죠. 여기서 위와 같은 말을 했고, 독립협회에 이어 황국협회의 주장까지 들으며 그들을 달랩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고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리자 본격적으로 강경하게 나가죠. 덤으로 유림에서 최익현 등 유림도 독립협회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 고종이 외교관들의 눈치를 봤다 했는데, 위의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그들에게 미리 언질을 주고 인정을 받습니다. 심지어 일본 공사에게도 말이죠. 이들이 보기에도 독립협회가 너무 나간 것으로 보였다는 거겠죠.

"황제가 반역자라고 말했기 때문에 박영효를 반역자로 생각하는 민중은 지금 왕좌에 있는 허수아비보다 더 나은 통치자를 가질 자격이 없다" - 윤치호

여기에 독립협회가 제대로 자살골을 넣습니다. 12월 15일에 그리도 원하던 중추원이 개원했고, 18일에 인재 11명을 정부에 천거했는데, 거기에 박영효와 서재필이 들어있던 것이죠. 독립협회 내에서 박영효는 여전히 개화의 아이콘이었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그가 뒤에서 바람을 넣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고종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문제까지 간 거였습니다. 결국 군대를 동원해 독립협회를 해산합니다.

+) 이승만도 해산 과정에서 체포되었고, 고문을 받습니다. 후유증으로 안면경련증에 걸렸다고 하구요. 자신은 일본 경찰한테 고문받은 거라 주장했지만요 -_-; 여기서 죄수들을 가르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기도 합니다. 황실에 대한 분노도 열심히 키우면서 말이죠.

"독립협회는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 윤치호

독립협회는 단순한 계몽단체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볼 수 있듯 지나칠 정도로 권력지향적이었죠. 애초에 갑신정변 때부터 급진개화파는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들이 개혁을 주도하려 했습니다. 일본의 힘을 빌린 갑오개혁 때 그렇게 했고, 이 때는 의회설립으로 그걸 합법적으로 하려고 했죠. 이들의 목표는 입헌군주제였습니다. 반면 고종은 전제군주제를 원했구요. 적어도 독일식의, 황제의 권력이 강한 입헌군주제를 원했죠. 이 사이는 절대 메울 수 없는 간극이었습니다. 이들도 문제야 많았지만, 그나마 개화를 할 인재들은 여기에 다 몰려 있었습니다.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걸 없애버린 거죠. 그렇다고 마냥 고종을 까기엔 독립협회도 너무 지나쳤습니다. 갑신정변때보다야 나았지만 역시 너무 강경했죠.

아예 갑신정변 같은 급진개화파의 쿠테타가 성공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죠. 실제 역사보단 개혁은 더 빨랐겠고, 유림과 백성들의 반발은 더 컸겠죠. 그걸 이겨낼 수 있었다면 뭐라도 해보긴 했을 거니다. 하지만 고종이 한 것과 얼마나 달랐을까, 혹은 이게 가능은 했을까가 문제죠. 이들이 롤모델로 삼은 일본과는 상황이 너무도 달랐으니까요. 덴노는 애초부터 허수아비였고, 조선과 달리 지방에서 무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개화파에겐 그게 없었고, 결국 외국, 일본의 힘을 빌리는 게 한계였죠. 이들이 원하는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건 일본이 강제로 시킨 갑오개혁뿐이었습니다. 반대로 그렇기에 이들이 정권을 제대로 잡았다면? 이 궁금해지는거죠. 그런 배경이 있음에도 갑오개혁을 자세히 다뤄야 될 정도로 바뀐 게 컸으니까요.

아무튼 이들은 실패합니다. 이후 이들의 생각과 길도 갈리게 되죠. 따로 글 써보고 싶은 주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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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이야기가 너무 길었군요. 고종이나 개화파나 간단히 얘기하기는 힘들죠. 주제가 러일전쟁이니만큼, 이 얘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러일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1904년 1월,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을 선포합니다. 러시아야 당연히 긍정했지만 일본은 간단히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켰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합니다.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전할테니 전쟁수행을 도우라는 거였죠. 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진행되면서 일본의 요구는 더 커졌고구요. 고종은 미국에 밀사를 보내 수호조약에 기대어 한국을 지켜달라고 했죠. 이 때 특별사면됐던 이승만이 밀사로 가서 미국 대통령을 만날 기회를 찾으면서 미국 대학을 다니게 됩니다.

1905년 7월, 하와이에 있던 윤병구 목사는 미국의 특사를 만나서 대통령을 만날 수 있게 소개장을 써달라 했고, 받아냅니다. 이어 이승만에게 가서 마침내 대통령을 만나게 되죠.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하면서 이런 밀서 대신 한국공사관에서 직접 보내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한국이 일본을 직접 적대해야 된다는 얘기... 고종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이러다가 을사조약을 맺게 되고, 이승만은 학업과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윤병구도 외교분야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합니다.


저 특사가 바로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윌리엄 태프트, 일본으로 가는 특사였죠. 거기서 맺은 게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입니다. 웃긴건진 몰라도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고 가쓰라가 다시 총리가 되었을 때 한일합방이 됐구요.


태프트와 함께 일본에 갔다가 한국에도 들린 대통령의 딸 앨리스는 고종에게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았구요. 고종이야 여전히 미국에 기대를 건 것이겠지만, 그녀는 위와 같은 짓을 하고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성황후의 능에 있는 석상에 탄 것이죠. 진짜 말을 탄 것처럼 차려입고 인증샷도 찍었구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한국을 도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일본에 빠져 있었고, 이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독일, 러시아의 성장으로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힘을 줄이고, 1898년 미서전쟁에서 이기면서 미국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여기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까지 손에 넣으면서 하와이를 넘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더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구요. 영국은 홍콩 등의 중국에 있는 이익을, 미국에겐 이제 막 손에 넣은 필리핀을 지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전편에 말했던 일본의 북수남진을 그대로 둔다면 자신들의 이익에 걸리게 되죠. 그렇다고 일본이 북쪽으로 세력을 키우는 것도 좋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러시아보다 나았습니다.

뭐... 그렇게 된 것이죠. 짜증나긴 하는데, 더 둘러볼 점은 있습니다.

밀약에서 가쓰라가 주장한 것은 러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한국이라는 것입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동아시아에 긴장상황을 불러왔다는 것이죠.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은 또 다른 외국을 끌어들여서 문제를 만들 것이고, 전쟁이 다시 일어날 거라는 거였습니다. 이걸 막기 위해서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태프트는 여기에 동의합니다. 1차 영일동맹에서 여기까지는 안 가려 했던 영국도 비슷한 시기 2차 영일동맹을 통해 동의했구요.

그 끝은 을사조약으로 한국이 돌출행동을 못 하게 만든 것, 그리고 러일의 강화를 통해 동아시아의 전쟁을 끝낸 것입니다. 이걸 중재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죠. 네 이렇게 동아시아의 평화를 깬 한국은 벌을 받았고 평화가 돌아오게 됩니다.

쯥...

북한에게 얻어맞는 건 한국의 대북정책이 잘못돼서 그렇다는 식이긴 합니다만, 뭐 그래도 얻어맞은 쪽의 외교를 따져보긴 해야죠. 고종의 인아거일은 이 부분에서 확실히 실패했습니다.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에게 한 방 먹이긴 했지만, 역시 러시아를 경계하던 영미의 어그로까지 끌어버린 것이죠. 일본은 여전히 열강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영미는 한국을 버리게 됩니다.

+) 열강이 신흥 열강의 식민지 확대를 계속 막았고, 일본이 니네만 먹냐는 식의 억울함은 있을 겁니다. 네 뭐 그 부분은 인정해줘도 될 겁니다.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황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딴 망발을 넣지 않는다면 말이죠

러시아가 이겼다면 식민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는 if가 있는데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일본에게 KO승을 거두지 않았다면, 역시 영미가 개입해서 전쟁을 끝내고 여전히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반대로 KO승, 그러니까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해낼 정도라면? 만주 지배 과정에서 보듯 러시아가 식민지화했을 가능성도 있구요. 반대로 고종이 인아거일을 하지 않고, 반대로 반러를 밀고 나갔다면? 오히려 이 쪽도 가능성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발전 요인 중 큰 게 반공전선에서의 최전선이었으니까요. 그걸 대한제국이 할 수 있었다면? 일본의 세력확대를 막기 위해서라도 한일합방까지는 허용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뭐 전부 가능성입니다. 당시 한국이 반러전선을 맡을 정도의 군사력이 있진 않았고, 해방 후의 대한민국에 영토 욕심이 있던 나라는 없었으니까요. 일본에게 그리 당한 고종이 러시아를 택한다 이상의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 거구요. 다만... 그런 국제정세를 결국 읽지 못 하고 미국 등의 열강과의 외교에 희망을 건 건 참 안타깝기만 하죠. 고종은 이후에도 헐버트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밀서를 보내려 했고, 07년에는 그 유명한 헤이그 특사까지 보냅니다. 당연히 다 실패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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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 할 때 허무하긴 합니다. 어쨌든 엔딩은 일본의 강제 어쩌고니까요. 어떤 루트를 타든 한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일본을 막을 수 없다는 배드엔딩의 가능성이 제일 높으니까요. 그렇다고 얘기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이 얘기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전편에서 아시아주의 얘기를 했습니다. 황인이 백인을, 아시아가 유럽을 이긴 거라서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에서도 좋아했다는 것 말이죠. 일본에서도 식민지 만든 건 문제지만 러일전쟁에서 이긴 건 잘 한 거다, 뭐 시선도 있는 모양입니다. 열강의 침략인 흑선 내항으로 시작해서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하고, 마침내 열강과 싸워서 이겼다 이런 스토리니까요. 아 예 뭐 과정이 어떻든 이겼다는 결과 자체는 대단하긴 합니다. 그노무 아시아주의 내세우며 피해자 행세만 안 한다면 이정도까지야 상관없겠죠. 세트로 나와서 그렇지

하지만 이런 인종전쟁의 모습은 겉모습일 뿐이죠. 백인 열강의 최강인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뒤를 봐줬기에 이길 수 있었고,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같은 황인인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으니까요.

자, 배경이 길었네요. 전쟁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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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이 크고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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