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5/06/11 22:22:17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시스템과 부패(corruption)
강의 중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 (제 생각을 살짝 섞어서) 옮겨봅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운하를 파서 운용해왔습니다. 물자, 특히 곡물 운송 비용을 어떻게 줄이느냐에 제국의 운명이 왔다갔다하던 처지였으니까요. 이런 운하 운영 메뉴얼들이, 아주 옛날 것들은 남아있지 않더라도, 청나라 때 것 정도는 남아있습니다.

이 메뉴얼들을 보면 이러쿵 저러쿵 해서 도저히 메뉴얼대로 굴릴 수 없는 모순점들이 많습니다만, 실제로 운하는 어떻게든 운영되었지요. 어떻게? 바로 메뉴얼에 나와있지 않은 많은 요소들이 윤활유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윤활유들을 오늘날 어떤 사가들은 부패(corruption)라고 부릅니다. 하급 관리들 주머니에 뒷돈을 넣어준다든지, 통행세라든지, 기타 등등.

하지만, 어디까지가 정상작동 시스템이고 어디서부터가 부패일까요. 물론 매우 심각하고 용납하기 어려우며 전체 시스템의 운영에 해악을 끼치는 부패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여전히 우리가 부패라고 부르는 것들의 상당수는 사실 알고 보면 시스템이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디테일들, 상호 모순점을 부드럽게 우회하여 실제로 일이 굴러가게끔 하기 위한 불문율, 혹은 관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경제사가들이 시스템의 실패(failure)에 대해 논하고, 부패를 언급하길 좋아합니다만, 이는 어느정도 현실과 이상이 전도된 사관입니다. 현재 학계에서 만들어내고 토론하는 "시스템"들은 대개 유럽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도출해낸 것들로, 이 시스템을 아시아 각국의 역사적 경험에 대입하면 당연히 안 들어맞는 구석들이 나옵니다. 이런 불일치를 발견할 때 마다 "역시 중국은 이러저러한 실패 (시장실패, 국가실패 등등)를 겪었군. 그 실패가 중국의 근대화의 발목을 잡은 거라고 논문을 써보자 (휘리릭)" 따위의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곤 하는데 이는 올바른 접근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막스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 (Asiatic mode of production)]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건 그냥 "(어... 이게 뭔지 모르겠음) I don't know what it is" 을 우아하게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운하 운영상에 있어서의 뒷돈 관행을 [부패]라고 한다 치면, 우리는 북미 대륙에 광범위하게 퍼진 팁 문화 역시 일정 정도 [부패]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메뉴얼에 없는 임의의 비용을 하급 운영직원들에게 직접 지불해야한다니! 청나라 운하 운영 관리들이 통행세를 받던 것, 그 통행세 없이는 그 하급 관리들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낮은 봉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양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날 부패지수 같은 걸 산출할 때도 비슷한 장난을 쳐볼 수 있습니다. 만약 팁 문화를 [부패]의 한 사례로 산입한다면, 북미는 매일 같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양의 어둠의 돈거래가 이루어지는 부패의 제국이 될 것입니다.

중국의 사가들은 제국의 몰락을 다룰 때 으레 도덕적 타락을 그 중요 원인으로 꼽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서술을 결코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됩니다. 미래의 사마천이 미국이라는 한 때 잘나가던 제국의 몰락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팁이라는 이름의 부패를 통해 어떤 도덕적 타락상을 읽어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Tob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6-17 15:44)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17 철학/종교은탄환의 딜레마 15 메아리 18/10/16 8730 24
    713 일상/생각햄 버터 샌드위치 30 풀잎 18/10/13 8731 24
    386 일상/생각치킨값에 대한 단상.. 76 Zel 17/03/14 8736 10
    921 의료/건강'코로나19'라는 이름이 구린 이유 29 Zel 20/02/14 8743 14
    85 과학불멸의 세포 17 모모스 15/10/09 8745 10
    614 정치/사회슬라보예 지젝과 정치적 올바름 17 Eneloop 18/04/10 8745 17
    393 문학채식주의자 - 90년대 이후 국내 여성 문학 속 일련의 작품군에 대한 단상 48 팟저 17/03/21 8753 14
    361 꿀팁/강좌사진찍으러 갈까요? 22 사슴도치 17/02/07 8774 25
    999 정치/사회섹슈얼리티 시리즈 (7) - 마이 리틀 섹시 포니 28 호라타래 20/08/18 8798 25
    332 영화2016년 1년 결산을 해봤습니다. 추천작 15개. 25 구밀복검 16/12/28 8805 4
    696 역사고대 전투와 전쟁 이야기 (2) 3 기쁨평안 18/09/13 8809 9
    478 일상/생각... 37 켈로그김 17/07/21 8812 21
    228 역사왜 사계절이 뚜렷하면 좋은 나라일까. 43 기아트윈스 16/07/05 8819 5
    511 체육/스포츠타이거! 타이거! : 게나디 골로프킨-사울 카넬로 알바레즈 전에 대해 19 Danial Plainview 17/09/16 8832 17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8833 3
    354 기타우리 아들의 신박한 표현들 29 Toby 17/01/25 8837 11
    582 과학국뽕론 44 기아트윈스 18/01/25 8838 36
    1005 일상/생각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 되지 마세요. 27 Schweigen 20/09/07 8843 70
    667 여행서울 호우캉스 호텔 결정 로직 43 졸려졸려 18/07/25 8849 15
    1223 일상/생각딸아이는 자스입니다. 13 세상의빛 22/07/15 8855 152
    810 의료/건강저희는 언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요.. 20 Zel 19/05/30 8856 73
    22 정치/사회시스템과 부패(corruption) 9 기아트윈스 15/06/11 8866 0
    214 과학Re : Re : 국내의 에너지 산업 혹은 태양광산업 동향은 어떤가요? 29 고양이카페 16/06/06 8875 10
    201 과학쌀, 보리, 밀 이야기 (자화수분-자웅동주식물) 3 모모스 16/05/06 8877 5
    251 기타"국왕" 대신 "국가와 조국" 위해 싸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8 모모스 16/08/18 8892 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