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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6/22 16:28:42
Name   Moira
Subject   홍씨 남성과 자유연애
데뷔작 이후로 홍상수를 죽 좋아했습니다.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를 가장 능란하게 다루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예술가-근대적 자아의 허위의식을 초딩도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언어로 통렬하게 희화화할 줄 아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영화에는 늘 공백으로 남겨져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탁월하게 리얼한 찌질이 주인공들에게 필경 있을 법한 '본처'의 존재 말입니다. 홍상수 영화 중에서 남주의 연애상대가 아니라 남주의 아내 시점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 있었던가요? 생각이 잘 안 납니다.

근대화 이후 한국인이 갖게 된 가장 중요한 욕망으로 흔히 자유연애에 대한 갈구를 꼽는데,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조혼 풍습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엄청난 질곡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식민지 시기 지식인 남성들은 고향집에 본처와 자식들을 두고 본인은 일본이나 서울에서 신여성과 연애하여 파트너를 확보한 뒤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다소간 파렴치하지만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는) 수순으로 이 질곡을 벗어나는 것이 하나의 모델이었습니다. 반면 사회적 활동반경이 크게 제약되어 있는 여성의 경우에는 좀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하는 현상이 눈에 띕니다. 1925년 조선일보에는 11살짜리 남편이 잠든 틈을 타 목졸라 죽인 15살짜리 아내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성행위 강요를 두려워한 17세 아내가 25세 남편에게 양잿물을 먹이기도 했어요. 1920년대에 형무소에 수감된 여성 살인범 대다수가 남편살해자였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14/2011081401093.html

모든 예술과 영감의 원천이 '연애 에너지'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20세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춘원 이광수(1892-1950)는 20대 초중반에 이상할 정도로 극렬한 자유연애 전도사 역할을 했는데, 아마 중매로 결혼한 첫번째 부인 백혜순 씨와의 애정 없는 생활이 그 원인이었을 거라고들 합니다. 그는 '아무 정신적 결합이 없는 결혼은 매음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백씨와 이혼하고 29살 때 당대의 유명한 신여성이자 페미니스트였던 허영숙과 재혼합니다. 이 두번째 결혼에서 두 사람은 용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해요. 백혜순 씨가 이혼 뒤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남편에 대해 뭐라고 코멘트했는지는 기록한 사람이 없습니다.

김동인(1900-1951)은 좀 악랄한 케이스입니다. 이광수가 그래도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충실하기 위해' 아내와 이혼했다면 김동인은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조혼한 아내 김혜인을 두고 꾸준히 난봉을 피웠고 기생첩을 들이겠다고 모친의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생이 자기를 두고 다른 남자와 관계한 것을 알고는 정을 싹 씻어버렸습니다. 아내는 1920년대 중반에 김동인이 재산을 탕진하고 가세가 기울자 남은 돈을 싹싹 긁어서 달아나 버렸어요. 휴 다행입니다. 김동인은 자신이 '더럽게 놀던' 20년대에 아마도 같이 놀았을, 친구의 동생이자 고향 지인이기도 한 김명순을 '어리석고 문란한 신여성'의 모델로 삼아 조롱하는 소설 <김연실전>(1939)을 써서 일베문학의 원조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진건(1900-1943)은 본처(구여성)가 상징하는 봉건질서에서 벗어나고자 갈망하지만 출구 없이 시들어가는 식민지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단편 <술 권하는 사회>에서 아내가 하는 일 없이 술만 마시는 남편을 타박하자 동경유학파 출신 남편은 "이 조선 사회가 내게 술을 권한다"며 한탄합니다. 아내는 '사회'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술을 권한다니 아마 요릿집 이름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데는 안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대꾸하지요. 무지한 아내를 답답해하며 헬조선에 대해 맨스플레인을 열심히 시전하던 남편은 결국 집을 뛰쳐나가 버립니다. 정작 현진건은 자유연애를 갈망하면서도 이광수처럼 이혼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처가의 원조에 기대어 먹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조혼 시스템에 아주 행복하게 적응한 예술가도 있습니다. <임꺽정> 단 한 편으로 한국문학사상 최고 거장의 반열에 오른 벽초 홍명희(1888-1968)는 13살 때 세 살 연상의 민씨와 결혼해서 15살 때 벌써 장남을 낳았죠. 그 뒤 이광수와 같은 시기에 일본 유학을 하고 신문물 신사상도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접했지만 근대 한국 남성 지식인들의 통과의례와도 같았던 신여성 열병이나 바람기는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홍명희는 일평생 부인을 매우 사랑했고 민씨도 남편을 무척 좋아했다고 해요. 홍명희 전문 연구자인 강영주 교수에 따르면 "당시의 근엄한 가부장들과 달리 자제들이 보는 앞에서도 부인을 아끼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는 일가의 증언이 있습니다.

그런 안정된 결혼 생활의 정경은 작품에 그대로 투영됩니다. <임꺽정>은 두말할 필요 없는 마스터피스이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한국문학 특유의 '여성혐오'적 베이스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작품은 일제 시대에 남성 작가가 쓴, 16세기 조선시대 산적떼를 주인공으로 한 폭력장르물이지만 맞고 사는 여자도 없고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성관계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남성적 시선도 없고 자기가 져야 할 죄의 대가를 '그저 다 운명이외다'(김동인, <배따라기>) 하고 얼버무리는 속임수도 없습니다. 어설프게 수입된 자연주의 모방 따위는 없습니다. 일리아스처럼 1차원적이며 푸시킨처럼 우아합니다.

홍명희라고 이광수나 현진건처럼 교육받지 못한 아내와 대화할 때 답답함이 없었을 리도 없고, 서양문학을 김동인보다 덜 읽어서 에로스를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보다 연배가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일본 체류 시절 '조기유학한 10대'의 아나키적 위험에서 좀더 안전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게다가 양반 가문에 태어나 한학을 배웠고 금산 군수였던 아버지가 경술국치에 자결한 민족열사라는 점도 그의 귀족적 자의식을 형성한 계기였겠습니다. 그가 구식 아내에게 끝까지 충실했던 것은 다른 지식인들보다 더 넓은 지적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이광수와 달리 인간의 법이 맺어준 아내에게서 영육의 완전무결한 파트너를 갈구하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 그런 파트너가 있어야 예술을 하고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영역(역사물과 저널리즘)에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임꺽정>이 그렇다고 12금의 세계는 아닙니다. 소재들 자체는 충분히 충격적이고 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소위 '미학적 형상화'라는 것을 거치는데 홍명희의 경우 그 과정이 대단히 의식적입니다. '불륜'과 '부인구타'라는 전형적인 모티브는 해학적으로 변주됩니다. 7권에서 재물깨나 모은 임꺽정이 서울에 세 명의 첩을 얻자 청석골에 있던 아내 운총이(그 자신이 엄청난 장사임)가 서울 첩네 집으로 남편을 찾아와 서로 치고 받고 싸움을 하는 장면이 있지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남자한테 맞는 장면입니다. 게다가 항상 주위에 목격자들을 배치함으로써 밀실에서 여자가 맞는 일을 방지합니다. [임꺽정이 아내를 때릴 때 아내는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사내의 가장 중난한 곳'을 움켜쥐어 보복합니다. - 죄송 수정할게요. 셋째 첩님이 잡은 것입니다] 작가의 필력은 기본적으로 아내 쪽에 크게 치중되어 있으며, 자기를 궁색하게 합리화하는 남성의 언어보다 악에 받쳐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여성의 언어가 훨씬 생기 있고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인상 깊은 것은 금슬 좋은 부부들을 묘사하는 지극히 모던하고 여성 중심적인 장면들입니다. 그 중 한 등장인물인 양반가 자제 김덕순은 평생 재혼을 하지 않고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삽니다. 부인이 생전에 "우리 집은 어떻고... 이 집(시댁)은 어떻고" 하는 대사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에 김덕순은 서운함을 표시합니다. '니가 시집을 왔으면 시집이 당연히 너의 집이지 무슨 개념없는 소리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 집'과 '남의 집'을 구분해 버리면 남편인 내가 부인님 너의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듯해 안타깝고 섭섭하다는 패시브한 발언인 것입니다. 또한 <임꺽정>의 초반부 주인공인 양반 도망자 이장곤과 백정 딸 봉단이의 로맨스는 거의 전적으로 봉단이 쪽의 주도로 이루어집니다. 이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게으르고 무능한 사위를 미워하는 봉단이의 어머니로서 그 또한 여성이지요. <임꺽정> 정도로 여성의 언어에 강한 주체성과 생생한 활력을 부여한 작품은 한국 근현대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임꺽정>에는 여성주의의 초기 담론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더러 눈에 띕니다. 유교질서에 물들지 않은 단순 무지한 청년 곽오주는 임꺽정의 동무 박유복과 의형제를 맺는 장면에서 '어차피 형제가 됐으니 성도 박씨든 곽씨든 하나로 고치자'며 "성이 피에 붙었소?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피를 다 받았으니까 성은 둘씩 가져야 하지 않소. 하필 아버지 성만 가질 것 무어 있소" 하고 부모 성 같이 쓰기를 주장하기도 하지요. 홍명희 특유의 경기도 사투리를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구어체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빌려 간간이 계몽주의의 편린들이 엿보이는데, 그 결과물은 정말로 우아합니다.

현실적 실천에서도 홍명희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여성단체 근우회에 깊이 관여하고 지지했습니다. 또 특이하게도 아들은 홈스쿨링하고 딸들은 이화여전까지 보냈습니다. 몇몇 사전을 보면 홍명희의 장남 홍기문(북한에서 떠르르한 국어학자가 됨)은 독학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두 쌍동이 딸 홍수경과 홍무경이 이화여전에서 쓴 졸업논문은 해방 이후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홍기문은 당시 젊고 명민한 청년들이 다들 그랬듯이 사회주의자였는데, 근우회의 좌파 계열 활동가 심은숙과 사귀면서 본처를 버렸습니다. 홍명희는 아들의 배덕에 분노하여 몇 년간 본가 출입을 금지했지만 끝까지 그러진 못하고 새 며느리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삼각 사각 자유연애의 폐해가 극심하지만서도 (민족 해방) 활동에 도움이 된다면 괜찮을 수도 있겠다' 하는 식으로 타협했지요.

아 글맺음이 홍상수랑 연결이 안 되네...;;
암튼 여름 휴가엔 선풍기 틀어놓고 <임꺽정>을 읽으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입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7-01 08:22)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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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꺽정 사러 갑니다!
  • 잘 읽었어요. 근대문학을 공부하면서 별로 생각해본적 없는 주제였는데 재밌어요!
  • 머 시 따 ...
  • 우와 필력이! 1따봉 드립니다. 문알못인데 술술 읽혔습니다 재미있네요
  • 멋진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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