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4/04/11 15:45:42
Name   카르스
Subject   절반의 성공을 안고 몰락한 정의당을 바라보며
메이저 진보정당인 정의당이 반세기만에 원외정당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의석을 얻은 진보정당들은 양당제에 영합했다고 욕 먹는 상황이지요.
이러한 진보정당의 위기에 대한 비평들이 곧 많이 쏟아질 겁니다. 특히 민주노동당부터 정의당까지 계보가 내려오는 정의당이 제일 심각합니다.

저도 많은 생각이 들고, 지지자와 당직자 입장에서 많이 쓴 이야기가 나올 거에요.
노동 의제를 버리고 젠더, PC 이슈에 과몰입했다, 노회찬 심상정 말고 중량감 있는 인물이 없다, 엘리트주의적이고 선민의식이 지나치다, 지나칠 정도로 민주당을 적으로 돌렸다, 류호정같은 기회주의자들이 당을 망쳤다, 철학과 비전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다 등등...

여러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개인적인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정의당이 여러 성과를 일궈냈음은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자는 겁니다.
물론 정의당 최근 5-10년의 행보는 한심함과 졸렬함 그 자체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를 끝낸다면, 지난 25년 역사에 대한 과도하게 가혹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민주노동당~정의당이 없었으면
- 복지국가화
- 불평등
- 노란봉투법, 노조가입률 등에서 드러나는 노조 권리
- 노동시간
- 보육과 돌봄의 국가 책임화
- 학생 인권
- 대학 등록금 부담
- 군인 인권
- 성소수자 인권

등등, 수많은 의제의 측면에서 지금보다도 더 후진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제들이 상식화는 고사하고 거론되기조차 어려웠을 겁니다.

예를 둘만 들자면, 그 윤석열과 이준석조차 무상보육의 큰 기조를 깨부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상보육 복지 자체가 사회적인 상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민주노동당이나 주장하는 급진적인 의제였는데, 장족의 발전이죠.
그리고 낙태죄가 폐지되었는데 여권의 반발은 놀라울 정도로 작습니다. 그것도 상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법의 공백지대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기긴 합니다만은.

지금 정의당의 위기는 정의당의 과거 의제가 실현되었거나 민주당이 가져가면서, 고유한 의제를 잃어버린 문제가 큽니다.
한때 진보정당들만의 급진적 어젠다를, 지금은 민주당까지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국가 단위의 상식이 된 어젠다도 적지 않습니다.
제발 더 이상 민주당이 보수정당이라 하지 마세요.
20-30년 전에는 맞는 말이었지만, 한국 민주당도 꾸준히 좌향좌하면서 세계적으로 봤을때 중도좌파-중도 정도는 됩니다.
유럽 진보좌파 정당보다는 여전히 오른쪽이지만,
거기도 옛날만 세가 못한데, 유럽 진보좌파당을 모범으로 삼는 게 무슨 의미인가 생각만 듭니다.

현 정의당에 비판적인 제가 이렇게 정의당의 성과를 인정하는 글을 쓰는 건,
양쪽 모두에서 진보정당의 분명한 공마저 부정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진보정당을 경멸하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치동아리니 이런 조롱을 계속 쏟아내겠죠.

진보정당 지지자조차 그렇습니다. 무슨 츤데레 마인드라도 되는지, 자랑할 법할 성과조차 모른 척 하는 걸로 보입니다.
겸손한 건 좋아요. 근데 겸손한 걸 넘어 정치적 자존감이 낮은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근래 정의당은 자기들의 분명한 성과를 자랑스러워하고, 그 성과를 확장시키겠다는 포부조차 없잖아요.
툭하면 양당제 폐해로 나라 망한다는 소리나 하는 정당의 언행이라면 더더욱.
비례표 10%대를 여러차례 받은 정당이 그런소리를 하면
'양당제가 고착화되는 데 정의당 책임은 없냐?' '정의당은 나라 망해가는데 뭘 했냐'는 소리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런 마인드를 가진 덴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자기들의 성과를 인정하면 자기 집단이 수명을 다했다는 인증이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진보좌파 특유의 세상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금기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인구, 기후, 국제정치, 기술, 불평등 등 복합적인 위기가 다가오는 게 한국, 더 나아가 세계의 현실인 면도 있습니다.

배경은 이해를 합니다.
문제는 그런 배경들 때문에, 지금까지 진보정당 활동의 의의와 한계를 분석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 지체되고 있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국내외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치명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양당제 심판이나 하자, 양당제로 한국 멸망한다는 악담이나 하니까 음...
위성정당 꼼수가 통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만들어진 데 진보 정당의 책임은 없나요? 분명히 악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데...
정의당의 원래 목표였던 완전연동형 도입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완전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하면 이번에 조국혁신당 73석 나옵니다. (300석 * 비례 득표율 24.25%)
정의당은 봉쇄조항 3% 걸린데다 지역구 0석이니 여전히 원외정당일 거고요.
이것이 당신들의 소원은 아니었을 거라 믿습니다.

정치제도 개혁은 분명 필요하지만, 정의당의 선거제도에 대한 집착을 보면
정당은 본질적으로 지지세력을 만들어내야 하는 존재임을 망각하고, 선거제도로 꿀빨려는 태도로만 보입니다.
그러니 선거제도 개혁의 의의가 소수정당 특혜주는 것 정도로 인식되기 좋습니다.
그러한 인식으로 위성정당 꼼수가 통했고, 선거제도 개혁은 그렇게 개악으로 전락했죠.

진보정당들은 그동안 일군 성과와 한계를 재분석하는 데서 재기의 발판을 만들기 바랍니다.
진보정당들은 위에 언급한 성과에서 볼 수 있듯이, 최소 절반은 성공했습니다.
어떻게 절반의 성공이나마 거둘 수 있었는지, 왜 나머지 절반을 이루는 덴 실패했는지를 분석해 보세요.

그것조차 못 하면, 정의당은 앞으로 영원히 원외정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겠지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4-23 07:54)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0
  • 카르추
  • 까르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84 일상/생각20개월 아기 어린이집 적응기 18 swear 23/03/21 2784 29
1328 과학체계화된 통빡의 기술 - 메타 휴리스틱 13 서포트벡터 23/09/14 2765 26
1260 요리/음식차의 향미를 어떤 체계로 바라볼 수 있을까? 6 나루 22/12/20 2762 13
1291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2. 샐리의 짝사랑 14 서포트벡터 23/04/05 2746 12
1210 일상/생각농촌생활) 5월 초 - 6월 초 8 천하대장군 22/06/07 2731 15
1334 역사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알기 위한 용어 정리. 1편 17 코리몬테아스 23/10/12 2726 27
1398 기타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2712 11
1304 문화/예술'이철수를 석방하라' 1 열한시육분 23/05/29 2710 13
1396 기타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2679 29
1285 일상/생각챗가놈 생각 4 구밀복검 23/03/25 2671 19
1259 일상/생각4가지 각도에서 보는 낫적혈구병 4 열한시육분 22/12/18 2608 10
1267 정치/사회장애학 시리즈 (3) - 지리는 게 매력적인 모습은 아니잖아요?: '어른'이 되기 위해 억제를 배워간다는 것, 그리고 장애와 섹슈얼리티 8 소요 23/01/17 2606 12
1316 일상/생각우리 엄마 분투기 8 dolmusa 23/08/01 2605 47
1373 정치/사회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2601 17
1331 꿀팁/강좌귀농하려는 청년들에게 (시설하우스 기준) 18 바이엘 23/09/27 2596 8
1341 꿀팁/강좌스몰웨딩 하고싶은 티백들에게-1 31 흑마법사 23/11/30 2582 23
1282 기타느긋함과 조급함 사이의 어딘가 8 하마소 23/03/08 2576 17
1308 일상/생각비둘기야 미안하다 14 nothing 23/06/29 2576 10
1317 일상/생각사랑하는 내 동네 7 골든햄스 23/08/01 2534 34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19 골든햄스 24/02/27 2523 56
1330 일상/생각아내는 아직 아이의 이가 몇 개인 지 모른다 2 하마소 23/09/25 2514 21
1337 일상/생각적당한 계모님 이야기. 10 tannenbaum 23/10/30 2486 48
1295 문학과격한 영리함, 「그랜드 피날레」 - 아베 가즈시게 6 심해냉장고 23/04/24 2485 16
1332 일상/생각나의 은전, 한 장. 6 심해냉장고 23/09/30 2476 24
1384 정치/사회절반의 성공을 안고 몰락한 정의당을 바라보며 10 카르스 24/04/11 2474 20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