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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1/12 02:25:03
Name   Mariage Frères(Echo-Friendly)
File #1   E51FFDE2_23E4_447A_9852_A62DF84CCC06.jpeg (370.8 KB), Download : 7
Subject   엄밀한 용어의 어려움에 대한 소고


{좌상단}승모근 (trapezius) {좌하단}승모판막 (mitral valve) {우}승모 (mitre)

위 그림을 보아주길 바란다. 우리 어깨에 통증을 유발하는, 항상 올라와 있는 승모근은 의학용어로는 trapezius라고 한다. 이 용어의 유래는 trapezium, 또는 trapezoid로 사다리꼴을 뜻하는 말이다 (헬라어 trapeze가 어원). 사실 승모근의 모양은 전혀 사다리꼴이 아니지만, 이를 상부승모근과 하부승모근으로 나누어서 인식했을 때 사다리꼴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승려의 모자라는 승모가 이 근육에 붙은 까닭은 무엇일까? 알려져 있기로는, 일본에서 란가쿠 번역서인 해체신서 (1774)에 이 근육의 설명을 실으면서 이루어진 의역 (또는 오역)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가톨릭 수사의 모자 mitre를 닮은 모양의 승모판막 (mitral valve)도 존재하여, 이 승모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여기저기 붙어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까막눈이라 승모판막과 승모근의 외양적 공통점을 찾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만다.

어느 분야에 있어서든, 다양한 상황에서 그 상황과 대상에 적절한 용어를 선정하여 서술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독일어의 경우, 여러 다양한 상황과 조건에 맞추어 합성어를 만들어냄으로서 적절한 용어를 새로이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하나의 현상에는 하나의 꼭 적절한 단어가 존재하도록 조정하는 것으로 들었다.
비단 독일의 예를 들 것 까지도 없이 우리 말은 어떠한가? 우리 말의 색을 표현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말, 의성어나 의태어들, 아무리 풀어서 설명해도 도저히 적절하게 설명해낼 수 없는 느낌에 대한 단어들은 우리를 언어의 세계에 매료되게도 하고, 동시에 혼란에 빠뜨리게도 한다.
나의 경우,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그런 혼란을 가장 많이 선사해주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가슴이 쎄하다거나, 우리하게 아프다거나, 쏙쏙쏙쏙 거린다거나 하는 말을 듣고 나면 도대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정보를 제공할 마음이 있기나 한지, 혹시 퀴즈를 내기 위해 방문한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 속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들은 다 그에 맞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그 의미에 천착하여 숨은 뜻을 파헤치고 그 심정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할 밖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용어의 엄밀성이 지켜지지 않는 예 또한 나의 일상과 업무에 너무나도 밀접하게 위치해 있다. 이는 특히 영단어나 의학용어를 한글로 옮겨온 용어들에서 자주 발생한다. 자주 겪는 예를 살펴보자면, 항응고제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응고하는 것을 방지하는, 응고과정에 저항하는 작용을 하는 약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원래 용어는 무엇인가? 그것은 anticoagulant이다. 반대의, 길항작용을 하는 등의 뜻을 가진 접두사 anti- 와 응고를 뜻하는 coagulation의 활용형을 합친 합성어로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잘 살린 번역이라 하겠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혈액이 응고되는 과정은 비단 coagulation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Coagulation은 응고 인자 (coagulation factor)의 연쇄 작용으로 응고 연쇄반응 (coagulation cascade)가 형성되어 fibrin이 엉겨붙는 과정을 통해 굳는 과정이다. 그러나 혈소판 (platelet)의 활성화에 따른 혈전 형성과정이 별개로 존재하며, 이는 혈소판 응집(platelet aggregation)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고, 이를 저해하는 약물을 통칭 항혈소판제 (antiplatelet)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혈소판의 작용을 저해한다는 뜻이다. 이 두 과정을 포함하여, 혈액이 굳어서 혈전을 형성하는 과정을 혈전증 (thrombosis)로 명명하며 이에 저항하는 작용을 하는 약물의 통칭을 항혈전제 (antithrombotics)라고 부른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특정 현상이나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그 말을 정해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 번역어들 사이에는 ‘그거 다 비슷한 거 아니야?’ 라는 뭉개기가 작용한다. 단순히 이를 게으르다고 얘기할 수도 있으나, 이는 신의성실의 위배임과 동시에 환자와의 소통에도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큰 오류이다. 여기에다가 혈전용해제 (fibrinolytics)까지 더한다면 분명 혼란은 가중될 것이므로, 이 용어들의 홍수는 이 정도로 얘기하겠다. 요는, 항혈소판제를 항응고제로 [퉁쳐서] 부르는 누군가의 게으름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는 혼란과 피해를 겪는다는 것이다.

이는 간혹 환자들에 대한 ‘쉬운’ 설명의 결과에서도 유발된다. 고지혈증 환자에게 피가 끈적끈적해진다고 설명하면, 끈적한 기름기 피가 혈관을 막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심부전 환자에게 당신이 숨이 찬 이유가 심장이 부어서라고 설명하면, 환자는 폐부종으로 인해 숨이 차다는 것을 알 기회를 영영 잃게될 수 있다. 운동을 해서 심장이 커지고 튼튼해졌다고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는, 심비대는 좋은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처한 환경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의학적인 상세한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환자나 보호자들은 쉬운 이야기로 치환해서 기억하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쉬운 말로 설명하는 전략을 선택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용어는 의사소통의 근간이다. 아무리 스스로가 명의라고 자부한다고 해도 환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다른 의사에게 또 진료를 받게 마련이다. 그리고 21세기는 정보가 넘쳐나고 어디서나 누구나 일정 수준의 정보를 접근할 수 있는 정보 대중화의 시대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나만의 언어를 사용하며 고립되어 있기 보다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용어의 선택과 그 적절한 조합을 통해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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