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10/18 14:54:07
Name   向日葵
File #1   DSC_5265.JPG (123.9 KB), Download : 13
File #2   DSC_5266.JPG (144.1 KB), Download : 13
Subject   마치츄카町中華




일본에선 흔히 중국요리나 중식당을 줄여서 츄카中華라고 부릅니다.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는 대중적인 중식당은 마치츄카町中華라고 부르는데, 명확한 정의가 있는 건 아니고 다소 모호하게 쓰입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노포, 가성비, 추억의 맛, 개성있는 점주, 이런 키워드들을 공유합니다.

이런 가게들은 진짜 중국요리라기보단 라멘을 비롯해 현지화된 요리들이 주력인 경우가 많고, 카레 같이 엉뚱한 요리를 팔기도 합니다. 마치 한국 중식당이 짜장, 짬뽕을 주력으로 삼으면서 제육볶음을 팔기도 하는 것처럼요. 제가 자주 다니던 가게도 이름만 츄카일 뿐 중국요리는 몇 종류 있지도 않았고, 온갖 요리를 다 파는 식당이었습니다. 제가 즐겨먹었던 건 카츠카레, 치킨라이스, 히야시츄카, 쟈쟈멘, 카츠동 등이었는데 하나 같이 정통 중화와는 거리가 있는 물건들이죠.

점주는 동북지방 출신의 영감님과 그 부인으로 가게 위에서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일본어 제대로 하지도 못하던 외국인을 꺼려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사위가 외국인이어서일지도 모르겠네요(이쪽은 백인이긴 합니다만) 낯선 타향에서 음식 주문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저에겐 이 가게가 가장 마음 편히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가게의 티비로 노부부와 함께 고시엔이나 스모를 보면서 한두마디씩 주고 받기도 하고요. 여름철 종이 한 장 붙어있지 않은 채 일주일 넘게 셔터가 내려가있어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여름휴가였던 걸 알고 난 뒤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죠.

그렇게 20개월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저는 도쿄를 떠나 요코하마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게 작년 3월 무렵의 일인데요, 직장은 거리가 꽤나 있었고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한 번도 가게를 찾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네로 이사 간다고 인사까지 했는데 다시 들락날락하기도 좀 미묘했고요. 코로나 때문에 가게가 없어지진 않았을까, 어르신들 정정하시려나 그런 상념이 가끔 드는 정도.

그러다가 오늘 야간당직 끝나고 퇴근하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나는 겁니다. 전직하기로 해서 이제 도쿄 올 날도 며칠 안 남았는데, 오랜만에 가볼까? 그렇게 불쑥 찾아갔습니다. 빨간 노렌이 걸려있는 게 그렇게 반갑더군요. 콘니치와를 외치면서 들어가자 아라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방에서 재료 손질하다 나온 할아버지도 활짝 웃습니다.

귀국한 줄 알았다, 일본에 계속 살면서 결혼하고 그새 애도 생겼어요, 반지 보고 결혼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애까지 생겼다니 축하할 일이 둘이네, 지금은 아내 고향에서 살고 있어요, 일본어도 많이 늘었네, 아내 덕에 조금 늘었죠, 떠나지 않고 일본 눌러앉는 거야, 내년 즈음에 일본으로 귀화할 거에요, 뭐 그런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주문을 합니다. 오늘의 선택은 매주 먹었던 카츠카레, 그리고 치킨라이스. 보통은 하나를 골라서 곱빼기로 먹었지만 오늘은 둘 다 먹어야겠어요.

본격적인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대화가 끊기고, 묵묵히 접시를 비워나갑니다. 달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그럼에도 따뜻한 맛. 그리웠어요. 혹시나 예전처럼 맛있지 않으면 어떡하나 두려웠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다 먹은 뒤 계산하려는데 할머니가 슬쩍 다가와 속삭입니다. 오늘은 결혼 축하하는 의미로 돈 안 받을게. 대신 다음에도 꼭 와야돼. 애기도 데려오고. 알았지? 그럼요. 꼭 다시 와야죠. 잘 먹었습니다ごちそうさまでした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11-02 07:3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9
  •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 추천합니다 훈훈
  • : )
  • 사람냄새 나네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79 역사러일전쟁 - 개전 13 눈시 16/10/10 5046 4
918 일상/생각처음 느낀 늙음 3 행복한사람 20/02/03 5061 22
1149 정치/사회노인 자살률은 누가 감소시켰나 10 구밀복검 21/12/06 5062 32
1109 게임워크래프트 3)낭만오크 이중헌의 이야기. 첫 번째. 21 joel 21/07/22 5063 16
946 창작기대 속에 태어나 기대 속에 살다가 기대 속에 가다 3 LemonTree 20/04/09 5083 15
956 일상/생각나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9 켈로그김 20/05/06 5083 34
852 일상/생각강아지를 잘 기르기 위해서 4 우유홍차 19/08/26 5084 26
659 일상/생각두 원두막 이야기 9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8/07/08 5086 20
1246 과학이번 카카오 사태에 가려진 찐 흑막.jpg 코멘터리 18 그저그런 22/10/25 5094 24
945 창작그 애 이름은 ‘엄마 어릴 때’ 14 아침 20/04/08 5097 12
298 정치/사회시국 단상: 박대통령과 골룸 16 기아트윈스 16/11/08 5101 10
832 일상/생각수신의 어려움 7 化神 19/07/16 5101 15
1081 의료/건강COVID-19 백신 접종 19 세상의빛 21/04/17 5110 22
995 일상/생각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16 ikuk 20/08/12 5111 30
1139 정치/사회검단신도시 장릉아파트에 대한 법개정을 추적해 봤습니다. 15 Picard 21/10/28 5122 8
1154 일상/생각구박이는 2021년에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62 구박이 21/12/23 5140 71
922 일상/생각군대 친구 이야기 3 化神 20/02/15 5141 17
1069 정치/사회미래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에 대한 4개의 가설 27 이그나티우스 21/03/14 5141 17
804 역사뮌헨에 들렀다가 다하우에 다녀온 이야기 4 droysen 19/05/18 5146 11
1137 일상/생각마치츄카町中華 6 向日葵 21/10/18 5148 39
907 게임2019년 좋았던 게임과 별로였던 게임 뽑기 6 저퀴 20/01/07 5152 9
1048 게임체스 글 5편 - 세기의 게임, 바비 피셔 vs 도널드 번 8 Velma Kelly 21/01/03 5161 5
1084 일상/생각출발일 72시간 이내 -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사태 23 소요 21/04/25 5161 11
988 문화/예술지금까지 써본 카메라 이야기(#03) – Leica X2 (이미지 다량 포함) 12 *alchemist* 20/07/23 5164 7
211 일상/생각아버지는 꿈꾸던 시베리아의 새하얀 벌판을 보지 못할 것이다. 4 원더월 16/05/30 5165 7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