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05/04 22:39:37수정됨
Name   거소
Subject   어느 개발자의 현타
'저는 요즘 개발자 연봉 오르는게 안좋다고 생각합니다.'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는거라 봐요.'

유투브에서 어떤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응? 하고 다시 되감기를 했다.
뭐라고?

'생태계에 악영향을..'

이어지는 말은 뻔했다. 실력없는 단기 학원출신들이 밑이나 깔아줘야 하는 판이었는데
걔네들마저 눈만 높아져서 이 판이 어중이 떠중이로 채워지고 있다는 이야기.

잘 나가는 준 유니콘 스타트업의 잘 나가는 개발자께서는 한 1분에 5번정도는 실력이라는 단어를 외쳤다
실력이 없는데, 실력을 갖춰야하는데, 실력은 없으면서, 실력을 갖출때까지는, 실력이 있어야..

그래, 뭐. 나 실력없는 개발자다.
하고 유투브를 꺼버렸다. 내가 삽질하고 돈버는데 보태준적있냐 XX

실력

때로는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깰 때가 있다. 어느날은 잠들려 누웠다가 숨을 죄여오는 공포감에 책을 펼치기도 했다.
실력없는 물경력 개발자, 그거 참 무서운 거라고들 하기 때문이다.

다들 이야기를 한다. 실력만 있으면 개발자라는 직업이 좋은 시대라고.
학벌도 성별도 나이도 다른 직업에 비해 실력을 많이 보는 직업이라고.

책을 읽고, 강좌를 보고, 머리를 싸매고 코딩을 해보지만
사실 실력이 대체 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들 실력있는 개발자가 되라고 한다. 실력있는 개발자를 만들어 준다는 코딩교육시장은
마치 온라인 강의가 처음 시작된 수능 사교육 시장을 방불케하듯 커져가고 있다.

근데 나는 아직도 실력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슬슬 고딩때, 재수할때 쓰던 학원비보다 개발강의랑 책에 돈을 더 쓴거 같은데도
감이 안온다. 염병. 가성비 실화냐.

실력있으면 좋은 동료가 있고 좋은 문화가 있는 회사에 가서 실력이 빨리 는다고 한다
이건 뭐 구파일방의 제자가 되지 않으면 영약먹고 뛰나가는 놈을 어떻게 잡냐 이런 느낌이다만
그건 굳이 개발이 아니라도 인생이 다 그런거지 싶다.
우리 회사 대표는 제 아버지의 수백억 넘는 재산과 인맥으로 사업하면서 으쓱대는게 일인데
그 정도 쯤이야 뭐. 없으면 없는대로.. 이가 나가서 물어뜯질 못하면 손으로 뜯어버리면 그만이고
손이 없으면 발로 차면 그만이고.. 손도 발도 없으면 머리가 깨질때까지 머리로 받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대체 실력이 뭐냐..

깨끗한 코드를 짜는 법,
어려운 알고리즘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법,
하드웨어와 OS의 특성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법,
적절한 메모리 활용을 위한 자료구조를 이용하는 법,
어려운 연산과 많은 요청을 잘 처리하기 위한 분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법,
적절한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설계하고 명확한 테이블, 컬럼, 혹은 도큐먼트를 만드는 법,
비즈니스 요구사항에 맞는 기능을 적절한 속도로 구현하는 법,
서비스 병목 구간과 장애를 미리 대비하고 안정성을 높이는 법,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법,
남들과 열등감과 우월의식 없이 적절한 습도의 의사소통을 주고받는 법,
코드의 테스트를 자동화하고 전체 변경사항을 늘 최소한의 비용으로 감지해내는 방법을 적용하는 법,
사용자의 UI/UX 경험에 대한 만족도를 높여가는 법,
타인과 협업하기 좋은 형태의 코드를 만드는 법,
문제해결을 위한 적절한 도구를 고르는 법,

막상 생각하려니 이 이상 생각도 잘 안난다. 아마 내가 아는 범위가 이정도여서 그렇겠다 싶다.

책상위에 보니 저 중에 한 두세가지 정도의 주제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쌓여있다.
4월에 산 책인데 아직 산 책의 반도 읽지 못했다.
500페이지, 1000페이지 짜리 책을 다 읽고나면 무언가 배운 것 같고
분명히 뭔가는 더 생각하게 된 것 같은데
막상 저 '실력'의 요소들중에 어디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냐고하면
손이 가질 않는다.


대외활동을 하는 개발자들은 어제보다 오늘 나아졌다고 하면 좋은 것이라고 한다.
거짓말이다.
어제보다 오늘 나아져도 어떤 임계점을 뚫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다들 뭉뚱그려 실력이라고만 말하나 싶다.
다들 그 임계점이 어딘지 모르거나, 자기만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겠거니 싶다.

머리가 나쁜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충분히 부지런하고 끈기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 위로 산사태가 떨어지는데
나는 모종삽으로 굴러오는 흙더미를 파헤치며 나아가는 기분이다.
어느 날 겨우 햇빛이 보인다 싶어 고개를 내밀면
그 머리위로 또 몇 배는 큰 산이 떨어지고 있다.

어느날은 산이 뒤집어진거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 산 너머너머에 선 놈이
으스대며 너네는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다고 하면
맞는 말이어도 화가 난다.
어떤 장르소설의 주인공처럼 손도끼를 던져 머리를 쪼개고 싶은 기분도 든다.

삽을 놓고 대충, 딱 그 봉우리에서 구르면서 살아도 되긴 하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괜찮다고 나름의 길을 보여준다.

그 달콤한 말에 삽을 몇 번이고 던지고 싶어지지만서도
저 앞에서 궁둥이를 흔들면서 실력없는 놈아 시대를 잘 타서 운 좋은줄 알아라 하고
너희는 맨날 단기 속성 온라인 교육같은거에나 돈을 쓰면서 '실력'있길 바라냐는
그 궁둥짝을 한대 뻥 차주기 전에는 삽을 놓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운이 좋아 돈좀 더 받고 살면 어떠냐
나름의 성공을 이루고는, 낮은 자리에서 발버둥치는 범인들에게
밥이 너무 풍족하다고 혀를 차는 저 얄미운 놈처럼은 되지 않을테다


하고 오늘도 삽을 들어 책을 편다. 어쨌거나, 이 모종삽으로 산을 없애버리든가
머리가 깨져 죽든가. 둘 중 하나라니 간단한 이치다.

산을 없애면 꼭 궁둥짝을 발로 차러 가리라
왜때리냐건 웃겠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5-18 07:49)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5
  • 힘내십시오!
  • 1일1독하겠습니다
  • 남말 같지 않아서 추천합니다.
  • 공감되네요. 원서 읽으려니 머리 뽀사질거 같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39 정치/사회가속주의: 전세계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을 고무하는 모호한 사상 - 기술자본주의적 철학은 어떻게 살인에 대한 정당화로 변형되었는가. 18 구밀복검 20/03/24 7373 23
1021 경제내집 마련을 위하는 초년생들을 위한 짧은 팁들 24 Leeka 20/10/21 7370 19
404 의료/건강성중독에 관하여 몇마디 하고 싶어 적습니다. 12 민지 17/04/04 7370 19
785 의료/건강AI와 영상의학의 미래는? 33 Zel 19/03/27 7366 28
980 일상/생각40대 부부의 9급 공무원 도전기 36 4월이야기 20/07/08 7363 51
66 체육/스포츠[스탯] 세이브 조작단을 검거해보자 - WPA 8 kpark 15/08/31 7363 3
696 역사고대 전투와 전쟁 이야기 (2) 3 기쁨평안 18/09/13 7360 9
345 일상/생각타임라인과 속마음 나누기 36 Toby 17/01/13 7357 34
674 과학지구 온난화와 원전. 56 키시야스 18/08/01 7350 17
48 요리/음식콩국수, 서민음식과 양반음식의 하이브리드 33 마르코폴로 15/07/21 7350 0
120 정치/사회들여다보자 - ISIS (2) 11 눈부심 15/11/27 7349 4
810 의료/건강저희는 언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요.. 20 Zel 19/05/30 7347 73
156 과학알파고vs이세돌 대국을 기대하며.... 34 커피최고 16/02/16 7342 4
393 문학채식주의자 - 90년대 이후 국내 여성 문학 속 일련의 작품군에 대한 단상 48 팟저 17/03/21 7339 14
516 일상/생각애 키우다 운 썰 풉니다.txt 21 Homo_Skeptic 17/09/23 7335 20
765 일상/생각돈이 없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 10 The xian 19/01/31 7303 24
713 일상/생각햄 버터 샌드위치 30 풀잎 18/10/13 7302 24
225 요리/음식아빠요리 만들기 - 스테이크를 맛있게 굽기 위해 필요한 도구 24 졸려졸려 16/06/29 7295 5
1087 일상/생각어느 개발자의 현타 26 거소 21/05/04 7293 35
395 정치/사회화장실을 엿본 그는 왜 무죄판결을 받았나 13 烏鳳 17/03/24 7287 29
605 철학/종교감동(感動) 23 기아트윈스 18/03/22 7283 31
743 정치/사회한 전직 논술강사의 숙대 총학의 선언문 감상 40 烏鳳 18/12/11 7281 35
921 의료/건강'코로나19'라는 이름이 구린 이유 29 Zel 20/02/14 7280 14
494 문학제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려 합니다. 33 그리부예 17/08/16 7272 12
336 정치/사회대리모 문제 37 烏鳳 17/01/03 7267 12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