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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26 02:01:55
Name   머랭
Subject   모 바 단골이 쓰는 사장이 싫어하는 이야기
유난한 거 싫어하는 거 알지만 바 죽돌이가 뭐 얼마나 젠틀하겠어요. 오늘은 술김에 모 바 얘기 좀 하려고요. 이거 규정 어긋날까요? 토비님 만약 안 되면 이 몹쓸 녀석 하고 벌점 주세요. 그런데요. 저 의외로 모범 회원입니다. 제가 좀 회피성이거든요. 급발진 좀 하기는 해도.

제가 자주 가는 바가 있어요. 요새는 잘 못가요. 거기만 못 가는 게 아니라 이 방을 잘 못 벗어나요. 참 많이 두려워졌어요. 바 의자에 앉아 모르는 사람에게 이야기 한두 마디 하는 거 저한테는 일도 아닌데. 난 두려워요. 그냥 방 안에 있고 싶어요. 여기도 마냥 편안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한 발짝 나가면 돌아가고 싶다고. 끊임없이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하면서 주저앉고 싶은 거죠.

사실 사장을 만나러 몇번 갔는데 하필 그게 사장 쉬는 날인데. 나도 이제 남 쉬는 날 알 때는 됐는데. 꼭 기회가 되면 그 날이 휴무일이에요. 그러면 가지말까에 무게가 실리고.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제가 자주 들리던 그 바는 리모델링 하기 전에 윗쪽에 유리창이 있었어요, 유리창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그렇게 좋았어요. 지금보다 인테리어도 촌스럽고 여러모로 불편하고,. 솔직히 그 단체석은 단란주점 소파같긴 랬지만. 그 소리를 듣고 있는게 좋았어요. 난 거기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때때로 무례하게 끼어들어면서 말이에요.

해가 지나면서 사장도 나도 변했어요. 난 농담삼아, 바 리모델링할 떄 사장이 갑자기 타이에 조끼까지 입었던 거 지금까지 놀리고 있지만,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가장 반짝반짝 빛날을 때는 첫번재 모 가수 이벤트를 할 떄였던가. 난 아직 그때 타준 칵테일의 맛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쩌는 칵테일은 마시지만 지식은 없어요. 뭐가 뭔지 잘 모르고요. 부끄럽지만. 하지만 그 떄 내게 줬던 그 술에서는, 사장에게 느껴지는, 특히 요즘에 찾아보기 힘든 그런 활기가 느껴졌어요. 술 디게 맛있다.전 원래 맛없다고는 잘 안해요. 괜찮아 대충 그러죠. 근데 그때 술을 마시니까 이 사람 정말 행복한가 보다,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또 얼마나 전이지. 헷갈려요. 오래다니다 보니까 거기에 기억되는 것들이 많아요. 제 남자친구들은 딱 한명만 빼고 다 데려갔던 거 같아요. 전 맨날 거기서 울고, 또 울고. 내 인생은 왜 이래 그런 뻔한 소리만 했어요. 아마 취객들은 다 그러겠지만.저는 두려워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보다, 사실은. 제가 맘놓고 울 수 있는 장소가 많지 않거든요. 당장 여기가 사라지면 난 어디서 울어요? 세상에 능숙한 바텐더들 많은 거 알아요. 그렇지만 켜켜이 쌓인 시간들이 나를 믿게 해 줘요. 아, 내가 좀 울어도 어휴 하고 넘어갈 거야. 그런 믿도 끝도 없는 믿음.

거기에 앉아있으면 전 뭐 특별한 일은 안 해요. 요즘에는 더더욱. 술을 너무 빠르게 마시고 그러지말걸 했을 땐 이미 늦죠.
사실은 바 너머에 있는 사장을 보곤 해요. 가끔 드는 생각은 요새 뭔 일 있네. 말하기 싫은 것 같으니까 묻지 말자.
제게도 좋은 건 그거거든요. 캐묻지 않는 거. 하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는 거. 얼마 전에 이야기했어요. 이 바 오래 해 주면 안 돼? 이기적인 말이죠. 그건 아는데,

제일 구석자리에서 소리만 없이 운다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거기는.
사장도 뭐라고 뭐라고 말은 안할 것 같아요. 짐작이겠지만.
거기에 다닌게 이제 햇수로 몇년인지 뚜렷하게 잘 몰라요. 그런데 짤랑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익숙한 얼굴이 있고요. 저는 늘 마시는 것만 마셔요. 진토니. 강서맥주. 올드 패션드. 그 뒤로는 조금 달라질 수도.

어쩌면 굉장히 많이 울고 싶을 때 전 거기에 가요. 미안하죠. 남자친구는 데려가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그냥 친숙한 그 바에 앉아서 오늘 뭐 마실래 묻기 전에 술을 시키고는 생각해요.

취하고 좀 잊어버렸으면.
그런데 이제는 잘 알죠. 취할 수록 또렷해져요. 내 잘못도 기억하기 싫은 것도.
그냥 좀 울고 싶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적당히 모른 척을 잘 해주기 때문에 나도 마음을 조금 놓아요.

감정을 터뜨린 다음엔 시덥지 않은 대화를 하죠. 정해진 플롯마냥.
그래도 늘 생각하는 것은, 거기에 언제나 그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 제 욕심이네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12-0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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