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게시판입니다.
Date | 16/07/19 15:25:33 |
Name | 전기공학도 |
Subject | 이슬람 전반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는 게 좋을까요? |
일단 제 입장과 내력을 밝혀야 오해가 없을 듯한 질문글이라서 밝힙니다. 예전에는 기독교 신자였는데, 그쪽으로부터 일련의 어이없는 일도 당해봤고(그쪽은 선의인데 저한테는 폭력인 류의..) 또 그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으며, 그 교리가 현대 과학 및 진화론이 제시하는 바와 (제가 생각하기에) 만족스럽게 합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조용히 무신론자로 지내고 있는 사람임을 밝힙니다. 저의 부모님은 계속 기독교를 믿으시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개개인의 신념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 외의 종교들도 딱히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학문적인 영역에서 어그로를 끌지 않는다면 그러려니 하는 편입니다. 1. <이슬람 공동체의 테러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질문> 이번에 프랑스 니스에서 테러도 있었고, 하여튼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종종 테러를 일으키네요. 뭐 이슬람만 테러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자든, 무슬림이든, 기독교이든 다 극단주의자들이 문제인 게지요. 결국엔 지금 묻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되겠는데요. 이슬람 공동체의 시스템 자체가 그 테러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는지, 아니면 정말 이슬람을 믿는 테러리스트들이 테러를 일으킨 것은 개개인의 착각에 의한 것뿐인지가 궁금합니다. 그 전체 공동체 자체가 극단주의적인 개인들을 잘 양산할 수 있는 체제인지가 궁금합니다. 2. <역사적으로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 1900년대 초반부터 아랍권이 유럽에게 많이 시달리기도 했고, 그 이전에도 역사적 사건들도 많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연히 그들이 유럽에게 당한 것이 많기 때문에 반발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유럽 사람들이 선조들의 죄를 뒤집어써야 하는지가 의문입니다. 근데 그러면 선조들이 남긴 유산을 받을 때 그 과실만 받지 말고 그 죄까지 계승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도 있어서 또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네요. 역사적으로 누구의 책임을, 어디까지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서 물어야 하나요? 3. <히잡 착용을 존중해야 하는가? 외국에 나가서도 히잡 착용을 하는 것을 존중해야 하는가?> 여자들에게 히잡 씌우고 그러는 것이 양성평등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 것도 문화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나요? 만약 양성 모두가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을 한다면(..그것도 좀 그렇긴 한데) 일종의 문화로 인정하고 넘길 수 있겠으나, 여자에게만 유독 엄격하고 여자들의 삶을 옥죄는 이슬람 스타일이 히잡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정작 그쪽 여자들은 별 차별을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아니면 차별을 느끼는 데도 목소리를 함부로 못 낼 수도 있겠죠.) 마치 우리나라 조선 후기 때 여자들이 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외출해야만 하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때 여자들은 일부는 성차별 자체 혹은 성차별의 심각성을 지각조차 못했을 것이고, 나머지는 성차별을 느껴도 차마 이에 대해서 claim을 걸 수 없었겠죠. 이런 것은 문화적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프랑스의 대학 같은 데에 유학 온 아랍 여자들이 히잡을 쓰기를 원하면, 프랑스에서 이를 금지하는 것은 또 어떤가요? 이것은 국제적인 문제까지 걸려 있는 모양이던데.. 문화를 존중하는 사람이고, 종교는 별로 존중하지 않지만 신념은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엔 원래 이슬람에 대해서 엄청 비난하는 쪽의 한 사람이었는데, 요즘 들어서 '제가 극단주의자가 아닌가'라는 반성을 했고, 나름 자료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책이니 인터넷이니 죄다 자신의 편협한 생각을 재생산하는 글들 뿐이라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거의 이쯤되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라서요. 그래서 지금은 니스 테러 같은 것이 터져도 최대한 신중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위의 1,2,3 항목들 그리고 기타 다른 이슬람이란 종교의 전반에 대해서 어떻게 인상을 가지는 편이 좋을까요? 물론 객관적인 정답이 있을 수 없는 문제겠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판단을 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글 올립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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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 교리의 경직성이 테러와 친화성이 존재하나'라는 문제는 저 역시 고민이 많은 부분이지만, 정확하게 이슬람 교리를 공부하지 못한 상황에서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극단'과 '테러'에는 명백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이를 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게 현재 제가 취할 수 있은 유일한 입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이 질문은 미국에서 소수자(주로 흑인을 위한)를 위한 affirmative action을 둘러싼 논쟁과 흡사합니다. 과거의 백인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을 현재의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을 통해 ... 더 보기
2. 이 질문은 미국에서 소수자(주로 흑인을 위한)를 위한 affirmative action을 둘러싼 논쟁과 흡사합니다. 과거의 백인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을 현재의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을 통해 ... 더 보기
1. '이슬람 교리의 경직성이 테러와 친화성이 존재하나'라는 문제는 저 역시 고민이 많은 부분이지만, 정확하게 이슬람 교리를 공부하지 못한 상황에서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극단'과 '테러'에는 명백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이를 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게 현재 제가 취할 수 있은 유일한 입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이 질문은 미국에서 소수자(주로 흑인을 위한)를 위한 affirmative action을 둘러싼 논쟁과 흡사합니다. 과거의 백인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을 현재의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을 통해 즉, 후세에 보상한다는 개념이 강하게 들어있는데 이게 처음 도입되던 당시만해도 다들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 대법원 판례에서는 아직까지는 인정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조만간 그만둬야 한다고 했습니다. 몇 몇 주에서는 주민 투표를 통해 이 정책을 폐기하기도 했습니다. '공론장'에서의 논쟁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과거 책임'을 후손이 어디까지 져야하는 것인지를 정리하는 방법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3. 히잡착용은 프랑스에서 아예 엄청난 사회적 논쟁으로 비화했던 부분입니다. 이 역시 어느 쪽이 딱히 맞다고 보기 어려운 문제인지라 저도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래에 첨부하는 에세이는 제가 지난 가을에 참여했던 '다문화주의 세미나'의 테이크홈 시험 답안 중 하나입니다. 읽어왔던 아티클을 정리하면서 답을 해야하기에 다소 이 논문 저 논문이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고 맥락이 어색할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시험 답안지'이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질문과 생각거리를 던질 것이라 생각해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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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iscuss the concept of culture and different views of Barry and Parekh about cultural survival and cultural rights.
자유주의의 확장으로 다문화 공존을 보장할 수 있는가?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여러 학자들의 논쟁 중에서 다문화주의자 Bhikhu Parekh와 자유주의자 Brian Barry간 벌어진 토론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둘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부터 문화에 대한 이해,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평등을 둘러싼 견해 전반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정치철학적 논쟁을 전개한다.
사실 다문화주의에서 주장하는 핵심논의, 즉 ‘문화적 차이’와 이에 대한 실행으로 인한 주류사회 혹은 다수자들의 차별이 존재해선 안 된다는 주장, 그리고 문화적 차이는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부분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이와 관련해 먼저 Parekh의 논의부터 살펴보자. 그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에 대해 논하며,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유사성과 본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라고 본다. 문화적인 특성과 본성적 측면을 동시에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공통적인 정체성과 본성을 갖고 있지만, 각 문화를 통해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여러 삶의 양식이 매개되며, 각 문화에 맞는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문화란, 학습되고 전수되는 삶의 양식으로 특정 집단 내에서 공유되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평등한 개인으로서의 권리와 법 앞에서의 평등을 보장해주는 한편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되 이를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한 상태에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평등’이 곧 ‘완전히 동일한 대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기존에 존재하던 차별, 문화적 맥락과 차이, 특히 소수자 집단으로서 갖고 있는 불리함 등에 따라 추가적이고 ‘보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일정 수준에서는 ‘특혜적’인 조치도 가능해진다는 논리다. 결국 Parekh가 말하는 평등이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내에서 존재하고 그렇게 이해돼야 하는 개념이다. 그의 언어를 빌면, 특정인의 행동 양식은 그가 속한 문화의 ‘의미 체계’안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Parekh는 아시아계계 면접자들의 행동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나의 사례로 든다. 아시아계 구직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전통, 즉 높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아야한다는 교육에 따라 면접관의 눈을 응시하지 않는데, 그걸 ‘자신감 결여’로 해석하고 불이익을 준다면 이는 제대로 된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감 있는 태도’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등하고 일관된 평가를 하더라도, 문화적 맥락과 ‘의미 체계’에 대한 차이와 해석을 무시하는 순간 평등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시행하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얘기다. 이는 Brian Barry를 필두로한 자유주의자들의 ‘차이를 무시하는(difference-blind)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Parekh는 또 프랑스 공립학교에 히잡을 쓰고 출석한 무슬림 여학생들의 사례를 통해 기존의 자유주의와 세속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복잡성, 그리고 자유주의의 오류 등을 지적한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이 논쟁에서, 공립학교에서의 히잡 착용은 다른 무슬림 여학생들에게 압박을 가하며, 그 자체로 여성억압의 상징이며, 또한 종교적 근본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큰 반대 여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Parekh가 보기에, 이러한 ‘반대론’은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 먼저 무슬림 소녀들은 아버지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히잡 착용을 선택했기에 ‘여성억압의 상징’이라든가 ‘종교적 근본주의’라고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히잡과 같은 종교적 상징물들은 눈에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런 상징물들이 곧바로 비무슬림 학생들에게 ‘개종’을 강요하거나 다른 무슬림 여학생들에게 착용을 강제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주장 역시 증거가 빈약하다. 크리스찬 학생들의 십자가 목걸이 착용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용이 된다면,(물론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종교적 상징이 모두 금지가 되지만) 히잡 역시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Parekh는 이외에도 영국과 캐나다 등 여러 국가에서 벌어진 ‘문화적, 종교적 차이’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간다. 1972년 영국에서 오토바이 운전 시 헬멧착용을 의무화하자 반드시 터번을 써야 하는 시크교도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터번 역시 헬멧 만큼 안전을 보장한다는 게 입증된 뒤에, 헬멧을 대신하는 터번 착용만은 인정되기에 이른다. 이는 건설현장에서의 보호헬멧 대신 터번을 쓸 수 있도록 하는 조치로 이어졌는데, 터번 역시 최소 안전기준을 통과하고, 이를 헬멧 대신 선택한 뒤에 입은 추가 부상에 대해서는 각자 책임을 지도록 하면서 해결했다. 다만 캐나다에서는 이 같은 터번을 둘러싼 논쟁이 좀 더 격화됐는데, 영국과 달리 캐나다에서는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하는 공권력(Royal Canadian Mounted Police), 즉 경찰이 경찰헬멧 대신 터번을 써도 되는가와 관련한 논쟁이 핵심이었다. 캐나다가 가진 몇 안 되는 국가적 상징이기에 논쟁은 더 격렬했지만, 그 자체가 사실은 캐나다의 다문화주의 정체성의 상징일 수도 있다는 게 Parekh의 견해다. 또한 시크교도의 터번 착용이 그들에게 편파적으로 주어지는 특혜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카우보이 모자를 쓰는 것은 그렇다면 ‘백인에게 편파적’인 것이고 다른 이들을 적대시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즉,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의 논리로 모든 것을 바꾸려면, 다른 수많은 모든 것을 다 바꿔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차이를 인정하는 평등’의 관점에서, 즉 다문화주의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공론장에서의 심의와 토론, 터번의 안전성 문제처럼 과학적인 검증 등을 포함한 다각도의 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Parekh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일괄적이고 원칙적인 평등개념으로는 다문화가 실재하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평등만이 최고의 가치는 아님을 주장한다. 이 같은 논의는 종교를 둘러싼 ‘표현의 자유’문제로 확장된다. 그는 1988년 살만 루시디가 출간한 작품 『악마의 시』를 놓고 영국사회에서 벌어졌던 갈등, 그리고 그 논쟁의 전 세계적 확산 과정을 고찰하면서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악마의 시』를 옹호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다문화주의와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살만 루시디는 일종의 소설에 대한 소설(meta-novel)로서 『악마의 시』를 썼고, 주로 경전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려고 하는 이슬람 성직 귀족 혹은 권력자들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작품을 썼지만, Parekh가 보기에 이는 ‘표현의 자유’로 옹호하기에는 선을 넘은 것이었다. 작품 속에서 모하운드(무하마드를 상징)는 일종의 ‘포주’로 묘사가 되기까지 하는데, Parekh가 보기에 이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 까지 옹호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앞서 ‘평등’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듯, ‘표현의 자유’역시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Parekh는 다만, 살만 루시디의 작품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루시디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등의 양상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논점들을 파악해 이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처음에 영국 내 무슬림들의 출간 반대 시위에 우호적이었던 다른 종교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의 여론이 급격히 돌아서게 된 계기, 즉 책을 불태운 사건 등을 살펴보면서, 만약에 초기에 적극적으로 논쟁이 공론장에서 벌어지고 수용되는 형태였다면 좀 더 평화적인 해결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논쟁과 갈등의 과정에서 당사자들 상호간 이해가 부족했고 서로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 소통에 실패했다는 것 역시 문제로 제시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동원가능한 자원이 적은 소수자 집단의 경우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논쟁을 벌일 수 있다는 부분도 지적하면서 해결책을 제안한다. 다양한 제안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핵심적인 것 몇 개만 추리면, 우선 Parekh는 제도적인 공론장을 형성해 서로 다른 공동체/집단이 상호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논쟁적인 이슈들에 대해 토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정치적 심의의 과정은 서로의 감정과 가치, 정체성 등이 갖는 중요성을 인정하고 서로 간 문화적 배경과 문화 내적 합리성을 이해하려는 노력 하에서 진행돼야 한다. 다시 말해 Parekh는 ‘누군가의 특수한 문화적 규범과 이의 실행이 다른 이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문화적 차이가 최대한 평등하게 인정받고 배려 받으면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문화적 충돌과 분쟁’이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지식수준을 높이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다문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다문화주의 사회에서 공존과 평등을 위해서는 결국 방법론적으로 ‘일시적으로 불평등한 접근’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Parekh의 주장에 내재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다문화주의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는 것 역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예외적인 방법을 다양하게 적용하고 다른 문화를 가진 소수집단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면서 ‘집단의 권리’를 부여한다고 했을 때, 이를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한계를 짓기가 어렵고 합의도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다. 또한 시대적, 상황적 변화에 따라 합의의 조건들마저 변해갈 수 있기에 문제는 더 복잡하다. 풀어 설명하면, ‘문화적 차이’가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로 종교와 인종 등에 따라 갈라지는 각각의 문화와 이를 배경으로 가진 커뮤니티’를 전부 인정하고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어디까지, 무엇까지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데, 다문화주의는 그 해법을 제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주류 사회’, ‘다수 집단’이란 단순히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이들이 구현하는 가치 자체가 ‘한 사회 구성원이 헌법을 중심으로 다양한 법령과 규범을 통해 확립해 놓은 공동의 합의 체계와 신념체계’라는 뜻인데, 이러한 한 사회 구성의 핵심적인 합의를 바꿔나가는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에 대해 다문화주의 논리 자체로는 해결책을 내놓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인 Brian Barry는 이러한 맹점을 지적하며, Parekh의 주장 그리고 그와 궤를 같이하는 Iris Young, Will Kymlicka, 그리고 Charles Taylor 등 다문화주의자들의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와 공격을 반박하고 그들의 주장을 비판한다.
Barry는 먼저 자유주의에 가해지는 비판에 대해 강하게 반박하는데, Talyor 등에 의해 가해진 ‘차이를 무시한다’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분명 차이에 관심이 있는데, 다만 그 차이가 ‘경제적 격차’, ‘교육수준 격차’ 등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격차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세계적으로 점점 확산되는 불평등의 사례들을 근거로 들며, 다문화주의자들이 ‘독서 목록’에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작품을 넣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다양한 사회경제적 격차에 의한 대학 진학 불평등 문제는 챙기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자신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이 ‘다른 문화의 생존’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 수 있는 논리적 기반을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고 비판받지만,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오히려 되묻고 있다. 또한 ‘문화의 유지와 생존, 보호에 기반해 권리를 실현’한다는 개념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어 그는 Young의 비판에 대해서도 반박을 전개한다. Young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 뒤에 ‘동화정책’이 자리 잡고 있음을 비판하는데, Barry는 이 역시 오해라고 말하며 자유주의자들은 ‘다양성 유지’와 ‘동화’의 적정한 수준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제도 안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 말한다. 오히려 다문화주의자들이 종교와 인종 등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 자체가 ‘차이를 만들어내는’ 작용이 있다며, 다른 집단에 속한 사회 구성원이 다른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갖고 특정 그룹을 위한 공공정책이 시행되는 것 역시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자유주의자들이 이민자들에게 ‘동화’를 요구하는 것은 자유민주국가의 공공정책으로서 정당한 것이며, 다만 그것이 ‘자발적’이라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어떤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핵심이기에, ‘동화’ 자체는 핵심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지만 ‘자발적 동화’를 반대할 이유 역시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Barry는 또 미국과 영국의 역사적 사례를 들며 특정 인종이나 종족,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특수한 문화가 더 이상 ‘이방인의 것’으로 취급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흡수된 것을 볼 때, 문화란 것이 문제의 핵심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또한 누구의 후손이냐가 ‘국민 혹은 국가성(nationality)’에 영향을 줘선 안 되며, 중요한건 ‘시민적 국가성’이라고 말한다. Barry가 보기에 다문화주의가 갖는 함정은, 소수자 그룹에게 공공의 기능을 양도함으로서 사회 자체가 통합이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Barry는 철저하게 기회의 균등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하지만, 결과의 평등을 ‘그룹’에 따라 맞춰줘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문화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룹’이라는 것 역시 쉽게 각각 하나로 묶이기 어려운 것이라며, 예를 들어 사회적 소수자이자 약자로서 ‘장애인 집단’을 설정한다 해도,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기에 적절하게 정의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문화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문화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다른 많은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집단을 결정하는 것이 돼야하는 지를 문제 삼는다. Young이 비록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구조적 차별’과 ‘적응된 선호’ 등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Barry가 보기에는 공정한 기회와 분배에 집중해 차이를 줄여나가며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Barry는 이어 다문화주의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비판으로 나아간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념이 성공적인 정책처럼 보이는 이유는, 오히려 일반적 원칙에 따른 논쟁 자체가 거의 막힌 상태에서 공중(대중)과 유리된 채 막후에서 일부 정치가들과 학자들에 의해 협상이 이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한 국가 내에 다양한 민족이나 문화가 있고 이러한 집단들이 보편적인 법의 적용으로부터 상당한 면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며 그들의 전통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인데, Barry가 보기에 이는 민주국가에서는 공공영역에서 전체 공동체 안에서의 논의를 거쳐 결정이 이뤄져야한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는 민주국가에서 특정한 그룹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결정조차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공공영역에서 이뤄져야하는 것이지 특정 집단내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Barry는 종교적 의식에 따라 벌어지는 ‘잔혹한 도축’에 반대하는 비율이 79%에 이르며, 시크교도들이 오토바이 운전시에 터번으로 헬멧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 여론이 69%에 이르는 것 등을 예로 들면서, 다문화주의가 다수결 원칙에 기반한 민주주의 원칙을 사실상 침해하는 것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차이의 정치’를 강조하기 보다는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해 공동 운명체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간의 ‘연대의 정치’가 만들어져야함을 주장한다. 또한 Barry는 다시 한 번 ‘문화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면서, 모든 것을 ‘문화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 많은 불이익이 소수집단의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호도하며 실제 경제적, 지리적 요인 등에 의해 존재하는 불이익과 차별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Kymlicka가 출발점에서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퀘백의 프랑스어 사용 소수집단에 대해 더 큰 힘을 줘야한다는 등의 주장을 하지만, 이 경우에도 다른 구분되는 문화를 배경으로 가진 이들이 겪는 불이익에 대해서는 다 적용할 수 없을 것이고 문화는 결국 ‘문제의 핵심’도 아니고 ‘해결책’도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나아가 집시 문화를 가진 이들이 아이를 정규교육 과정에 넣지 않는 것, 강제된 결혼, 여성 할례 등의 문제마저 옹호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히려 각 개인이 평등한 권리를 박탈하고 차별과 소외를 보호하는 상황마저 만들 수 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다문화주의는 오히려 중요한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는, 즉 ‘불평등의 색깔’만 바꿔 특정한 문제에만 천착하게 만듦으로써, 어떤 수혜도 받지 못하는 ‘비소수자 그룹’를 패배자로 만드는 차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Barry의 논의를 통해 살펴봤듯, 문화적 차이가 곧 차별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 분명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사회경제적 격차가 차별로 이어지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문화적 소수자로서 당할 수 있는 차별’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포괄적 열쇠이자 해법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문화주의와 자유주의는 영원히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이념이자 철학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양한 문화의 공존, 인종과 종교 등에 기반해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들이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사실 자유주의 안에 내재해 있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확장은 그 자체로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금지’ 담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자체로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의 확장은 ‘다문화 공존’과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적 차이에 따른 차별 금지’의 출발점은 될 수 있지만, Barry가 주장하는 대로 자유주의가 상정하는 기회의 균등과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에 대한 존중만으로 일거에 모든 차별과 불이익을 해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문화적 차이를 ‘특수성’과 ‘상대주의’로 인정해줄 수는 없다. 다수의 다문화주의자들이 ‘여성할례’와 ‘강제결혼’, ‘아동에 대한 미교육’ 등을 ‘다른 문화이기에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는 서로 다른 문화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최근 다문화주의 담론이 상호문화주의의 형태로 발전해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반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을 추상적으로 상정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존재한다. 자유주의가 갖는 맹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예를 들어 소수자 집단에 속해있고,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을 때, 자유주의적 평등의 원칙만으로는 문화적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필연적 차별을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앞서 Parekh가 제시한 ‘아시아계 구직자들의 면접 사례’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일부 문화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주류 서구 문화보다 조금 더 심한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커뮤니티’ 자체를 해체해버릴 경우 그녀는 소수문화와 종교 출신자로서 갖는 차별에 더해, 서구 주류 문화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종적 차별 등 차별의 이중-삼중고를 그대로 맞닥뜨려야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갖는 집단’의 존재와 그 집단의 영향력 자체가 갖는 ‘보호의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Barry가 상정하는 ‘추상적인 수준에서의 보편적 인간’의 관점에서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원칙이 분명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문화적,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있고 이에 따른 특수성을 갖고 있다. 가장 자유주의가 확산돼 받아들여지고 평등이 구현된 서구 선진사회라 하더라도 피부색과 종교, 문화적 차이에 따른 편견과 차별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는 때로는 사회경제적인 격차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별개의 문제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좀 더 쉽고 실현 가능한 방법은 추상화된 ‘개인 간의 연대’보다는 최소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의 요구와 집단 간의 협의 과정일 수 있다. Barry 등 자유주의자들은 다수 여론의 지지, 다수결의 원칙에 위배돼 진행돼 온 다문화주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다소 모순적이다. 문화적 소수 집단이 ‘다수가 아니기에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문화주의 정책을 ‘다수의 여론’과 결부시킨다는 건 논리적 설득력이 약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Barry 등의 자유주의자가 현재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성 소수자 차별 금지’ 등의 이슈 역시 예전에는 다수의 지지를 받고,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이해가 쉬울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Barry는 이를 비판했지만, 여러 다양한 다문화주의 정책은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권 내에서 소수 정치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각 집단을 대변하는 리더들에 의해서 결정됐을 수 있다. 다수결 기반의 기존 제도만으로는 문제를 애초에 해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 (다수 집단에 의한) 사회적 반발을 줄일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 ‘차별에 대한 금지’와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확장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자유민주국가의 다수결 원칙과 기회균등 강조와 차별 금지, 자유로운 개인의 상정 등 기본적인 원칙은 유지하되, 글로벌화 과정에서 점점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집단이 공존하는 현 상황에서 상호간의 이해를 높이는 제도적 공론장의 형성을 통해 기존의 ‘단일한 가치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국가’의 개념을 보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 이 질문은 미국에서 소수자(주로 흑인을 위한)를 위한 affirmative action을 둘러싼 논쟁과 흡사합니다. 과거의 백인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을 현재의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을 통해 즉, 후세에 보상한다는 개념이 강하게 들어있는데 이게 처음 도입되던 당시만해도 다들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 대법원 판례에서는 아직까지는 인정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조만간 그만둬야 한다고 했습니다. 몇 몇 주에서는 주민 투표를 통해 이 정책을 폐기하기도 했습니다. '공론장'에서의 논쟁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과거 책임'을 후손이 어디까지 져야하는 것인지를 정리하는 방법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3. 히잡착용은 프랑스에서 아예 엄청난 사회적 논쟁으로 비화했던 부분입니다. 이 역시 어느 쪽이 딱히 맞다고 보기 어려운 문제인지라 저도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래에 첨부하는 에세이는 제가 지난 가을에 참여했던 '다문화주의 세미나'의 테이크홈 시험 답안 중 하나입니다. 읽어왔던 아티클을 정리하면서 답을 해야하기에 다소 이 논문 저 논문이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고 맥락이 어색할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시험 답안지'이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질문과 생각거리를 던질 것이라 생각해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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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iscuss the concept of culture and different views of Barry and Parekh about cultural survival and cultural rights.
자유주의의 확장으로 다문화 공존을 보장할 수 있는가?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여러 학자들의 논쟁 중에서 다문화주의자 Bhikhu Parekh와 자유주의자 Brian Barry간 벌어진 토론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둘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부터 문화에 대한 이해,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평등을 둘러싼 견해 전반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정치철학적 논쟁을 전개한다.
사실 다문화주의에서 주장하는 핵심논의, 즉 ‘문화적 차이’와 이에 대한 실행으로 인한 주류사회 혹은 다수자들의 차별이 존재해선 안 된다는 주장, 그리고 문화적 차이는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부분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이와 관련해 먼저 Parekh의 논의부터 살펴보자. 그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에 대해 논하며,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유사성과 본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라고 본다. 문화적인 특성과 본성적 측면을 동시에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공통적인 정체성과 본성을 갖고 있지만, 각 문화를 통해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여러 삶의 양식이 매개되며, 각 문화에 맞는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문화란, 학습되고 전수되는 삶의 양식으로 특정 집단 내에서 공유되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평등한 개인으로서의 권리와 법 앞에서의 평등을 보장해주는 한편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되 이를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한 상태에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평등’이 곧 ‘완전히 동일한 대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기존에 존재하던 차별, 문화적 맥락과 차이, 특히 소수자 집단으로서 갖고 있는 불리함 등에 따라 추가적이고 ‘보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일정 수준에서는 ‘특혜적’인 조치도 가능해진다는 논리다. 결국 Parekh가 말하는 평등이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내에서 존재하고 그렇게 이해돼야 하는 개념이다. 그의 언어를 빌면, 특정인의 행동 양식은 그가 속한 문화의 ‘의미 체계’안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Parekh는 아시아계계 면접자들의 행동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나의 사례로 든다. 아시아계 구직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전통, 즉 높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아야한다는 교육에 따라 면접관의 눈을 응시하지 않는데, 그걸 ‘자신감 결여’로 해석하고 불이익을 준다면 이는 제대로 된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감 있는 태도’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등하고 일관된 평가를 하더라도, 문화적 맥락과 ‘의미 체계’에 대한 차이와 해석을 무시하는 순간 평등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시행하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얘기다. 이는 Brian Barry를 필두로한 자유주의자들의 ‘차이를 무시하는(difference-blind)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Parekh는 또 프랑스 공립학교에 히잡을 쓰고 출석한 무슬림 여학생들의 사례를 통해 기존의 자유주의와 세속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복잡성, 그리고 자유주의의 오류 등을 지적한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이 논쟁에서, 공립학교에서의 히잡 착용은 다른 무슬림 여학생들에게 압박을 가하며, 그 자체로 여성억압의 상징이며, 또한 종교적 근본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큰 반대 여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Parekh가 보기에, 이러한 ‘반대론’은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 먼저 무슬림 소녀들은 아버지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히잡 착용을 선택했기에 ‘여성억압의 상징’이라든가 ‘종교적 근본주의’라고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히잡과 같은 종교적 상징물들은 눈에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런 상징물들이 곧바로 비무슬림 학생들에게 ‘개종’을 강요하거나 다른 무슬림 여학생들에게 착용을 강제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주장 역시 증거가 빈약하다. 크리스찬 학생들의 십자가 목걸이 착용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용이 된다면,(물론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종교적 상징이 모두 금지가 되지만) 히잡 역시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Parekh는 이외에도 영국과 캐나다 등 여러 국가에서 벌어진 ‘문화적, 종교적 차이’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간다. 1972년 영국에서 오토바이 운전 시 헬멧착용을 의무화하자 반드시 터번을 써야 하는 시크교도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터번 역시 헬멧 만큼 안전을 보장한다는 게 입증된 뒤에, 헬멧을 대신하는 터번 착용만은 인정되기에 이른다. 이는 건설현장에서의 보호헬멧 대신 터번을 쓸 수 있도록 하는 조치로 이어졌는데, 터번 역시 최소 안전기준을 통과하고, 이를 헬멧 대신 선택한 뒤에 입은 추가 부상에 대해서는 각자 책임을 지도록 하면서 해결했다. 다만 캐나다에서는 이 같은 터번을 둘러싼 논쟁이 좀 더 격화됐는데, 영국과 달리 캐나다에서는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하는 공권력(Royal Canadian Mounted Police), 즉 경찰이 경찰헬멧 대신 터번을 써도 되는가와 관련한 논쟁이 핵심이었다. 캐나다가 가진 몇 안 되는 국가적 상징이기에 논쟁은 더 격렬했지만, 그 자체가 사실은 캐나다의 다문화주의 정체성의 상징일 수도 있다는 게 Parekh의 견해다. 또한 시크교도의 터번 착용이 그들에게 편파적으로 주어지는 특혜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카우보이 모자를 쓰는 것은 그렇다면 ‘백인에게 편파적’인 것이고 다른 이들을 적대시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즉,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의 논리로 모든 것을 바꾸려면, 다른 수많은 모든 것을 다 바꿔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차이를 인정하는 평등’의 관점에서, 즉 다문화주의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공론장에서의 심의와 토론, 터번의 안전성 문제처럼 과학적인 검증 등을 포함한 다각도의 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Parekh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일괄적이고 원칙적인 평등개념으로는 다문화가 실재하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평등만이 최고의 가치는 아님을 주장한다. 이 같은 논의는 종교를 둘러싼 ‘표현의 자유’문제로 확장된다. 그는 1988년 살만 루시디가 출간한 작품 『악마의 시』를 놓고 영국사회에서 벌어졌던 갈등, 그리고 그 논쟁의 전 세계적 확산 과정을 고찰하면서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악마의 시』를 옹호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다문화주의와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살만 루시디는 일종의 소설에 대한 소설(meta-novel)로서 『악마의 시』를 썼고, 주로 경전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려고 하는 이슬람 성직 귀족 혹은 권력자들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작품을 썼지만, Parekh가 보기에 이는 ‘표현의 자유’로 옹호하기에는 선을 넘은 것이었다. 작품 속에서 모하운드(무하마드를 상징)는 일종의 ‘포주’로 묘사가 되기까지 하는데, Parekh가 보기에 이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 까지 옹호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앞서 ‘평등’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듯, ‘표현의 자유’역시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Parekh는 다만, 살만 루시디의 작품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루시디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등의 양상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논점들을 파악해 이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처음에 영국 내 무슬림들의 출간 반대 시위에 우호적이었던 다른 종교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의 여론이 급격히 돌아서게 된 계기, 즉 책을 불태운 사건 등을 살펴보면서, 만약에 초기에 적극적으로 논쟁이 공론장에서 벌어지고 수용되는 형태였다면 좀 더 평화적인 해결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논쟁과 갈등의 과정에서 당사자들 상호간 이해가 부족했고 서로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 소통에 실패했다는 것 역시 문제로 제시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동원가능한 자원이 적은 소수자 집단의 경우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논쟁을 벌일 수 있다는 부분도 지적하면서 해결책을 제안한다. 다양한 제안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핵심적인 것 몇 개만 추리면, 우선 Parekh는 제도적인 공론장을 형성해 서로 다른 공동체/집단이 상호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논쟁적인 이슈들에 대해 토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정치적 심의의 과정은 서로의 감정과 가치, 정체성 등이 갖는 중요성을 인정하고 서로 간 문화적 배경과 문화 내적 합리성을 이해하려는 노력 하에서 진행돼야 한다. 다시 말해 Parekh는 ‘누군가의 특수한 문화적 규범과 이의 실행이 다른 이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문화적 차이가 최대한 평등하게 인정받고 배려 받으면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문화적 충돌과 분쟁’이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지식수준을 높이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다문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다문화주의 사회에서 공존과 평등을 위해서는 결국 방법론적으로 ‘일시적으로 불평등한 접근’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Parekh의 주장에 내재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다문화주의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는 것 역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예외적인 방법을 다양하게 적용하고 다른 문화를 가진 소수집단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면서 ‘집단의 권리’를 부여한다고 했을 때, 이를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한계를 짓기가 어렵고 합의도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다. 또한 시대적, 상황적 변화에 따라 합의의 조건들마저 변해갈 수 있기에 문제는 더 복잡하다. 풀어 설명하면, ‘문화적 차이’가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로 종교와 인종 등에 따라 갈라지는 각각의 문화와 이를 배경으로 가진 커뮤니티’를 전부 인정하고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어디까지, 무엇까지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데, 다문화주의는 그 해법을 제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주류 사회’, ‘다수 집단’이란 단순히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이들이 구현하는 가치 자체가 ‘한 사회 구성원이 헌법을 중심으로 다양한 법령과 규범을 통해 확립해 놓은 공동의 합의 체계와 신념체계’라는 뜻인데, 이러한 한 사회 구성의 핵심적인 합의를 바꿔나가는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에 대해 다문화주의 논리 자체로는 해결책을 내놓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인 Brian Barry는 이러한 맹점을 지적하며, Parekh의 주장 그리고 그와 궤를 같이하는 Iris Young, Will Kymlicka, 그리고 Charles Taylor 등 다문화주의자들의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와 공격을 반박하고 그들의 주장을 비판한다.
Barry는 먼저 자유주의에 가해지는 비판에 대해 강하게 반박하는데, Talyor 등에 의해 가해진 ‘차이를 무시한다’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분명 차이에 관심이 있는데, 다만 그 차이가 ‘경제적 격차’, ‘교육수준 격차’ 등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격차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세계적으로 점점 확산되는 불평등의 사례들을 근거로 들며, 다문화주의자들이 ‘독서 목록’에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작품을 넣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다양한 사회경제적 격차에 의한 대학 진학 불평등 문제는 챙기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자신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이 ‘다른 문화의 생존’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 수 있는 논리적 기반을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고 비판받지만,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오히려 되묻고 있다. 또한 ‘문화의 유지와 생존, 보호에 기반해 권리를 실현’한다는 개념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어 그는 Young의 비판에 대해서도 반박을 전개한다. Young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 뒤에 ‘동화정책’이 자리 잡고 있음을 비판하는데, Barry는 이 역시 오해라고 말하며 자유주의자들은 ‘다양성 유지’와 ‘동화’의 적정한 수준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제도 안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 말한다. 오히려 다문화주의자들이 종교와 인종 등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 자체가 ‘차이를 만들어내는’ 작용이 있다며, 다른 집단에 속한 사회 구성원이 다른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갖고 특정 그룹을 위한 공공정책이 시행되는 것 역시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자유주의자들이 이민자들에게 ‘동화’를 요구하는 것은 자유민주국가의 공공정책으로서 정당한 것이며, 다만 그것이 ‘자발적’이라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어떤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핵심이기에, ‘동화’ 자체는 핵심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지만 ‘자발적 동화’를 반대할 이유 역시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Barry는 또 미국과 영국의 역사적 사례를 들며 특정 인종이나 종족,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특수한 문화가 더 이상 ‘이방인의 것’으로 취급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흡수된 것을 볼 때, 문화란 것이 문제의 핵심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또한 누구의 후손이냐가 ‘국민 혹은 국가성(nationality)’에 영향을 줘선 안 되며, 중요한건 ‘시민적 국가성’이라고 말한다. Barry가 보기에 다문화주의가 갖는 함정은, 소수자 그룹에게 공공의 기능을 양도함으로서 사회 자체가 통합이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Barry는 철저하게 기회의 균등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하지만, 결과의 평등을 ‘그룹’에 따라 맞춰줘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문화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룹’이라는 것 역시 쉽게 각각 하나로 묶이기 어려운 것이라며, 예를 들어 사회적 소수자이자 약자로서 ‘장애인 집단’을 설정한다 해도,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기에 적절하게 정의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문화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문화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다른 많은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집단을 결정하는 것이 돼야하는 지를 문제 삼는다. Young이 비록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구조적 차별’과 ‘적응된 선호’ 등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Barry가 보기에는 공정한 기회와 분배에 집중해 차이를 줄여나가며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Barry는 이어 다문화주의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비판으로 나아간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념이 성공적인 정책처럼 보이는 이유는, 오히려 일반적 원칙에 따른 논쟁 자체가 거의 막힌 상태에서 공중(대중)과 유리된 채 막후에서 일부 정치가들과 학자들에 의해 협상이 이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한 국가 내에 다양한 민족이나 문화가 있고 이러한 집단들이 보편적인 법의 적용으로부터 상당한 면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며 그들의 전통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인데, Barry가 보기에 이는 민주국가에서는 공공영역에서 전체 공동체 안에서의 논의를 거쳐 결정이 이뤄져야한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는 민주국가에서 특정한 그룹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결정조차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공공영역에서 이뤄져야하는 것이지 특정 집단내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Barry는 종교적 의식에 따라 벌어지는 ‘잔혹한 도축’에 반대하는 비율이 79%에 이르며, 시크교도들이 오토바이 운전시에 터번으로 헬멧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 여론이 69%에 이르는 것 등을 예로 들면서, 다문화주의가 다수결 원칙에 기반한 민주주의 원칙을 사실상 침해하는 것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차이의 정치’를 강조하기 보다는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해 공동 운명체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간의 ‘연대의 정치’가 만들어져야함을 주장한다. 또한 Barry는 다시 한 번 ‘문화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면서, 모든 것을 ‘문화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 많은 불이익이 소수집단의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호도하며 실제 경제적, 지리적 요인 등에 의해 존재하는 불이익과 차별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Kymlicka가 출발점에서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퀘백의 프랑스어 사용 소수집단에 대해 더 큰 힘을 줘야한다는 등의 주장을 하지만, 이 경우에도 다른 구분되는 문화를 배경으로 가진 이들이 겪는 불이익에 대해서는 다 적용할 수 없을 것이고 문화는 결국 ‘문제의 핵심’도 아니고 ‘해결책’도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나아가 집시 문화를 가진 이들이 아이를 정규교육 과정에 넣지 않는 것, 강제된 결혼, 여성 할례 등의 문제마저 옹호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히려 각 개인이 평등한 권리를 박탈하고 차별과 소외를 보호하는 상황마저 만들 수 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다문화주의는 오히려 중요한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는, 즉 ‘불평등의 색깔’만 바꿔 특정한 문제에만 천착하게 만듦으로써, 어떤 수혜도 받지 못하는 ‘비소수자 그룹’를 패배자로 만드는 차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Barry의 논의를 통해 살펴봤듯, 문화적 차이가 곧 차별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 분명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사회경제적 격차가 차별로 이어지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문화적 소수자로서 당할 수 있는 차별’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포괄적 열쇠이자 해법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문화주의와 자유주의는 영원히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이념이자 철학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양한 문화의 공존, 인종과 종교 등에 기반해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들이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사실 자유주의 안에 내재해 있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확장은 그 자체로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금지’ 담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자체로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의 확장은 ‘다문화 공존’과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적 차이에 따른 차별 금지’의 출발점은 될 수 있지만, Barry가 주장하는 대로 자유주의가 상정하는 기회의 균등과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에 대한 존중만으로 일거에 모든 차별과 불이익을 해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문화적 차이를 ‘특수성’과 ‘상대주의’로 인정해줄 수는 없다. 다수의 다문화주의자들이 ‘여성할례’와 ‘강제결혼’, ‘아동에 대한 미교육’ 등을 ‘다른 문화이기에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는 서로 다른 문화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최근 다문화주의 담론이 상호문화주의의 형태로 발전해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반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을 추상적으로 상정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존재한다. 자유주의가 갖는 맹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예를 들어 소수자 집단에 속해있고,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을 때, 자유주의적 평등의 원칙만으로는 문화적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필연적 차별을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앞서 Parekh가 제시한 ‘아시아계 구직자들의 면접 사례’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일부 문화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주류 서구 문화보다 조금 더 심한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커뮤니티’ 자체를 해체해버릴 경우 그녀는 소수문화와 종교 출신자로서 갖는 차별에 더해, 서구 주류 문화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종적 차별 등 차별의 이중-삼중고를 그대로 맞닥뜨려야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갖는 집단’의 존재와 그 집단의 영향력 자체가 갖는 ‘보호의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Barry가 상정하는 ‘추상적인 수준에서의 보편적 인간’의 관점에서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원칙이 분명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문화적,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있고 이에 따른 특수성을 갖고 있다. 가장 자유주의가 확산돼 받아들여지고 평등이 구현된 서구 선진사회라 하더라도 피부색과 종교, 문화적 차이에 따른 편견과 차별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는 때로는 사회경제적인 격차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별개의 문제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좀 더 쉽고 실현 가능한 방법은 추상화된 ‘개인 간의 연대’보다는 최소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의 요구와 집단 간의 협의 과정일 수 있다. Barry 등 자유주의자들은 다수 여론의 지지, 다수결의 원칙에 위배돼 진행돼 온 다문화주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다소 모순적이다. 문화적 소수 집단이 ‘다수가 아니기에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문화주의 정책을 ‘다수의 여론’과 결부시킨다는 건 논리적 설득력이 약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Barry 등의 자유주의자가 현재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성 소수자 차별 금지’ 등의 이슈 역시 예전에는 다수의 지지를 받고,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이해가 쉬울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Barry는 이를 비판했지만, 여러 다양한 다문화주의 정책은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권 내에서 소수 정치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각 집단을 대변하는 리더들에 의해서 결정됐을 수 있다. 다수결 기반의 기존 제도만으로는 문제를 애초에 해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 (다수 집단에 의한) 사회적 반발을 줄일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 ‘차별에 대한 금지’와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확장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자유민주국가의 다수결 원칙과 기회균등 강조와 차별 금지, 자유로운 개인의 상정 등 기본적인 원칙은 유지하되, 글로벌화 과정에서 점점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집단이 공존하는 현 상황에서 상호간의 이해를 높이는 제도적 공론장의 형성을 통해 기존의 ‘단일한 가치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국가’의 개념을 보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른 질문에 대한 답안지 역시 전기공학도님의 사고의 확장에 도움이 될 듯 하여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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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iscuss cultural rights in the context of globalization with foucs on Kymlicka, Agustin, Huntington, Edrem, Parekh and Leggard.
‘이해관계의 충돌’과 ‘오해의 충돌’, 그리고 ICD(Intercultural Dialogue)의 가능성
2001년 미국에 가해진 9.11 테러를 ...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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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iscuss cultural rights in the context of globalization with foucs on Kymlicka, Agustin, Huntington, Edrem, Parekh and Leggard.
‘이해관계의 충돌’과 ‘오해의 충돌’, 그리고 ICD(Intercultural Dialogue)의 가능성
2001년 미국에 가해진 9.11 테러를 ... 더 보기
다른 질문에 대한 답안지 역시 전기공학도님의 사고의 확장에 도움이 될 듯 하여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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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iscuss cultural rights in the context of globalization with foucs on Kymlicka, Agustin, Huntington, Edrem, Parekh and Leggard.
‘이해관계의 충돌’과 ‘오해의 충돌’, 그리고 ICD(Intercultural Dialogue)의 가능성
2001년 미국에 가해진 9.11 테러를 시작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잊을만하면 벌어진 자살폭탄테러, 그리고 최근 2015년 1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총기 난사와 파리 전역에서 펼쳐진 ISIS의 테러 등은 세계 전체를 불안으로 몰아넣는 한편, 1993년 Samuel Huntington이 제기한 ‘문명의 충돌’론을 매번 다시 논쟁의 영역으로 불러내고 있다. 탈냉전 이후의 세계는 진정 종교와 민족, 종족과 인종 그리고 역사적 배경의 차이에 따른 ‘문명의 충돌’이 더욱 격화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관한 논의에 앞서 먼저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론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Huntington은 냉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에서 갈등의 근본적 원천은 ‘문화’가 될 것으로 보며, 세계 정치 전반을 바로 ‘문명의 충돌’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 설명한다. Huntington은 문명을 문화적 집단화(cultural grouping)의 가장 높은 단위로 보며, 언어, 역사, 종교, 관습, 제도 등과 같은 객관적 구성요소와 자기 정체성과 같은 주관적 요소로 구성되는 것이라 본다. Huntington이 문명 간 충돌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명 간 차이는 실재하고 아주 원초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역사, 언어, 문화, 전통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다른 종교에 근거한 차이로 이는 아주 근본주의적이다. 둘째, 세계 자체가 더 작아지고 가까워지고 있어 상호교류와 작용이 발생하며,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명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셋째, 경제적 근대화와 사회적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면서 예전의 지역적 정체성으로부터 사람들이 분리되고 있다. 국민국가에 소속됐다는 정체성도 약해졌고, 종교는 그 빈 자리를 메우며 ‘근본주의’의 형태로 종종 등장했다. 넷째, ‘문명에 대한 자각 혹은 인식’은 현재 서구가 그 권력의 정점에 있는 동시에 그 결과로 ‘뿌리로 돌아가자’는 현상이 비 서구 문명에서 존재함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다섯째, 정치적 갈등 혹은 경제적 갈등에 비해 문화적 특성과 차이는 잘 변하지 않고 그래서 더더욱 타협의 여지가 적다. 여섯째, 경제적 지역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같은 문명권내에서의 경제적 관계 확장이 일어나는 반면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경우 이러한 통합은 방해받는다. 즉, 같은 문명권에 있으면 경제적 통합까지 자연스레 이어진다. Huntington은 이 같은 6가지 문명 충돌 발생 근거를 제시한 뒤 문명 간 ‘단층’이 존재하며 이것이 냉전시기 존재했던 정치적, 이념적 분할을 대체할 것이라 봤다. 이미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등장했고, 1차 걸프 전쟁은 많은 아랍인들에게 사담 후세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같은 문명권에 속한 집단이나 나라들은 다른 문명권과의 전쟁이나 갈등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문명권의 편에 서는 행태가 벌어지고, 예전에 하나로 통합돼 있었으나 내부에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국가는 다시 쪼개지기도 하는 상황이 되면서 갈등양상은 복잡해진다는 설명이다. Huntington은 7~8개의 문명으로 전 세계를 구분한 후, 이슬람 문명과 유교문명(사실상 당시 미래의 위협으로 부상 중이던 ‘중국’을 의미)의 연합과 이에 따른 위협을 말하면서, 서구의 문명이 자신의 문명과 가까울 수 있는 중남미와 일본 문명 등과 함께 이러한 도전을 막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 주장은 이후 ‘학계의 충돌’이라 불릴 정도로 국제정치학계와 정치철학계의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 사이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반박도 나왔다. 9.11 테러 이후 ‘문명 충돌론’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끌게 되는 상황에서 Engin Edrem은 Huntington 주장의 맹점과 오류에 대한 그간의 비판을 모아 정리하는데, 그 핵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Huntington의 주장은 그 자체로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비판자들은 갈등의 주된 원인은 문명의 충돌이 아닌 ‘이해관계의 충돌(clash of interests)’에 가깝다고 반박한다. 또 다른 비판은 Huntington이 문명을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고 있으며 문명 내부의 차이와 갈등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방법론적 약점과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 그리고 서구 외의 문명을 ‘타자화’하는 태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험적 검증의 실패 등이 지속적으로 문제로 제기됐다.
Edrem은 이 같은 비판에 더해, 서구 특히 미국이 보여준 10여 년간의 ‘이중 잣대’, 즉 ‘서구나 미국의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지역에서의 분쟁이나 문제’에는 강력하게 개입하고 ‘보편적 서구 근대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우면서도 그 외의 지역에는 무관심했거나 사태를 외면했던 것, 또한 같은 이슬람 문화권 내의 갈등이나 문제라 하더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대처를 달리했던 문제’ 등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피상적으로 바라보면 마치 ‘문명의 충돌’ 혹은 ‘종교와 문화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실 ‘이해관계의 충돌’에 가까웠다는 얘기다.
필자가 보기에도 Huntington의 주장 자체는 사실 그 내적 오류가 많았다. 왜 다른 문명권인 이슬람과 유교문명이 단지 ‘반서구’의 이름으로 쉽게 연합할 수 있는 것인지, 중남미와 일본 문명은 무슨 근거로 서구문명과 가까운 것인지 등에 대한 해명은 없이 사실상 ‘탈냉전기 새로운 위협’으로서의 이슬람과 중국을 상정하고 ‘적을 먼저 만드는’ 자기 충족적 예언의 이론이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9.11 테러, 2005년과 2006년 덴마크 <율란츠 포스텐>지와 다른 서구 신문에 실린 ‘무하마드 만평’과 반대 시위와 테러, 그리고 탈레반과 IS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등장 속에서 그의 논의는 다시 한 번 다각도로 재조명받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문명의 충돌’인 것처럼 보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이후 더욱 극단화한 이슬람 근본주의자 단체들의 거듭된 테러와 전쟁 그리고 가장 최근에 등장한 ISIS(혹은 다에시)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Huntington의 예측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해 보인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양상을 볼 수 있다. 세계는 지속적으로 각종 테러와 전쟁, 국지적 분쟁 등에 시달리고 있으나 이는 Huntington이 예측한 ‘거대한 문명의 충돌’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다. 같은 문명권 내에서의 갈등도 빈번하며, 지역 내 종족 간 혹은 종교 내외부간 갈등과 분쟁은 그리고 테러와 전쟁의 지속은 ‘문명의 충돌’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갈등의 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거대한 ‘공통 문명 간’의 연합 보다는 각 국민국가나 특정 지역 내에서의 소수/다수 집단 간 갈등이 더욱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문명의 충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Huntington을 비판했던 학자들의 지적처럼 ‘이해갈등의 충돌’에서 시작된 다양한 분쟁과 갈등은 ‘오해의 충돌(clash of misunderstanding)’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를 지원했었다는 사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알카에다가 탄생했다는 사실, 또 다른 냉전의 축이었던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탈레반 등장의 연계성, 이슬람교 내의 시아파와 수니파의 역사적이고 뿌리 깊은 갈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문명화된 서구인’들은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하고는 굳이 그런 배경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정치와 종교도 분리하지 못한’, 아직은 미개한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이슬람 문화권의 서구 문명에 대한 테러와 도전이 존재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다른 맥락 하에서 존재했던 다양한 전쟁과 테러는 오직 가장 단순화돼 이해하기 쉬운 ‘문명의 충돌’로 보일 뿐이었다. 이는 다시 ‘오해의 충돌’로 번져간 것으로 보인다. 서구 자유주의의 제도와 사고방식 내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표현의 자유를 통해 이슬람교와 무슬림 전체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표현의 자유는 그만큼 지켜질 필요가 있고 중요한 가치임에는 분명하지만, ‘서구 자유주의’의 인식론과 궤를 달리하는 사고와 문화를 가진 이들에게 이는 분명한 ‘상처’와 ‘공격’이 될 수 있다는 걸 서구는 인식하지 못했고, 다른 문명, 특히 이슬람교도들은 이를 또 다시 오해했다. 즉, 서구에서 늘상 벌어지는 성역 없는 조롱과 비판과 풍자를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슬람교 전체’와 무슬림 전체를 뭉뚱그려 하나로 생각한 오해, 그리고 무슬림들이 서구적 자유주의의 사고체계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당연히 그렇게 해학과 풍자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오해, 그리고 무슬림 입장에서는 서구 자유주의가 중시하는 ‘표현의 자유’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일상적인 풍자와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오해는 점점 커져갔고, 이는 같은 문명권 내의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덮어 마치 전 세계가 문명의 충돌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를 만들어냈다. 이와 관련해 가장 극적인 갈등을 빚은 사태는 앞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는 <욜란츠 포스텐>지의 무하마드(마호메트) 만평 파문이다. 이슬람의 위대한 예언자로 추앙받는 무하마드가 폭탄으로 된 터번을 쓰고 있거나, ‘처녀가 부족하니 그만 천국에 오라’(코란에는 순교할 경우 천국에서 많은 처녀들과 잠자리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풍자함)는 메시지 등을 담은 만평이 난관 끝에 공개가 됐고,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수많은 유럽 언론에 의해서 <욜란츠 포스텐>지의 만평이 전 유럽에 공개됐다. 당연히 무슬림의 반발도 엄청났다. Laegaard는 이 만평 파문과 관련해 벌어진 논란에서 드러난 다양한 종류의 규범적 해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관점(법적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적 관용, 전투적 자유주의), 관용의 관점(자유주의적 관용과 사회적 관용), 그리고 시민정신과 인종차별, 존중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규범적 해석이 논쟁의 성격을 재규정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규범적 해석들은 논쟁에 임하고 대처하며 사회적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규범적 원리를 제안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인식론과 이론적 프레임 자체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이 같은 논란에 대한 평가와 분석 뿐 아니라 해법 역시 완전히 다르게 제시하게 된다. 지나치게 격화되는 논쟁에는 바로 다양한 규범적 해석의 문제가 존재하며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단순히 ‘맥락적 해석’으로도 풀리기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aegaard는 다양한 입장의 존재 자체를 중시하면서 ‘자기검열’이 강화되는 것 자체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Parekh는 이와 약간 다르게 ‘혐오 발언’의 관점에서 ‘만평 논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우선 그는 ‘혐오 발언’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한다. 혐오 발언이란 구체적 특징이나 특성들의 집합 즉 인종이나 종족, 성별, 종교, 민족, 혹은 성적지향 등에 대해 혐오를 부추기고 표현하고 인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Parekh는 다시 혐오 발언의 세 가지의 필수적 특성을 설명한다. 첫째, 혐오 발언은 구체적이고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집단이나 개인을 향한다. 둘째, 표적이 된 집단을 낙인찍는다. 셋째, 표적이 된 집단에 대한 적대감은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 정당화된다. Parekh는 특히 이러한 혐오발언이 반드시 욕설이나 공격적이고 학대적인 어휘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이뤄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표현의 자유’가 갖는 중요한 가치를 절대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서 Parekh는 표현의 자유가 자연권 적이고 모든 가치에 앞서는 권리로 ‘혐오 발언’마저 인정하는 형태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이제 이러한 ‘혐오 발언’이 법적인 제재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혐오 발언’ 자체는 당장의 모욕이나 상처 등을 넘어서 혐오의 대상이 된 소수자집단에게 지속적인 물리적/심적 피해를 야기할 수 있고, 아무런 제재가 없이 퍼져나갈 경우 ‘혐오 발언’이 혐오 발언이 아닌 것처럼 인식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논의하고 있는 ‘무하마드 만평 사태’가 주는 어려움처럼, ‘풍자’와 ‘혐오 발언’의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회적 공론장에서의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우선적으로는 공격이나 혐오의 대상이 된 집단이 스스로 자신들이 선택해 형성한 집단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종’이나 ‘출신지역’처럼 우연적으로 속하게 된 집단인가를 기준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준을 세운다고 해서 바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도 아니다. ‘무하마드 만평 논란’에서도, 다수의 무슬림들이 무슬림이 된 과정 자체가 과연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쉽게 ‘법적 제재’를 적용하는 것도, 무조건적으로도 ‘표현의 자유’와 풍자의 영역에서 옹호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사회적 공론장에서 각 집단 간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허심탄회하게 서로 소통하면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이는 앞서 설명했듯 ‘이해관계의 충돌’을 넘어서는 ‘오해의 충돌’을 만들어냈으며 결론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문명의 충돌’이 존재하는 듯 한 착시효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동안 각 지역 내에서의 문화 간 갈등, 종교 간 갈등과 특정 종교 내부에서의 갈등, 종족간 분쟁 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유럽의 다문화주의는 단순히 ‘분리시켜 공존’하는 방식에서 ‘시민적 통합’과 ‘반차별 정책’으로의 수렴을 통해(비록 그 배경에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분절화 시켜 노동시장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할지라도) 많은 개선을 이뤄왔다. Kymlicka는 유럽의 다양한 국제기구 등에서 ‘소수민족(national minority)’과 ‘원주민’의 자치권 보장과 권리보호 등의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지점들을 중심으로 무엇이 실패했고 무엇이 성공적이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우선 1989년 이후 UN이 ‘베스트 프랙티스’ 혹은 ‘모범 사례’로 지정해 공식적으로 알리고 교육해온 내용들부터 짚어내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많은 활동가와 학자와 지식인들, 그리고 정치가들이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만들어내는 진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을 먼저 설명한다. 그러나 많은 탈식민국가들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에 대한 저항이 존재했는데, 이에 대한설명을 통해 기존 ‘베스트 프랙티스’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Kymlicka는 탈 식민국가들에서 앞서 언급한 문제가 발생한 요인들을 제시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효과적인 인권 프레임워크와 정치적 문화가 부재한 관계로 인권의 보장 자체가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지역적인 불안이 존재했는데, 소수자 집단이 ‘출신 국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향을 보이거나 외부의 적대적 집단과 손을 잡는 등의 위협도 존재했다. 셋째로는 국제 공동체 자체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다. 소수 집단의 권리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서구의 음모로 받아들이는 경우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특이한 식민주의의 유산 역시 존재했는데, 수적으로 소수였던 종족이 식민지 시대에는 식민지 본국에 충성하는 지배 계급이었고(식민지 본국의 의도에 따라), 탈식민 이후에는 다시 소수자의 지위로 돌아감으로써 ‘과거 보상’의 측면에서도 서구적 개념의 소수자 보호와는 맥락이 맞지 않는 상황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인구통계학적인 문제도 있다. 많은 경우 탈식민 국가에서는 특정 종족이나 인종의 비율이 20~30% 이상 되지 않아 역시 누가 누구에게 통합되고 동화되는 것 자체가 애매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과 요인들을 살펴보면, 왜 서구적 관점의 다문화주의, 특히 ‘모범적인 사례’ 위주로 구성된 내용의 전파가 라틴 아메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성공적이지 못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국제기구들은 국가와 소수자간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UN의 규범 특히 원주민을 타켓으로 한 규범과 기준(standard)의 전파에 나서게 된다. Kymlicka가 보기에 이렇게 UN차원에서 강력하게 제시된 ‘원주민’에 대한 보상과 자기결정권/자치권 등의 보장(주로 미국과 중남미에서 벌어진)은 꽤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줬다. 그러나 역시 동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발생한 ‘소수민족’문제는 유럽 중심의 많은 국제기구들이 그저 ‘포괄적인 권리 보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실질적인 진보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Kymlicka는 따라서 많은 소수 민족들이 스스로를 ‘원주민’으로 재 개념화하고, 정체성의 변경을 꾀하면서 자치권이나 자기결정권 보장, 역사적인 피해에 대한 보상 등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다시 원주민에 대한 권리보장과 보상에서의 진보를 더디게 하는 양상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권의 이중잣대 문제 역시 함께 제기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현재 제기되는 이 같은 문제는 유럽과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이 처해있는 딜레마에 기인하고 있다. 서구권 국가들이 자신들의 신대륙 이주 과정에서 가혹한 피해를 입은 ‘(그들이 애초에 정의한)원주민’의 경우, 그들이 원하는 자치권의 보장과 충분한 보상을 해주는 것 자체가 신대륙 국가들이 가진 국가의 응집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부채’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경제적인 부담 역시 크지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유럽의 분할 통치를 통한 식민지 지배와 사회주의권에 의한 강제통합,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이중 약속’ 등에 의해 불거진 아시아와 아프리카, 동유럽과 중동지역에서의 종족/인종/민족/종교 갈등은 원주민 문제 처리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해나가기에는 부담이 크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게 바로 딜레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테러와 분쟁과 갈등은 지속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기존의 다문화주의 정책도 제대로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고, 국제기구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탈식민국가와 중동지역 그리고 구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에서의 복잡한 갈등과 분쟁 역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다. Huntington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과는 양상이 분명 다르지만, 폭력과 테러, 분쟁과 전쟁이 상존하는 현 상황에서 많은 난민이 지속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고 있다. 유로존 경제 자체의 필요성에 의해 합류한 탈식민지역의 노동자들로 인해 유럽 내에서는 소수자문제,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 기존 주류사회와의 갈등문제가 불거졌고, 각 국가들은 ‘동화정책’이나 ‘다문화주의 정책’ 등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역시나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진정 ‘다문화주의의 가치’는 구현이 어려운 것일까. 이와 관련해 Agustin은 Council of Europe(CoE)과 European Commission(EC)에서 2000년대 들어서 각기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정책 혹은 ‘도구’인 상호문화주의적 대화(Intercultural Dialogue: ICD)가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ICD의 아이디어 자체는 CoE가 1990년대에 제안한 ‘상호문화주의’에 개념과 관련돼 있다. 서로 다른 문화의 공존에는 대결 대신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범위를 제한하지 말고 완전히 개방해야한다는 것 등이 그 핵심 개념이다. CoE의 개념은 이처럼 명확하지만 EU의 EC에서 제시된 개념은 기존의 다문화주의를 거부하고 유럽적 가치로의 통합에 좀 더 방점을 찍는 특성이 있다. 기존의 다문화주의가 ‘다수 대 소수’의 관점에서 문화의 비교불가능성과 평행적 공존을 주로 내세웠다면, ICD는 ‘보편 대 단일’의 관점에서 문화 간 대화를 통한 사회통합, 특히 공유된 공통의 가치를 통한 통합을 중시하는 측면이 있다. Agustin은 동화정책이 갖는 배타성과 강제의 문제, 기존 다문화주의 정책이 갖는 사실상의 ‘분리’와 ‘상호 몰이해’, 그리고 ‘지나친 상대주의로 인한 공동가치의 상실’등을 ICD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지 살핀다. 그리고 CoE에 의해 제안된 좀 더 구체적인 ‘정책지향’이자 ‘대안’으로서의 ICD를 활용하는 한편 EC에 의해 제안된 ICD의 장점을 취하고 한계를 극복한다면, 기존의 실패한 두 정책, 즉 동화정책과 다문화주의 정책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ICD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기본적인 공통 가치를 전제한 후, 국가 내에서는 물론 유럽 전체 차원에서, 또한 확장해보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까지 ‘공론장 확보’와 ‘대화와 협력’ 등을 촉진하고 문화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다. 물론 결국은 ‘동화 정책’으로 귀결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최대한 개방된 대화의 장이 열려있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하다. 오히려 ICD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실현 가능성일 수 있다. ‘경제적 이해관계’ 문제부터 종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첨예한 가치와 세계관의 충돌 등이 그 같은 ‘이상적’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ICD에 관한 논의는 기존의 동화정책과 다문화주의 정책의 문제와 장점을 모두 취하면서, ‘문명 충돌론’이 갖는 한계 즉, ‘대결적이고 현실주의에 쏠린 정책 처방과 대안의 국제정치적 접근’까지 넘어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주목할 만하다. 현존하는 모든 ‘현실적인 처방과 대안’도 사실 처음 세상에 등장해 토론과 논쟁의 대상이 됐을 때에는 ‘이상적인 담론’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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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iscuss cultural rights in the context of globalization with foucs on Kymlicka, Agustin, Huntington, Edrem, Parekh and Leggard.
‘이해관계의 충돌’과 ‘오해의 충돌’, 그리고 ICD(Intercultural Dialogue)의 가능성
2001년 미국에 가해진 9.11 테러를 시작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잊을만하면 벌어진 자살폭탄테러, 그리고 최근 2015년 1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총기 난사와 파리 전역에서 펼쳐진 ISIS의 테러 등은 세계 전체를 불안으로 몰아넣는 한편, 1993년 Samuel Huntington이 제기한 ‘문명의 충돌’론을 매번 다시 논쟁의 영역으로 불러내고 있다. 탈냉전 이후의 세계는 진정 종교와 민족, 종족과 인종 그리고 역사적 배경의 차이에 따른 ‘문명의 충돌’이 더욱 격화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관한 논의에 앞서 먼저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론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Huntington은 냉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에서 갈등의 근본적 원천은 ‘문화’가 될 것으로 보며, 세계 정치 전반을 바로 ‘문명의 충돌’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 설명한다. Huntington은 문명을 문화적 집단화(cultural grouping)의 가장 높은 단위로 보며, 언어, 역사, 종교, 관습, 제도 등과 같은 객관적 구성요소와 자기 정체성과 같은 주관적 요소로 구성되는 것이라 본다. Huntington이 문명 간 충돌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명 간 차이는 실재하고 아주 원초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역사, 언어, 문화, 전통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다른 종교에 근거한 차이로 이는 아주 근본주의적이다. 둘째, 세계 자체가 더 작아지고 가까워지고 있어 상호교류와 작용이 발생하며,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명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셋째, 경제적 근대화와 사회적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면서 예전의 지역적 정체성으로부터 사람들이 분리되고 있다. 국민국가에 소속됐다는 정체성도 약해졌고, 종교는 그 빈 자리를 메우며 ‘근본주의’의 형태로 종종 등장했다. 넷째, ‘문명에 대한 자각 혹은 인식’은 현재 서구가 그 권력의 정점에 있는 동시에 그 결과로 ‘뿌리로 돌아가자’는 현상이 비 서구 문명에서 존재함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다섯째, 정치적 갈등 혹은 경제적 갈등에 비해 문화적 특성과 차이는 잘 변하지 않고 그래서 더더욱 타협의 여지가 적다. 여섯째, 경제적 지역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같은 문명권내에서의 경제적 관계 확장이 일어나는 반면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경우 이러한 통합은 방해받는다. 즉, 같은 문명권에 있으면 경제적 통합까지 자연스레 이어진다. Huntington은 이 같은 6가지 문명 충돌 발생 근거를 제시한 뒤 문명 간 ‘단층’이 존재하며 이것이 냉전시기 존재했던 정치적, 이념적 분할을 대체할 것이라 봤다. 이미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등장했고, 1차 걸프 전쟁은 많은 아랍인들에게 사담 후세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같은 문명권에 속한 집단이나 나라들은 다른 문명권과의 전쟁이나 갈등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문명권의 편에 서는 행태가 벌어지고, 예전에 하나로 통합돼 있었으나 내부에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국가는 다시 쪼개지기도 하는 상황이 되면서 갈등양상은 복잡해진다는 설명이다. Huntington은 7~8개의 문명으로 전 세계를 구분한 후, 이슬람 문명과 유교문명(사실상 당시 미래의 위협으로 부상 중이던 ‘중국’을 의미)의 연합과 이에 따른 위협을 말하면서, 서구의 문명이 자신의 문명과 가까울 수 있는 중남미와 일본 문명 등과 함께 이러한 도전을 막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 주장은 이후 ‘학계의 충돌’이라 불릴 정도로 국제정치학계와 정치철학계의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 사이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반박도 나왔다. 9.11 테러 이후 ‘문명 충돌론’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끌게 되는 상황에서 Engin Edrem은 Huntington 주장의 맹점과 오류에 대한 그간의 비판을 모아 정리하는데, 그 핵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Huntington의 주장은 그 자체로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비판자들은 갈등의 주된 원인은 문명의 충돌이 아닌 ‘이해관계의 충돌(clash of interests)’에 가깝다고 반박한다. 또 다른 비판은 Huntington이 문명을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고 있으며 문명 내부의 차이와 갈등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방법론적 약점과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 그리고 서구 외의 문명을 ‘타자화’하는 태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험적 검증의 실패 등이 지속적으로 문제로 제기됐다.
Edrem은 이 같은 비판에 더해, 서구 특히 미국이 보여준 10여 년간의 ‘이중 잣대’, 즉 ‘서구나 미국의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지역에서의 분쟁이나 문제’에는 강력하게 개입하고 ‘보편적 서구 근대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우면서도 그 외의 지역에는 무관심했거나 사태를 외면했던 것, 또한 같은 이슬람 문화권 내의 갈등이나 문제라 하더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대처를 달리했던 문제’ 등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피상적으로 바라보면 마치 ‘문명의 충돌’ 혹은 ‘종교와 문화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실 ‘이해관계의 충돌’에 가까웠다는 얘기다.
필자가 보기에도 Huntington의 주장 자체는 사실 그 내적 오류가 많았다. 왜 다른 문명권인 이슬람과 유교문명이 단지 ‘반서구’의 이름으로 쉽게 연합할 수 있는 것인지, 중남미와 일본 문명은 무슨 근거로 서구문명과 가까운 것인지 등에 대한 해명은 없이 사실상 ‘탈냉전기 새로운 위협’으로서의 이슬람과 중국을 상정하고 ‘적을 먼저 만드는’ 자기 충족적 예언의 이론이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9.11 테러, 2005년과 2006년 덴마크 <율란츠 포스텐>지와 다른 서구 신문에 실린 ‘무하마드 만평’과 반대 시위와 테러, 그리고 탈레반과 IS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등장 속에서 그의 논의는 다시 한 번 다각도로 재조명받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문명의 충돌’인 것처럼 보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이후 더욱 극단화한 이슬람 근본주의자 단체들의 거듭된 테러와 전쟁 그리고 가장 최근에 등장한 ISIS(혹은 다에시)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Huntington의 예측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해 보인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양상을 볼 수 있다. 세계는 지속적으로 각종 테러와 전쟁, 국지적 분쟁 등에 시달리고 있으나 이는 Huntington이 예측한 ‘거대한 문명의 충돌’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다. 같은 문명권 내에서의 갈등도 빈번하며, 지역 내 종족 간 혹은 종교 내외부간 갈등과 분쟁은 그리고 테러와 전쟁의 지속은 ‘문명의 충돌’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갈등의 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거대한 ‘공통 문명 간’의 연합 보다는 각 국민국가나 특정 지역 내에서의 소수/다수 집단 간 갈등이 더욱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문명의 충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Huntington을 비판했던 학자들의 지적처럼 ‘이해갈등의 충돌’에서 시작된 다양한 분쟁과 갈등은 ‘오해의 충돌(clash of misunderstanding)’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를 지원했었다는 사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알카에다가 탄생했다는 사실, 또 다른 냉전의 축이었던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탈레반 등장의 연계성, 이슬람교 내의 시아파와 수니파의 역사적이고 뿌리 깊은 갈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문명화된 서구인’들은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하고는 굳이 그런 배경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정치와 종교도 분리하지 못한’, 아직은 미개한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이슬람 문화권의 서구 문명에 대한 테러와 도전이 존재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다른 맥락 하에서 존재했던 다양한 전쟁과 테러는 오직 가장 단순화돼 이해하기 쉬운 ‘문명의 충돌’로 보일 뿐이었다. 이는 다시 ‘오해의 충돌’로 번져간 것으로 보인다. 서구 자유주의의 제도와 사고방식 내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표현의 자유를 통해 이슬람교와 무슬림 전체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표현의 자유는 그만큼 지켜질 필요가 있고 중요한 가치임에는 분명하지만, ‘서구 자유주의’의 인식론과 궤를 달리하는 사고와 문화를 가진 이들에게 이는 분명한 ‘상처’와 ‘공격’이 될 수 있다는 걸 서구는 인식하지 못했고, 다른 문명, 특히 이슬람교도들은 이를 또 다시 오해했다. 즉, 서구에서 늘상 벌어지는 성역 없는 조롱과 비판과 풍자를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슬람교 전체’와 무슬림 전체를 뭉뚱그려 하나로 생각한 오해, 그리고 무슬림들이 서구적 자유주의의 사고체계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당연히 그렇게 해학과 풍자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오해, 그리고 무슬림 입장에서는 서구 자유주의가 중시하는 ‘표현의 자유’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일상적인 풍자와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오해는 점점 커져갔고, 이는 같은 문명권 내의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덮어 마치 전 세계가 문명의 충돌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를 만들어냈다. 이와 관련해 가장 극적인 갈등을 빚은 사태는 앞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는 <욜란츠 포스텐>지의 무하마드(마호메트) 만평 파문이다. 이슬람의 위대한 예언자로 추앙받는 무하마드가 폭탄으로 된 터번을 쓰고 있거나, ‘처녀가 부족하니 그만 천국에 오라’(코란에는 순교할 경우 천국에서 많은 처녀들과 잠자리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풍자함)는 메시지 등을 담은 만평이 난관 끝에 공개가 됐고,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수많은 유럽 언론에 의해서 <욜란츠 포스텐>지의 만평이 전 유럽에 공개됐다. 당연히 무슬림의 반발도 엄청났다. Laegaard는 이 만평 파문과 관련해 벌어진 논란에서 드러난 다양한 종류의 규범적 해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관점(법적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적 관용, 전투적 자유주의), 관용의 관점(자유주의적 관용과 사회적 관용), 그리고 시민정신과 인종차별, 존중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규범적 해석이 논쟁의 성격을 재규정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규범적 해석들은 논쟁에 임하고 대처하며 사회적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규범적 원리를 제안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인식론과 이론적 프레임 자체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이 같은 논란에 대한 평가와 분석 뿐 아니라 해법 역시 완전히 다르게 제시하게 된다. 지나치게 격화되는 논쟁에는 바로 다양한 규범적 해석의 문제가 존재하며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단순히 ‘맥락적 해석’으로도 풀리기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aegaard는 다양한 입장의 존재 자체를 중시하면서 ‘자기검열’이 강화되는 것 자체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Parekh는 이와 약간 다르게 ‘혐오 발언’의 관점에서 ‘만평 논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우선 그는 ‘혐오 발언’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한다. 혐오 발언이란 구체적 특징이나 특성들의 집합 즉 인종이나 종족, 성별, 종교, 민족, 혹은 성적지향 등에 대해 혐오를 부추기고 표현하고 인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Parekh는 다시 혐오 발언의 세 가지의 필수적 특성을 설명한다. 첫째, 혐오 발언은 구체적이고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집단이나 개인을 향한다. 둘째, 표적이 된 집단을 낙인찍는다. 셋째, 표적이 된 집단에 대한 적대감은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 정당화된다. Parekh는 특히 이러한 혐오발언이 반드시 욕설이나 공격적이고 학대적인 어휘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이뤄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표현의 자유’가 갖는 중요한 가치를 절대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서 Parekh는 표현의 자유가 자연권 적이고 모든 가치에 앞서는 권리로 ‘혐오 발언’마저 인정하는 형태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이제 이러한 ‘혐오 발언’이 법적인 제재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혐오 발언’ 자체는 당장의 모욕이나 상처 등을 넘어서 혐오의 대상이 된 소수자집단에게 지속적인 물리적/심적 피해를 야기할 수 있고, 아무런 제재가 없이 퍼져나갈 경우 ‘혐오 발언’이 혐오 발언이 아닌 것처럼 인식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논의하고 있는 ‘무하마드 만평 사태’가 주는 어려움처럼, ‘풍자’와 ‘혐오 발언’의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회적 공론장에서의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우선적으로는 공격이나 혐오의 대상이 된 집단이 스스로 자신들이 선택해 형성한 집단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종’이나 ‘출신지역’처럼 우연적으로 속하게 된 집단인가를 기준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준을 세운다고 해서 바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도 아니다. ‘무하마드 만평 논란’에서도, 다수의 무슬림들이 무슬림이 된 과정 자체가 과연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쉽게 ‘법적 제재’를 적용하는 것도, 무조건적으로도 ‘표현의 자유’와 풍자의 영역에서 옹호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사회적 공론장에서 각 집단 간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허심탄회하게 서로 소통하면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이는 앞서 설명했듯 ‘이해관계의 충돌’을 넘어서는 ‘오해의 충돌’을 만들어냈으며 결론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문명의 충돌’이 존재하는 듯 한 착시효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동안 각 지역 내에서의 문화 간 갈등, 종교 간 갈등과 특정 종교 내부에서의 갈등, 종족간 분쟁 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유럽의 다문화주의는 단순히 ‘분리시켜 공존’하는 방식에서 ‘시민적 통합’과 ‘반차별 정책’으로의 수렴을 통해(비록 그 배경에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분절화 시켜 노동시장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할지라도) 많은 개선을 이뤄왔다. Kymlicka는 유럽의 다양한 국제기구 등에서 ‘소수민족(national minority)’과 ‘원주민’의 자치권 보장과 권리보호 등의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지점들을 중심으로 무엇이 실패했고 무엇이 성공적이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우선 1989년 이후 UN이 ‘베스트 프랙티스’ 혹은 ‘모범 사례’로 지정해 공식적으로 알리고 교육해온 내용들부터 짚어내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많은 활동가와 학자와 지식인들, 그리고 정치가들이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만들어내는 진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을 먼저 설명한다. 그러나 많은 탈식민국가들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에 대한 저항이 존재했는데, 이에 대한설명을 통해 기존 ‘베스트 프랙티스’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Kymlicka는 탈 식민국가들에서 앞서 언급한 문제가 발생한 요인들을 제시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효과적인 인권 프레임워크와 정치적 문화가 부재한 관계로 인권의 보장 자체가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지역적인 불안이 존재했는데, 소수자 집단이 ‘출신 국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향을 보이거나 외부의 적대적 집단과 손을 잡는 등의 위협도 존재했다. 셋째로는 국제 공동체 자체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다. 소수 집단의 권리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서구의 음모로 받아들이는 경우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특이한 식민주의의 유산 역시 존재했는데, 수적으로 소수였던 종족이 식민지 시대에는 식민지 본국에 충성하는 지배 계급이었고(식민지 본국의 의도에 따라), 탈식민 이후에는 다시 소수자의 지위로 돌아감으로써 ‘과거 보상’의 측면에서도 서구적 개념의 소수자 보호와는 맥락이 맞지 않는 상황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인구통계학적인 문제도 있다. 많은 경우 탈식민 국가에서는 특정 종족이나 인종의 비율이 20~30% 이상 되지 않아 역시 누가 누구에게 통합되고 동화되는 것 자체가 애매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과 요인들을 살펴보면, 왜 서구적 관점의 다문화주의, 특히 ‘모범적인 사례’ 위주로 구성된 내용의 전파가 라틴 아메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성공적이지 못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국제기구들은 국가와 소수자간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UN의 규범 특히 원주민을 타켓으로 한 규범과 기준(standard)의 전파에 나서게 된다. Kymlicka가 보기에 이렇게 UN차원에서 강력하게 제시된 ‘원주민’에 대한 보상과 자기결정권/자치권 등의 보장(주로 미국과 중남미에서 벌어진)은 꽤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줬다. 그러나 역시 동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발생한 ‘소수민족’문제는 유럽 중심의 많은 국제기구들이 그저 ‘포괄적인 권리 보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실질적인 진보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Kymlicka는 따라서 많은 소수 민족들이 스스로를 ‘원주민’으로 재 개념화하고, 정체성의 변경을 꾀하면서 자치권이나 자기결정권 보장, 역사적인 피해에 대한 보상 등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다시 원주민에 대한 권리보장과 보상에서의 진보를 더디게 하는 양상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권의 이중잣대 문제 역시 함께 제기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현재 제기되는 이 같은 문제는 유럽과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이 처해있는 딜레마에 기인하고 있다. 서구권 국가들이 자신들의 신대륙 이주 과정에서 가혹한 피해를 입은 ‘(그들이 애초에 정의한)원주민’의 경우, 그들이 원하는 자치권의 보장과 충분한 보상을 해주는 것 자체가 신대륙 국가들이 가진 국가의 응집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부채’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경제적인 부담 역시 크지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유럽의 분할 통치를 통한 식민지 지배와 사회주의권에 의한 강제통합,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이중 약속’ 등에 의해 불거진 아시아와 아프리카, 동유럽과 중동지역에서의 종족/인종/민족/종교 갈등은 원주민 문제 처리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해나가기에는 부담이 크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게 바로 딜레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테러와 분쟁과 갈등은 지속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기존의 다문화주의 정책도 제대로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고, 국제기구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탈식민국가와 중동지역 그리고 구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에서의 복잡한 갈등과 분쟁 역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다. Huntington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과는 양상이 분명 다르지만, 폭력과 테러, 분쟁과 전쟁이 상존하는 현 상황에서 많은 난민이 지속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고 있다. 유로존 경제 자체의 필요성에 의해 합류한 탈식민지역의 노동자들로 인해 유럽 내에서는 소수자문제,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 기존 주류사회와의 갈등문제가 불거졌고, 각 국가들은 ‘동화정책’이나 ‘다문화주의 정책’ 등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역시나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진정 ‘다문화주의의 가치’는 구현이 어려운 것일까. 이와 관련해 Agustin은 Council of Europe(CoE)과 European Commission(EC)에서 2000년대 들어서 각기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정책 혹은 ‘도구’인 상호문화주의적 대화(Intercultural Dialogue: ICD)가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ICD의 아이디어 자체는 CoE가 1990년대에 제안한 ‘상호문화주의’에 개념과 관련돼 있다. 서로 다른 문화의 공존에는 대결 대신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범위를 제한하지 말고 완전히 개방해야한다는 것 등이 그 핵심 개념이다. CoE의 개념은 이처럼 명확하지만 EU의 EC에서 제시된 개념은 기존의 다문화주의를 거부하고 유럽적 가치로의 통합에 좀 더 방점을 찍는 특성이 있다. 기존의 다문화주의가 ‘다수 대 소수’의 관점에서 문화의 비교불가능성과 평행적 공존을 주로 내세웠다면, ICD는 ‘보편 대 단일’의 관점에서 문화 간 대화를 통한 사회통합, 특히 공유된 공통의 가치를 통한 통합을 중시하는 측면이 있다. Agustin은 동화정책이 갖는 배타성과 강제의 문제, 기존 다문화주의 정책이 갖는 사실상의 ‘분리’와 ‘상호 몰이해’, 그리고 ‘지나친 상대주의로 인한 공동가치의 상실’등을 ICD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지 살핀다. 그리고 CoE에 의해 제안된 좀 더 구체적인 ‘정책지향’이자 ‘대안’으로서의 ICD를 활용하는 한편 EC에 의해 제안된 ICD의 장점을 취하고 한계를 극복한다면, 기존의 실패한 두 정책, 즉 동화정책과 다문화주의 정책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ICD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기본적인 공통 가치를 전제한 후, 국가 내에서는 물론 유럽 전체 차원에서, 또한 확장해보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까지 ‘공론장 확보’와 ‘대화와 협력’ 등을 촉진하고 문화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다. 물론 결국은 ‘동화 정책’으로 귀결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최대한 개방된 대화의 장이 열려있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하다. 오히려 ICD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실현 가능성일 수 있다. ‘경제적 이해관계’ 문제부터 종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첨예한 가치와 세계관의 충돌 등이 그 같은 ‘이상적’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ICD에 관한 논의는 기존의 동화정책과 다문화주의 정책의 문제와 장점을 모두 취하면서, ‘문명 충돌론’이 갖는 한계 즉, ‘대결적이고 현실주의에 쏠린 정책 처방과 대안의 국제정치적 접근’까지 넘어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주목할 만하다. 현존하는 모든 ‘현실적인 처방과 대안’도 사실 처음 세상에 등장해 토론과 논쟁의 대상이 됐을 때에는 ‘이상적인 담론’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1번에 관해서 말해보자면 이슬람의 교리 자체가 다른 대형 종교에 비해서 폭력성이나 극단주의자들을 더 잘 양산해낼 체제라고 볼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교리의 기본이 유대교와 기독교와 그 궤를 같이하는데 이 세가지 종교가 아주 다른 교인들을 뽑아 낸다는건 쉽게 이해하기 힘들죠.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시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무슬림이 집행한 폭력 사태와 비무슬림, 특히 백인이 집행한 폭력 사태를 미디어에서 커버하는 방법이 다르죠. 아직도 은연중에 "우리/백인/기독교인/유럽*서양 vs 너네/brown/무슬림"과 같은 구도가 ... 더 보기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시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무슬림이 집행한 폭력 사태와 비무슬림, 특히 백인이 집행한 폭력 사태를 미디어에서 커버하는 방법이 다르죠. 아직도 은연중에 "우리/백인/기독교인/유럽*서양 vs 너네/brown/무슬림"과 같은 구도가 ... 더 보기
1번에 관해서 말해보자면 이슬람의 교리 자체가 다른 대형 종교에 비해서 폭력성이나 극단주의자들을 더 잘 양산해낼 체제라고 볼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교리의 기본이 유대교와 기독교와 그 궤를 같이하는데 이 세가지 종교가 아주 다른 교인들을 뽑아 낸다는건 쉽게 이해하기 힘들죠.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시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무슬림이 집행한 폭력 사태와 비무슬림, 특히 백인이 집행한 폭력 사태를 미디어에서 커버하는 방법이 다르죠. 아직도 은연중에 "우리/백인/기독교인/유럽*서양 vs 너네/brown/무슬림"과 같은 구도가 문화적으로 자리잡고있다는 것을 쉽게 볼수있습니다. 백인이 그 어떤 종교적 극단주의를 명목으로 높은 폭력성을 띄어도 이를 종교나 국가나 인종의 문제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극히 적은편이죠. 옛날에 KKK가 미국에서 성행했을때 이걸 기독교가 문제다!라는 식의 레토릭은 서양에서 찾기 힘들었죠. 분명히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들먹이면서 극도로 폭력적인 일을 일삼았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저는 무슬림과 이슬람이 저런 테러리즘이나 폭력성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야한다, 하지 않는다라는 주장도 다 문제가있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찾아본 결과 무슬림들은 이런 테러리즘이 일어날때마다 가장 먼저 본인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조의를 표하는 자들이기도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 어택이 가해졌을때 제가 라이브로 뉴스를 따라 보고있었는데 그때에도 가장 먼저 입장을 표명한 범국가적 단체는 프랑스의 무슬림 집회였는데 방송에서 한마디만하고 후에 언급이 되지 않았죠. 그리고 현재 무슬림과 이슬람이 이런 폭력적 테러 단체와 연관되는 가장 큰 이유는 ISIS라고 볼수있을텐데요. ISIS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다름 아닌 다른 무슬림이죠. ISIS를 가장 싫어하는 것도 서양이나, 백인이나, 저 멀리 동아시아에있는 한국인이 아니라 본인들의 가족과, 집과, 도시와, 국가가 피폐해지고 삶이 송투리째 뒤엎어진 현재 전쟁 지역의 무슬림들이라는거죠. 세상에 저런 일 당하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물론 ISIS도 본인들 스스로 진짜 이슬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무슬림이기도하죠. 그냥 애초에 이슬람이라는 엄청나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상, 해석, 그리고 그로 인한 행동의 발현이되는 초대형 종교를 하나로 이해하려는 것이 애초에 잘못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많은 수의 무슬림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통계적으로는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받았을 확률이 높은 피해자들입니다. 하지만 그걸 보지 못하고 단지 큰틀에서 종교가 같다고 가해자들과 같이 엮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오류가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시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무슬림이 집행한 폭력 사태와 비무슬림, 특히 백인이 집행한 폭력 사태를 미디어에서 커버하는 방법이 다르죠. 아직도 은연중에 "우리/백인/기독교인/유럽*서양 vs 너네/brown/무슬림"과 같은 구도가 문화적으로 자리잡고있다는 것을 쉽게 볼수있습니다. 백인이 그 어떤 종교적 극단주의를 명목으로 높은 폭력성을 띄어도 이를 종교나 국가나 인종의 문제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극히 적은편이죠. 옛날에 KKK가 미국에서 성행했을때 이걸 기독교가 문제다!라는 식의 레토릭은 서양에서 찾기 힘들었죠. 분명히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들먹이면서 극도로 폭력적인 일을 일삼았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저는 무슬림과 이슬람이 저런 테러리즘이나 폭력성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야한다, 하지 않는다라는 주장도 다 문제가있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찾아본 결과 무슬림들은 이런 테러리즘이 일어날때마다 가장 먼저 본인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조의를 표하는 자들이기도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 어택이 가해졌을때 제가 라이브로 뉴스를 따라 보고있었는데 그때에도 가장 먼저 입장을 표명한 범국가적 단체는 프랑스의 무슬림 집회였는데 방송에서 한마디만하고 후에 언급이 되지 않았죠. 그리고 현재 무슬림과 이슬람이 이런 폭력적 테러 단체와 연관되는 가장 큰 이유는 ISIS라고 볼수있을텐데요. ISIS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다름 아닌 다른 무슬림이죠. ISIS를 가장 싫어하는 것도 서양이나, 백인이나, 저 멀리 동아시아에있는 한국인이 아니라 본인들의 가족과, 집과, 도시와, 국가가 피폐해지고 삶이 송투리째 뒤엎어진 현재 전쟁 지역의 무슬림들이라는거죠. 세상에 저런 일 당하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물론 ISIS도 본인들 스스로 진짜 이슬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무슬림이기도하죠. 그냥 애초에 이슬람이라는 엄청나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상, 해석, 그리고 그로 인한 행동의 발현이되는 초대형 종교를 하나로 이해하려는 것이 애초에 잘못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많은 수의 무슬림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통계적으로는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받았을 확률이 높은 피해자들입니다. 하지만 그걸 보지 못하고 단지 큰틀에서 종교가 같다고 가해자들과 같이 엮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오류가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는 것이 없지만 기왕에 글도 올라왔고 틀린 점이 있으면 지적도 받으며 배우기 위해서라도 몇자 달아봅니다.
사실 기독교도 성경 보면 골 때리는 구절이 많지만 점차적으로 세속화되며 작금에 이르른 것이지요. 그런데 이슬람은 이미 세속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그쪽의 주류가 되어버린 이상 이걸 깨기 힘들다고 봅니다.
http://www.pe... 더 보기
사실 기독교도 성경 보면 골 때리는 구절이 많지만 점차적으로 세속화되며 작금에 이르른 것이지요. 그런데 이슬람은 이미 세속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그쪽의 주류가 되어버린 이상 이걸 깨기 힘들다고 봅니다.
http://www.pe... 더 보기
저도 아는 것이 없지만 기왕에 글도 올라왔고 틀린 점이 있으면 지적도 받으며 배우기 위해서라도 몇자 달아봅니다.
사실 기독교도 성경 보면 골 때리는 구절이 많지만 점차적으로 세속화되며 작금에 이르른 것이지요. 그런데 이슬람은 이미 세속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그쪽의 주류가 되어버린 이상 이걸 깨기 힘들다고 봅니다.
http://www.pewforum.org/2013/04/30/the-worlds-muslims-religion-politics-society-beliefs-about-sharia/
보시면 느끼시겠지만 '무슬림국가 치고 세속화 된 나라'로 불리는 곳들도 생각보다 꽤 막장인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투브 댓글이였나 어디서 본 건지 모르겠는데 "A radical muslim wants to cut your head off, and a moderate muslim wants a radical muslim to cut your head off."라는 비아냥이 기억나네요. 어쨌든 확실히 그들이 경각심과 개선의지를 가져야 하는 건 맞다고 보입니다.
뭐 마지막 문단의 '이슬람이란 종교의 전반에 대해서 어떻게 인상'에 대해서 제 생각은 이 정도이고
1번은 이슬람 전체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봅니다. 이슬람교 자체가 극단주의자를 부추기는 교리상의 문제 같은 것이 없다고 볼 수 없지만, 그 정도가 그들 전체에 대한 비난가능성을 충족할 만한 정도까지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배교자를 죽이라는 것이나 지하드의 개념 등 문제가 좀 있긴 하지만 사실 주로 같이 비교되는 타 아브라함 계열 종교도 황당한 구절들이 많죠. 아주 예전 구절들을 현대화 시켜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즉, 세속화가 덜 되어서 나타나는 문제라 보고... 설문 등에서 심각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또 IS가 옳냐고 하면 아니라는 사람들도 꽤 있긴 합니다.
2번은 말이 안되는 변명이라고 봅니다. 당한 건 당한거고 지금 보이는 폐습들은 그런걸로 커버쳐질 수가 없어요. 애초에 그들의 폭력, 성차별 등의 주된 피해대상은 유럽인들도 있지만 자기 자신들이기도 한데요. 또 피해자 코스프레만 하는 것도 웃긴게 이슬람이 동로마랑 페르시아 털면서 자라났는데 맨날 당하기만 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죠. 애초에 타 메이저 종교들과 다르게 이슬람은 처음부터 종교창시집단이 정복과 싸움을 해가며 제국을 세워낸 케이스라 다른 종교의 발생-발달과정과 다르지 않습니까. 이베리아 반도도 침략해서 지배했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배경에 셀주크투르크의 패권질의 영향이 컸는데 왜 맨날 피해자 코스만 하는지...
3번은 '사실상 여자에게만 유독 엄격하고 여자들의 삶을 옥죄는 이슬람 스타일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원래 코란에도 남성을 유혹하지 않기 위해서 가족과 어린이 등등을 제외한 남성들 앞에서 싸매라고 되어있기도 하고. 그런데 타는 햇볕을 가리고 모래바람을 맞지 않기 위한 용도도 있다고 중동인들이 항변하고 있기도 하고 그냥 쓰고 싶어서 쓰기도 하니... 쓰는 사람 자신이 명시적으로 원해서 쓴다면 문제 없다고 봅니다. 이럴 경우 그 사람이 싫다고 마음 먹었을 때 마음대로 안 쓸 수 있어야겠죠.
사실 기독교도 성경 보면 골 때리는 구절이 많지만 점차적으로 세속화되며 작금에 이르른 것이지요. 그런데 이슬람은 이미 세속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그쪽의 주류가 되어버린 이상 이걸 깨기 힘들다고 봅니다.
http://www.pewforum.org/2013/04/30/the-worlds-muslims-religion-politics-society-beliefs-about-sharia/
보시면 느끼시겠지만 '무슬림국가 치고 세속화 된 나라'로 불리는 곳들도 생각보다 꽤 막장인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투브 댓글이였나 어디서 본 건지 모르겠는데 "A radical muslim wants to cut your head off, and a moderate muslim wants a radical muslim to cut your head off."라는 비아냥이 기억나네요. 어쨌든 확실히 그들이 경각심과 개선의지를 가져야 하는 건 맞다고 보입니다.
뭐 마지막 문단의 '이슬람이란 종교의 전반에 대해서 어떻게 인상'에 대해서 제 생각은 이 정도이고
1번은 이슬람 전체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봅니다. 이슬람교 자체가 극단주의자를 부추기는 교리상의 문제 같은 것이 없다고 볼 수 없지만, 그 정도가 그들 전체에 대한 비난가능성을 충족할 만한 정도까지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배교자를 죽이라는 것이나 지하드의 개념 등 문제가 좀 있긴 하지만 사실 주로 같이 비교되는 타 아브라함 계열 종교도 황당한 구절들이 많죠. 아주 예전 구절들을 현대화 시켜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즉, 세속화가 덜 되어서 나타나는 문제라 보고... 설문 등에서 심각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또 IS가 옳냐고 하면 아니라는 사람들도 꽤 있긴 합니다.
2번은 말이 안되는 변명이라고 봅니다. 당한 건 당한거고 지금 보이는 폐습들은 그런걸로 커버쳐질 수가 없어요. 애초에 그들의 폭력, 성차별 등의 주된 피해대상은 유럽인들도 있지만 자기 자신들이기도 한데요. 또 피해자 코스프레만 하는 것도 웃긴게 이슬람이 동로마랑 페르시아 털면서 자라났는데 맨날 당하기만 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죠. 애초에 타 메이저 종교들과 다르게 이슬람은 처음부터 종교창시집단이 정복과 싸움을 해가며 제국을 세워낸 케이스라 다른 종교의 발생-발달과정과 다르지 않습니까. 이베리아 반도도 침략해서 지배했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배경에 셀주크투르크의 패권질의 영향이 컸는데 왜 맨날 피해자 코스만 하는지...
3번은 '사실상 여자에게만 유독 엄격하고 여자들의 삶을 옥죄는 이슬람 스타일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원래 코란에도 남성을 유혹하지 않기 위해서 가족과 어린이 등등을 제외한 남성들 앞에서 싸매라고 되어있기도 하고. 그런데 타는 햇볕을 가리고 모래바람을 맞지 않기 위한 용도도 있다고 중동인들이 항변하고 있기도 하고 그냥 쓰고 싶어서 쓰기도 하니... 쓰는 사람 자신이 명시적으로 원해서 쓴다면 문제 없다고 봅니다. 이럴 경우 그 사람이 싫다고 마음 먹었을 때 마음대로 안 쓸 수 있어야겠죠.
히잡 착용과 관련해서, 쿠데타 실패 이후 터키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사회적·문화적 압력에 의한 히잡 착용이 과연 자의일까요?
[동아일보] 상류층 상징된 히잡… ‘神政일치 질주’ 불안 커져
http://news.donga.com/3/all/20160720/79285600/1
[동아일보] 상류층 상징된 히잡… ‘神政일치 질주’ 불안 커져
http://news.donga.com/3/all/20160720/79285600/1
1번 경우는 우리들 스스로가 어떠한 특정 집단이나 그룹에 대한 선입견을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ISIS 나 시리아 사태 등을 보면 강대국의 패권싸움에 이슬람 문화권이 새우등 터진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상상이상의 차별이 서구에서 이슬람 문화권을 향해 있는데요. 고향이 시리아인 동료에게 물어보았는데, 부모님 사는 동네는 평화롭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네 벗어나면 ISIS 가 공격하는 총격전이 벌어지는 곳이어서 딴세계라고 하는 걸 보면 정치적 불안때문에 ISIS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활동하기 좋게된것이지 그들 문화권이 원래 그렇... 더 보기
1번 경우는 우리들 스스로가 어떠한 특정 집단이나 그룹에 대한 선입견을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ISIS 나 시리아 사태 등을 보면 강대국의 패권싸움에 이슬람 문화권이 새우등 터진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상상이상의 차별이 서구에서 이슬람 문화권을 향해 있는데요. 고향이 시리아인 동료에게 물어보았는데, 부모님 사는 동네는 평화롭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네 벗어나면 ISIS 가 공격하는 총격전이 벌어지는 곳이어서 딴세계라고 하는 걸 보면 정치적 불안때문에 ISIS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활동하기 좋게된것이지 그들 문화권이 원래 그렇다거나 그런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추가하면 강대국 패권주의랑 이슬람 극단주의들때문에 일반국민들만 피해가 가는거라고 봐요. 1979년 이란혁명에 대해서 좀 공부하면 이해가 쉬울거라고 이란 동료가 이야기해주네요. 예전에는 프로 웨스턴에 서구적이었고 크리스챤도 많았는데 몽땅 바뀌어서 다들 탈출하고 폐쇄적이된거라고해요.
추가하면 강대국 패권주의랑 이슬람 극단주의들때문에 일반국민들만 피해가 가는거라고 봐요. 1979년 이란혁명에 대해서 좀 공부하면 이해가 쉬울거라고 이란 동료가 이야기해주네요. 예전에는 프로 웨스턴에 서구적이었고 크리스챤도 많았는데 몽땅 바뀌어서 다들 탈출하고 폐쇄적이된거라고해요.
제가 느낀 바들, 제 생각들을 간략히 써 봅니다.
1. 주어진 자료 자체들이 다 하나같이 빈약하고 편향되어 있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2. 무슨 맥락이든지 '극단'과 '테러'는 용납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3. 가해자 vs 피해자, 가해자의 후손 vs 피해자의 후손, 유산(이득+손해)의 상속 문제 등등.. 단순화하여 풀기 어려운 개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테러를 당한 당사자 그리고 그 당사자의 가족들 앞에서 이런 유산 어쩌구 하는 문제를 꺼내기는 좀 그렇다. 흠.. 인간이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4... 더 보기
1. 주어진 자료 자체들이 다 하나같이 빈약하고 편향되어 있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2. 무슨 맥락이든지 '극단'과 '테러'는 용납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3. 가해자 vs 피해자, 가해자의 후손 vs 피해자의 후손, 유산(이득+손해)의 상속 문제 등등.. 단순화하여 풀기 어려운 개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테러를 당한 당사자 그리고 그 당사자의 가족들 앞에서 이런 유산 어쩌구 하는 문제를 꺼내기는 좀 그렇다. 흠.. 인간이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4... 더 보기
제가 느낀 바들, 제 생각들을 간략히 써 봅니다.
1. 주어진 자료 자체들이 다 하나같이 빈약하고 편향되어 있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2. 무슨 맥락이든지 '극단'과 '테러'는 용납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3. 가해자 vs 피해자, 가해자의 후손 vs 피해자의 후손, 유산(이득+손해)의 상속 문제 등등.. 단순화하여 풀기 어려운 개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테러를 당한 당사자 그리고 그 당사자의 가족들 앞에서 이런 유산 어쩌구 하는 문제를 꺼내기는 좀 그렇다. 흠.. 인간이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4. 아무래도 나는 유럽적 가치를 더 믿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슬람 쪽을 긍정적으로 고려하는(고려해보려는) 다문화주의 사람들의 논리가 헛점이 많이 보인다.
1) 어떤 사람이 어떤 문화적 공동체 안에서 태어났다고 꼭 그렇게 그 문화적 틀 안에서만 그 사람의 정체성과 본성을 고려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왜 해당 문화의 틀 안에 그 사람을 가두려는지 모르겠다. 문화를 너무 고려하는 건, 그 공동체 자체는 존중하는 격이 될 수 있으나, 그 공동체 안의 개인은 존중할 마음이 별로 없는 듯 하는 것으로 보인다.
2) 같은 카테고리로 이 사례와 저 사례를 묶으면서 '이건 되는데 저건 왜 안 돼?' 식으로 자꾸 논지를 전개하는데, 별로 좋지 못한 사고방식다. 그 같은 카테고리로 묶는 사례들이 사실은 함께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머리카락 전체를 감싸는 터번이랑 목에 조그맣게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랑 같을까? 크기가 엄청 차이가 나서 바깥에서 볼 때에 시각적 효과도 당연히 유의미하게 차이가 나고, 착용하는 사람에게 주는 불편함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고. 또,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공권력'이라는 것도 일종의 정체성이긴 하겠지. 그렇지만 그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과 궤를 달리 하는 정체성이다. 최대한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기독교 정체성' '이슬람 정체성' 등등의 한 문화권만 주로 생각하는 편협한 정체성과 한 카테고리에 은근슬쩍 묶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경찰헬멧 문제에 대해서, 터번에 대조해서 또 카우보이 모자는 또 왜 꺼내는가. 누가 카우보이 모자를 경찰헬멧으로 허용하지는 않았을 텐데.
3)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의 논리로 모든 것을 바꾸려면, 다른 수많은 것을 다 바꾸어야 한다?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의 관점에서 수많은 문화들이 전근대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서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차이라는 게 있다. 굳이 바꾸지 않아도 이쯤이면 허용할 만하다, 라는 선이 있겠다.
4) 소통을 늘려야 한다는 것은 찬성인데, 그 소통의 장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관건이겠다. 자칫 어설프게 대화한답시고 붙여놨다간 갈등만 더 키울 수 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어느 쪽에서 어떤 사람들을 뽑아다 토론장에 앉혀야 하며, 대화의 형식은 어때야 하며, 토론의 결과의 권위 혹은 구속력은 어때야 하며 등등을, 우아하게 깔끔하게 정해야 한다.
5)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표현의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솔직히 풍자의 대상이 상처를 받고 안 받고를 다 고려하면 그 어떤 풍자도 비판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이 상처를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잘했냐 못했냐, '부당하게' 깎아내림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거지. 그 '부당하게'의 영역에 상처를 받고 안 받고의 여부가 꼭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든다. '혐오 발언'인지 아닌지는 어느 누가 멋대로 정하는가?
6) "히잡을 아랍 여자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했다?" 이건 무슨 이문열씨의 그 소설의 황당무계한 논지를 보는 듯 하다. 이미 그 문화권이 그 사람들의 인식 자체를 규정해버렸기 때문에, 그 선택이 과연 '온전히 100% 자신의 주체적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마약을 먹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겉으로 보이는 압박 등등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의 선택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문화권이 이미 사람들의 생각을 특정하게 규정해버리는데.
7) '누군가의 특수한 문화적 규범과 이의 실행이 다른 이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야 좋은 말이지. 그런데 '다른 이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다'의 기준 자체가 문화권마다 다른데 이걸 어떻게 합의하는가?
5.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1) 한 공동체가 꼭 모든 사안에 대해서 하나의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은데,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2) 왜 다수결의 원칙을 들먹이나? 소수자들을 어떻게끔 존중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데 이들을 왜 다수의 대중의 논리로 찍어누르려고 하나? 다수결의 원칙은 최후에 어쩔 수 없을때만 쓰는 거지, 여러 문화적 집단의 구성원들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합의에 이르르기 위해서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3) 너무 보편성만 강조하고 문화적 다양성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문화가 그 사람에게 갖는 의의를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6. Huntington이 상정하는 문명은 극단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성격만 띠고 있는데, 동의할 수 없다. 문화적-문명적 차이 그 자체가 갈등을 일으킨다기 보단, 그 차이에 대한 몰이해가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7. 이슬람이라는 공동체가 너무 거대하고 그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많은 다양한 집단들의 특성, 그리고 관계 등등을 고려해야 한다.
8. 결국, 각 사안마다 case by case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하나의 개념적 판단이 모든 사례에 다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9. 되도록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상대방의 문화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하면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1. 주어진 자료 자체들이 다 하나같이 빈약하고 편향되어 있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2. 무슨 맥락이든지 '극단'과 '테러'는 용납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3. 가해자 vs 피해자, 가해자의 후손 vs 피해자의 후손, 유산(이득+손해)의 상속 문제 등등.. 단순화하여 풀기 어려운 개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테러를 당한 당사자 그리고 그 당사자의 가족들 앞에서 이런 유산 어쩌구 하는 문제를 꺼내기는 좀 그렇다. 흠.. 인간이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4. 아무래도 나는 유럽적 가치를 더 믿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슬람 쪽을 긍정적으로 고려하는(고려해보려는) 다문화주의 사람들의 논리가 헛점이 많이 보인다.
1) 어떤 사람이 어떤 문화적 공동체 안에서 태어났다고 꼭 그렇게 그 문화적 틀 안에서만 그 사람의 정체성과 본성을 고려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왜 해당 문화의 틀 안에 그 사람을 가두려는지 모르겠다. 문화를 너무 고려하는 건, 그 공동체 자체는 존중하는 격이 될 수 있으나, 그 공동체 안의 개인은 존중할 마음이 별로 없는 듯 하는 것으로 보인다.
2) 같은 카테고리로 이 사례와 저 사례를 묶으면서 '이건 되는데 저건 왜 안 돼?' 식으로 자꾸 논지를 전개하는데, 별로 좋지 못한 사고방식다. 그 같은 카테고리로 묶는 사례들이 사실은 함께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머리카락 전체를 감싸는 터번이랑 목에 조그맣게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랑 같을까? 크기가 엄청 차이가 나서 바깥에서 볼 때에 시각적 효과도 당연히 유의미하게 차이가 나고, 착용하는 사람에게 주는 불편함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고. 또,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공권력'이라는 것도 일종의 정체성이긴 하겠지. 그렇지만 그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과 궤를 달리 하는 정체성이다. 최대한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기독교 정체성' '이슬람 정체성' 등등의 한 문화권만 주로 생각하는 편협한 정체성과 한 카테고리에 은근슬쩍 묶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경찰헬멧 문제에 대해서, 터번에 대조해서 또 카우보이 모자는 또 왜 꺼내는가. 누가 카우보이 모자를 경찰헬멧으로 허용하지는 않았을 텐데.
3)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의 논리로 모든 것을 바꾸려면, 다른 수많은 것을 다 바꾸어야 한다?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의 관점에서 수많은 문화들이 전근대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서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차이라는 게 있다. 굳이 바꾸지 않아도 이쯤이면 허용할 만하다, 라는 선이 있겠다.
4) 소통을 늘려야 한다는 것은 찬성인데, 그 소통의 장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관건이겠다. 자칫 어설프게 대화한답시고 붙여놨다간 갈등만 더 키울 수 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어느 쪽에서 어떤 사람들을 뽑아다 토론장에 앉혀야 하며, 대화의 형식은 어때야 하며, 토론의 결과의 권위 혹은 구속력은 어때야 하며 등등을, 우아하게 깔끔하게 정해야 한다.
5)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표현의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솔직히 풍자의 대상이 상처를 받고 안 받고를 다 고려하면 그 어떤 풍자도 비판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이 상처를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잘했냐 못했냐, '부당하게' 깎아내림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거지. 그 '부당하게'의 영역에 상처를 받고 안 받고의 여부가 꼭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든다. '혐오 발언'인지 아닌지는 어느 누가 멋대로 정하는가?
6) "히잡을 아랍 여자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했다?" 이건 무슨 이문열씨의 그 소설의 황당무계한 논지를 보는 듯 하다. 이미 그 문화권이 그 사람들의 인식 자체를 규정해버렸기 때문에, 그 선택이 과연 '온전히 100% 자신의 주체적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마약을 먹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겉으로 보이는 압박 등등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의 선택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문화권이 이미 사람들의 생각을 특정하게 규정해버리는데.
7) '누군가의 특수한 문화적 규범과 이의 실행이 다른 이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야 좋은 말이지. 그런데 '다른 이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다'의 기준 자체가 문화권마다 다른데 이걸 어떻게 합의하는가?
5.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1) 한 공동체가 꼭 모든 사안에 대해서 하나의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은데,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2) 왜 다수결의 원칙을 들먹이나? 소수자들을 어떻게끔 존중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데 이들을 왜 다수의 대중의 논리로 찍어누르려고 하나? 다수결의 원칙은 최후에 어쩔 수 없을때만 쓰는 거지, 여러 문화적 집단의 구성원들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합의에 이르르기 위해서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3) 너무 보편성만 강조하고 문화적 다양성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문화가 그 사람에게 갖는 의의를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6. Huntington이 상정하는 문명은 극단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성격만 띠고 있는데, 동의할 수 없다. 문화적-문명적 차이 그 자체가 갈등을 일으킨다기 보단, 그 차이에 대한 몰이해가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7. 이슬람이라는 공동체가 너무 거대하고 그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많은 다양한 집단들의 특성, 그리고 관계 등등을 고려해야 한다.
8. 결국, 각 사안마다 case by case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하나의 개념적 판단이 모든 사례에 다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9. 되도록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상대방의 문화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하면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1. 기독교도 교리가 전근대적이긴 한데, 세속화되어서 유명무실화되었죠. 이슬람도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어서.. 지금 생각해보니 교리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보이네요. 그 교리를 어떻게 실제 세계에서 운영하는가가 문제가 되는 거지. 어느 공동체든지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에게 책임이 하나도 없다고 보긴 힘들겠지만, 이슬람측이 먹는 욕은 그에 비해서 너무 과한 듯 하네요.
2. 이슬람 애들도 역사적으로 한 몫 했죠. 그리고 지금의 폐습들을 과거로 쉴드치는 건 저도 아니라고 봅니다.
3. '쓰는 사람 자신이 명시적으로 ... 더 보기
2. 이슬람 애들도 역사적으로 한 몫 했죠. 그리고 지금의 폐습들을 과거로 쉴드치는 건 저도 아니라고 봅니다.
3. '쓰는 사람 자신이 명시적으로 ... 더 보기
1. 기독교도 교리가 전근대적이긴 한데, 세속화되어서 유명무실화되었죠. 이슬람도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어서.. 지금 생각해보니 교리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보이네요. 그 교리를 어떻게 실제 세계에서 운영하는가가 문제가 되는 거지. 어느 공동체든지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에게 책임이 하나도 없다고 보긴 힘들겠지만, 이슬람측이 먹는 욕은 그에 비해서 너무 과한 듯 하네요.
2. 이슬람 애들도 역사적으로 한 몫 했죠. 그리고 지금의 폐습들을 과거로 쉴드치는 건 저도 아니라고 봅니다.
3. '쓰는 사람 자신이 명시적으로 원해서 쓴다면'이라는 말씀에서, 그 '원하면'이 정말 이슬람 문화와 100% 독립적인 상태에서 주장할 수 있는 자유의지에 의한 '원하면'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그 판단 자체를 존중해야 하는지 아닌지 자체를 모르겠네요. 주체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충분히는 주체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2. 이슬람 애들도 역사적으로 한 몫 했죠. 그리고 지금의 폐습들을 과거로 쉴드치는 건 저도 아니라고 봅니다.
3. '쓰는 사람 자신이 명시적으로 원해서 쓴다면'이라는 말씀에서, 그 '원하면'이 정말 이슬람 문화와 100% 독립적인 상태에서 주장할 수 있는 자유의지에 의한 '원하면'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그 판단 자체를 존중해야 하는지 아닌지 자체를 모르겠네요. 주체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충분히는 주체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사실 질문거리, 생각거리를 던지는 차원이었기에, 제가 반박하고 논쟁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보고요...다만 위에 제시한 두 글을 읽으실때에는 결국 제가 직접 써내려간 비평적 서술의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원전이 있고, 거기에서 자세히 서술된 facts가 여기에서는 답안지여서 축약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전기공학도님이 이런저런 생각을 올리신 윗 글을 보면, 제가 시험답안지로 썼기에 어쩔수없이 축약돼 있는 부분에 대한 오해도 보입니다. 어쨌든, 나중에 따로 리스트를 한 번 알려드릴테니 시간되시면 논문들을 직접보시고, 제가 첨부한 글처럼 비평을 직접 하고 생각을 정리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성스러운 대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정성스러운 대댓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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