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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1/18 12:45:45 |
| Name | swear |
| File #1 | IMG_1535.webp (492.1 KB), Download : 7 |
| Subject | 한국은 냄새가 나고 추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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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도 사람인 법이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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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데일 패튼의 수기를 ai번역해서 가져와봤습니다. 1950년 생이시고, 아버지는 패튼이 5살때 심장마비로, 어머니는 11살때 자살을 하셨다고 하네요.
사회에 적응을 못하며 살다 군대에 오신 분입니다.
군대 시절 찍은 사진 중 내가 가진 유일한 사진이다. 딸이 가지고 있던 것인데, 1967년 임진강 남쪽 3소대 막사(Hooche) 근처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군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한국인과도 딱히 친구가 되지 못했다. 막사를 관리하고 빨래를 해주는 하우스보이(houseboy)나... 더 보기
사회에 적응을 못하며 살다 군대에 오신 분입니다.
군대 시절 찍은 사진 중 내가 가진 유일한 사진이다. 딸이 가지고 있던 것인데, 1967년 임진강 남쪽 3소대 막사(Hooche) 근처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군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한국인과도 딱히 친구가 되지 못했다. 막사를 관리하고 빨래를 해주는 하우스보이(houseboy)나... 더 보기
실제 데일 패튼의 수기를 ai번역해서 가져와봤습니다. 1950년 생이시고, 아버지는 패튼이 5살때 심장마비로, 어머니는 11살때 자살을 하셨다고 하네요.
사회에 적응을 못하며 살다 군대에 오신 분입니다.
군대 시절 찍은 사진 중 내가 가진 유일한 사진이다. 딸이 가지고 있던 것인데, 1967년 임진강 남쪽 3소대 막사(Hooche) 근처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군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한국인과도 딱히 친구가 되지 못했다. 막사를 관리하고 빨래를 해주는 하우스보이(houseboy)나 우리 부대에 배속된 카투사(KATUSA)들을 그저 참아내는 수준이었다. 내가 보고 겪은 바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때때로 그들은 민족적으로 우리가 자기 나라에 있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길, 우리는 고작 그들의 여성을 매춘하고, 돈을 뿌리고,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하고, 그들의 노인과 민족을 무시했을 뿐인데 말이다… (역주: 반어법적 표현).
당시 들리는 말로는 카투사들은 부유한 한국 가정 출신이며 미군과 일하기 위해 돈을 썼다고들 했다. 한국군은 아주 거친 집단이었고 생활도 고됐다. 우리 부대의 카투사들은 편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한 번은 매복 순찰 중에 카투사 한 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성이 '채(Chai)'였던 것 같다. 지형이나 예상 적군에 따라 매복 형태가 다양했는데, 그날 우리는 '글래디스(Gladys)' 초소 남서쪽에 15인조 '테이블 매복(table ambush)'을 세우기로 했다. 테이블 매복이란 옆에서 본 테이블 모양을 상상하면 된다. 전방(상단)에 배치된 인원들이 앞을 보고, 양옆(다리)에 배치된 인원들이 측면을 보는 식이다. 이 방식은 측면 방어에 좋고 주로 오솔길에서 사용된다. 보통 10명이 최적이다. 전방에 5명, 양옆에 2명씩, 그리고 후방 중앙에 1명을 배치한다.
자정쯤 돌을 던지며 떠보는 적의 정찰이 시작되었고 우리 쪽에서도 수류탄 몇 발을 던졌다. 그 후 잠잠해졌다. 새벽 4시경 내 오른쪽 전방에서 총성이 울렸다. 나는 테이블의 왼쪽 다리 부분 북쪽을 향해 세 번째 자리에 있었다. 총성 후 다시 고요해졌다. 날이 밝자 '채'가 매복 구역 전방에 죽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매복 구역 밖으로 기어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 서서 걸어 들어온 것 같았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출신의 동료가 그를 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 (1) 절대 매복 구역을 떠나지 마라, 떠난다면 반드시 알려라. (2) 돌아올 때는 절대 서서 걷지 마라. 끔찍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그가 왜 나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군이 우리 위치를 떠보고 있었기에 근처에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대변이 급했을지도 모른다. 근처를 확인했지만 흔적은 없었다. 보통 매복 중에 소변이 급하면 그냥 옆으로 누워서 해결했다. 순찰 중에 내 오줌으로 젖은 풀밭에 누워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나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글래디스' 초소에 전사자(KIA)가 있다고 보고했는데, 그들은 북한군인 줄 오해했다. 우리가 판초 우의에 둘러싸인 시신을 철책으로 운반할 때 일부 병사들이 환호하기도 했지만,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분위기가 급변했다. 조사가 진행되었고 클리블랜드 출신 병사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마음 고생이 심했다. 나중에 미군이 카투사의 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들었다.
DMZ에서도 가끔 즐거운 일이 있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말하는 '블랙 유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웃을 수 있다면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죽음 앞에서도 유머가 있었고, 특히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라면 더 그랬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며, 전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보스턴 출신의 셰인 노턴(Shane Norton)과 꽤 친했는데, 그는 대단한 불평꾼이었다. 그 특유의 말투 때문에 정말 웃겼다. 예를 들어 이미 옷이 젖었다고 진흙탕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그런 친구였다. 현장에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다. 우리는 주로 같은 순찰 팀이었다. 그는 내 뒤를 이어 무전병(RTO)이 되었는데, 군대를 정말 싫어했다. 지금도 그와 연락하고 지낸다. 인디애나 출신의 대니 얼리치(Danny Ulrich)와도 친구였다. 나처럼 맥주를 좋아했고, 아주 무모하고 겁이 없는 친구였다. 뭐든 한 번은 해보고 좋으면 두 번 하는 성격이었다. 아주 호감 가는 캐릭터였는데 군대 이후로는 찾을 수 없었다.
1968년 8월경으로 기억한다. 10인 팀으로 MDL(군사분계선) 근처에 배치되었다. 우리와 함께한 엘리스 하사(E-5)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고 훌륭한 리더였다. 우리는 그의 전술적 감각을 신뢰했다. 그날따라 북한군의 대남 방송 스피커 소리가 정말 시끄러웠다. 나는 엘리스 하사에게 대니와 내가 저 소리를 잠시 잠재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거기 한참 있을 거라며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라고 답했다. 대니와 나는 짐을 가볍게 줄였다. 둘 다 권총과 M-79 유탄 발사기를 들고 MDL 너머 '스피커 언덕'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이라 불리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작전 구역 사이의 약 800m 폭의 완충 지대 같은 곳이었다. 스피커 건물과 스피커 뭉치에서 약 300m 떨어진 곳까지 기어가 각각 M-79 유탄을 세 발씩 쏘았고, 큰 스피커 하나와 스피커 뭉치를 맞혔다. 우리 위치는 MDL 바로 남쪽이었다. 반대편에서 난리가 났고 우리는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총을 쐈지만 우리 위치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복귀했을 때 팀원 중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스피커는 약 4시간 동안 조용했다. 나중에 북한이 판문점 회담에서 이 사건을 항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에게 아는 게 있냐고 물었지만, 당연히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하하.
우리 중대장은 켈(Kell) 대위였다. 베트남전 두 번 참전한 베테랑이었고 실력이 좋았다. 우리가 교전을 벌일 때 그가 무전기 근처에 있으면 항상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찰리 6(중대장 호출부호), 시체(Body)를 원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매복 작전을 하면 시체나 최소한 혈흔, 북한군 장비라도 가져와야 했다. 켈 대위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한 번은 그의 운전병이 휴가를 가서 내가 대신 운전하게 되었다. 그는 장비를 챙기라고 하더니 단둘이 지프를 타고 강 북쪽으로 향했다. 임진강 리버티교(자유의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달렸다. 가는 내내 그는 길 안내 외에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임진강의 작은 섬인 '크랩 아일랜드(Crab Island)'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도착했다. 그 섬은 진흙과 덤불로 뒤덮인 곳이었는데, 북한군이 남하할 때 은신처로 쓰인다고 알려져 포병대가 주기적으로 사격 연습을 하던 곳이었다. 늦은 오후, 그는 시계를 보더니 "이제 곧 시작될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들이 섬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는 대위였다. 그는 시가를 피워 물고는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아름답지 않나, 패튼(내 별명)?"이라고 물었다. 나는 "네, 아름답습니다, 대위님"이라고 답했다. 밤이 깊어지자 강 북쪽 도로를 달리는 게 걱정되었다(등화관제를 해야 했으므로). 이상하고 무서운 경험이었지만 무사히 복귀했다. 나중에 원래 운전병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그는 대위가 자주 거기 가서 시가를 피우며 쉰다고 했다. 포탄이 터지는 걸 보며 휴식을 취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DMZ에서 총 4개월하고 며칠을 더 보냈다. 4개월은 북쪽(DMZ), 4개월은 남쪽 부대에서 교대로 근무하며 13개월의 복무 기간을 채우는 식이었다. 한국에서 18세 생일을 맞았는데, 강가 순찰 중에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1967년과 1968년의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도 한국에서 보냈다. 명절은 그냥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가족이 있는 친구들은 좀 다르게 느꼈겠지만 말이다.
글래디스 초소의 벙커와 장벽 철책 근무도 섰다. 벙커들은 샌드백과 목재로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고, 가구라고는 앉을 수 있는 탄약 상자 몇 개가 전부였다. 탄약과 수류탄이 가득했고, 병사들이 '집 같은 분위기'를 내려고 붙여놓은 누드 사진들이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만 한 쥐들이 항상 득실거렸다. 아주 크고 공격적이었는데, 벙커장 성향에 따라 총으로 쏘거나 몽둥이로 때려잡았다. 먹이로 유인하기도 했다. 지루한 병사들은 무엇이든 게임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한국에 비가 오면 정말 무섭게 쏟아졌지만 벙커 배수는 대체로 잘 되었다. 흙바닥 위에는 나무 팔레트를 깔았다. 초소의 모든 시설은 높은 관측탑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지하에 있었다. 우리는 샌드백으로 쌓인 7피트 깊이의 참호를 통해 이동했다. 한 번은 관측탑에 올라갔는데, 거기 근무자는 하루 종일 북쪽을 관찰하며 적군을 향해 손가락 욕을 날리고 있었다. 거기서 북한이 만든 선전 마을인 '평화의 마을(기정동 마을)'이 보였다. 겉보기엔 멀쩡한 집들이었지만 사람은 살지 않는 것 같았고, 러시아산 자동차 몇 대가 뱅글뱅글 돌고 트랙터는 같은 땅만 반복해서 갈고 있었다. 초소 근무병들은 MDL 너머 적군과 자기들만의 전쟁을 치르는 특수한 집단이었다.
음식에 관해서라면, 부대 식당 음식은 대체로 괜찮았다. 순찰 중에 먹는 차가운 전투식량(C-ration)보다는 훨씬 나았다. 적진 근처에서는 불을 피울 수 없었다. 내가 정말 그리워한 건 바삭한 감자튀김을 곁들인 치즈버거였다. 레드 클라우드(Camp Red Cloud)나 애스컴(ASCOM) 같은 큰 기지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그걸 먹었다. 한국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솔직히 뭐가 들어갔는지 믿을 수 없었다. 한 번은 야끼만두와 볶음밥을 먹었는데 맛은 괜찮았지만(술이랑 먹으면 뭔들 안 맛있겠나), 나중에 그 고기가 개고기라는 걸 알고 나서 그만두었다. 할머니가 매번 과일 케이크를 보내주셨는데 나는 정말 싫어했다. 그걸 먹어주는 건 우리 소대 카투사뿐이었다. 군대에서 편지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다. 나는 편지를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그게 당시 내 삶이었다.
위문 공연(USO show)도 가끔 있었다. 밥 호프(Bob Hope)가 온 적도 있다지만, 우리는 너무 북쪽에 있어서 캠프 레드 클라우드까지 내려가서 볼 엄두를 못 냈다. 부대 안 작은 클럽에서 현지 연예인들이 공연을 하기도 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다. 다만 맥주 한 잔에 10센트, 독주 한 잔에 25센트 하던 '다임 나이트'나 '쿼터 나이트'는 기억난다. 돈이 다 떨어진 월말에는 아주 즐거운 이벤트였다.
가끔 DMZ를 벗어나 휴가를 가기도 했다. 서울 이태원에 두 차례 3일 휴가를 갔는데, 좋은 시간을 보냈고 흥미로운 사람들도 만났다. 하지만 '슬릭키 보이(slicky boy, 소매치기)'에게 당시 최고급이었던 펜탁스 카메라를 소매치기당했다. '비즈니스 걸'과 자고 일어나니 카메라는 사라지고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경험이라 생각했다. 그 이태원 여행 때 맞춤 정장 몇 벌을 만들어 집으로 보냈는데, 1년쯤 지나니 실밥이 다 풀려버렸다. 역시나 경험이었다. DMZ 밖의 시간은 좋았지만, 나는 시골뜨기 소년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상황을 잘 알고 통제할 수 있는 DMZ로 돌아가는 게 더 편했다. 시간이 흘러 '세상 물정'을 좀 알게 되면서 휴가는 점점 더 나아졌다.
서울 애스컴(부평)으로 휴가를 갔을 때, 숙소를 잡으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아보니 고등학교 친구 마브 월러(Marv Waller)였다! 세상에,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우리는 정말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막 한국에 도착해 전입 절차를 밟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로 나가 정말 즐겁게 놀았다. 마지막으로 본 마브는 숙소 뒤에서 심하게 구토를 하고 있었고, 나는 북쪽으로 떠났다. 그 이후로 마브 소식은 듣지 못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사업은 매춘이었다. 강 북쪽엔 민간인이 없었지만 강 남쪽엔 넘쳐났다. 부대 정문에 나가면 여자들이 줄을 서 있었고, 우리는 한 명을 골라 한국군 헌병(아마도 포주였을)에게 신고하고 데려왔다. 막사 안으론 못 들어갔지만 클럽에 데려가 술을 사줄 수는 있었다. 가격이 정해지면($3~$5 정도), 트럭 뒤나 트럭 아래, 비어있는 벙커 등 장소를 찾아 일을 치렀다. 처음 전입 왔을 때 군은 성병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끔찍한 교육 영화를 보여줬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임질이나 사타구니 이(crabs, 사면발이)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삶의 일부였다. 사면발이가 너무 흔해서 나는 내 전용 변기 의자를 따로 만들어 약을 뿌려 관리했고, 침대 주변에도 항상 약 가루를 뿌렸다. 불결해서가 아니라 그냥 환경이 그랬다. 어떤 순진한 친구들은 매춘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해서 미국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군대에서 담배를 배우기 시작해 한국에 있을 땐 하루에 두 갑씩 피웠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피우는 담배와 맥주 한 잔은 최고였다. 도박은 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의 포커 게임을 구경하는 건 즐거웠다.
부대 안에는 마약이 좀 있었던 것 같지만, DMZ 작전 중에는 없었다. 대부분 술이 주된 탈출구였다. 내가 아는 한 순찰 중에 술이나 약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근무 시간 외에 남쪽 부대에서는 다들 긴장을 풀고 미친 듯이 놀았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원치 않는 곳에 와 있는 전형적인 미군들의 모습이었다.
부대 근처 문산에 고아원이 있었다. 매일 차를 타고 지나가던 곳이었는데, 어느 날 동료 길리엄과 함께 직접 가보았다. '마마상'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시설이 너무 열악했다.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전까지 나는 아이들이 미군 트럭에서 던져주는 사탕이나 레이션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걸 그저 구경거리로만 생각했었다. 왜 그날 고아원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정말 마음이 쓰였다. 가장 큰 아이가 14살 정도였고, 일부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일부는 사교적이었으며 딱 봐도 미군의 아이인 경우도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의 처지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8학년 때 선생님인 워드 캐리 씨에게 편지를 써서 사진과 함께 상황을 설명했다. 몇 주 만에 22박스의 옷이 도착했다. 선생님이 전교생 프로젝트로 진행해주신 것이었다. 길리엄과 나는 트럭을 빌려 그 상자들을 고아원에 전달했다. 정말 따뜻한 광경이었다. 내 '차가운 보병의 심장'조차 녹아내렸다. 미시간 주립대 스웨트셔츠를 입은 아이의 사진이 고향 신문에도 실렸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트럭에서 물건을 던지는 장난을 치지 않았고, 그런 동료들을 꾸짖었다. 적어도 내가 DMZ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실감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군대 내 인종 문제는 늘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마을로 휴가를 나갔을 때 그 문제가 자주 불거졌다. 하지만 현장(전장)에서는 모두가 잘 지내야만 했다. 켄터키 출신의 리스 웨더스(Reese Weathers)라는 흑인 친구와 아주 친했다. 그는 1968년 8월 매복 중 내 곁에서 부상을 입어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다. 리스는 담배도 안 피우면서 전투식량 속 성냥을 항상 모았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디트로이트에 있는 내 동생들이 쓸 게 부족해서"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사실은 마을에 있는 여자친구(Yobo)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최근에도 그와 통화했는데, 그는 항상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백인 꼬맹이, 잘 지내나?"라고 묻는다.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1968년부터 내가 제대한 1970년대 초까지 인종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술과 약물이 섞이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공포의 민낯을 본 적도 있다. 리스가 부상당했던 그 매복 작전 때였다. 새벽 2~3시경 매복이 시작되었다. 전방의 움직임에 클레이모어를 터뜨리고 소총 사격을 퍼부었다. 적의 반격과 수류탄 투척이 이어졌다. 리스가 머리에 파편상을 입어 피를 많이 흘렸다. 날이 밝기 직전 갑자기 조용해졌다. 빛이 비치자 내 오른쪽 옆에 있던 신병이 보였다.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핀이 뽑힌 수류탄을 손에 꼭 쥔 채 누워 있었다. 내가 수류탄을 던지라고 속삭였지만 그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기어가서 수류탄을 건네받아 던졌다. 알고 보니 그는 교전 시작부터 내내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그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보병이 아니라 통신선을 수리하러 온 기술병이었는데, DMZ가 어떤 곳인지 보고 싶다며 중대장을 설득해 순찰에 합류했던 친구였다. 뭐, 제대로 보고 간 셈이다.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다들 '고난의 파견(hardship tour)'이라고 불렀다. 에어컨이 없는 것, 차를 운전 못 하는 것, 미국 여자(round eyes)가 없는 것,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가 없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고 싶은 만큼 못 자는 것이 힘들었다. 가끔 레드크로스(적십자) 여직원들이 오면 반가웠지만 '눈으로만 보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을 보며 언젠가 진짜 여자들이 가득한 '본국(The World)'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곤 했다.
사회에 적응을 못하며 살다 군대에 오신 분입니다.
군대 시절 찍은 사진 중 내가 가진 유일한 사진이다. 딸이 가지고 있던 것인데, 1967년 임진강 남쪽 3소대 막사(Hooche) 근처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군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한국인과도 딱히 친구가 되지 못했다. 막사를 관리하고 빨래를 해주는 하우스보이(houseboy)나 우리 부대에 배속된 카투사(KATUSA)들을 그저 참아내는 수준이었다. 내가 보고 겪은 바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때때로 그들은 민족적으로 우리가 자기 나라에 있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길, 우리는 고작 그들의 여성을 매춘하고, 돈을 뿌리고,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하고, 그들의 노인과 민족을 무시했을 뿐인데 말이다… (역주: 반어법적 표현).
당시 들리는 말로는 카투사들은 부유한 한국 가정 출신이며 미군과 일하기 위해 돈을 썼다고들 했다. 한국군은 아주 거친 집단이었고 생활도 고됐다. 우리 부대의 카투사들은 편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한 번은 매복 순찰 중에 카투사 한 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성이 '채(Chai)'였던 것 같다. 지형이나 예상 적군에 따라 매복 형태가 다양했는데, 그날 우리는 '글래디스(Gladys)' 초소 남서쪽에 15인조 '테이블 매복(table ambush)'을 세우기로 했다. 테이블 매복이란 옆에서 본 테이블 모양을 상상하면 된다. 전방(상단)에 배치된 인원들이 앞을 보고, 양옆(다리)에 배치된 인원들이 측면을 보는 식이다. 이 방식은 측면 방어에 좋고 주로 오솔길에서 사용된다. 보통 10명이 최적이다. 전방에 5명, 양옆에 2명씩, 그리고 후방 중앙에 1명을 배치한다.
자정쯤 돌을 던지며 떠보는 적의 정찰이 시작되었고 우리 쪽에서도 수류탄 몇 발을 던졌다. 그 후 잠잠해졌다. 새벽 4시경 내 오른쪽 전방에서 총성이 울렸다. 나는 테이블의 왼쪽 다리 부분 북쪽을 향해 세 번째 자리에 있었다. 총성 후 다시 고요해졌다. 날이 밝자 '채'가 매복 구역 전방에 죽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매복 구역 밖으로 기어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 서서 걸어 들어온 것 같았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출신의 동료가 그를 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 (1) 절대 매복 구역을 떠나지 마라, 떠난다면 반드시 알려라. (2) 돌아올 때는 절대 서서 걷지 마라. 끔찍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그가 왜 나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군이 우리 위치를 떠보고 있었기에 근처에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대변이 급했을지도 모른다. 근처를 확인했지만 흔적은 없었다. 보통 매복 중에 소변이 급하면 그냥 옆으로 누워서 해결했다. 순찰 중에 내 오줌으로 젖은 풀밭에 누워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나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글래디스' 초소에 전사자(KIA)가 있다고 보고했는데, 그들은 북한군인 줄 오해했다. 우리가 판초 우의에 둘러싸인 시신을 철책으로 운반할 때 일부 병사들이 환호하기도 했지만,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분위기가 급변했다. 조사가 진행되었고 클리블랜드 출신 병사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마음 고생이 심했다. 나중에 미군이 카투사의 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들었다.
DMZ에서도 가끔 즐거운 일이 있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말하는 '블랙 유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웃을 수 있다면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죽음 앞에서도 유머가 있었고, 특히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라면 더 그랬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며, 전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보스턴 출신의 셰인 노턴(Shane Norton)과 꽤 친했는데, 그는 대단한 불평꾼이었다. 그 특유의 말투 때문에 정말 웃겼다. 예를 들어 이미 옷이 젖었다고 진흙탕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그런 친구였다. 현장에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다. 우리는 주로 같은 순찰 팀이었다. 그는 내 뒤를 이어 무전병(RTO)이 되었는데, 군대를 정말 싫어했다. 지금도 그와 연락하고 지낸다. 인디애나 출신의 대니 얼리치(Danny Ulrich)와도 친구였다. 나처럼 맥주를 좋아했고, 아주 무모하고 겁이 없는 친구였다. 뭐든 한 번은 해보고 좋으면 두 번 하는 성격이었다. 아주 호감 가는 캐릭터였는데 군대 이후로는 찾을 수 없었다.
1968년 8월경으로 기억한다. 10인 팀으로 MDL(군사분계선) 근처에 배치되었다. 우리와 함께한 엘리스 하사(E-5)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고 훌륭한 리더였다. 우리는 그의 전술적 감각을 신뢰했다. 그날따라 북한군의 대남 방송 스피커 소리가 정말 시끄러웠다. 나는 엘리스 하사에게 대니와 내가 저 소리를 잠시 잠재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거기 한참 있을 거라며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라고 답했다. 대니와 나는 짐을 가볍게 줄였다. 둘 다 권총과 M-79 유탄 발사기를 들고 MDL 너머 '스피커 언덕'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이라 불리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작전 구역 사이의 약 800m 폭의 완충 지대 같은 곳이었다. 스피커 건물과 스피커 뭉치에서 약 300m 떨어진 곳까지 기어가 각각 M-79 유탄을 세 발씩 쏘았고, 큰 스피커 하나와 스피커 뭉치를 맞혔다. 우리 위치는 MDL 바로 남쪽이었다. 반대편에서 난리가 났고 우리는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총을 쐈지만 우리 위치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복귀했을 때 팀원 중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스피커는 약 4시간 동안 조용했다. 나중에 북한이 판문점 회담에서 이 사건을 항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에게 아는 게 있냐고 물었지만, 당연히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하하.
우리 중대장은 켈(Kell) 대위였다. 베트남전 두 번 참전한 베테랑이었고 실력이 좋았다. 우리가 교전을 벌일 때 그가 무전기 근처에 있으면 항상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찰리 6(중대장 호출부호), 시체(Body)를 원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매복 작전을 하면 시체나 최소한 혈흔, 북한군 장비라도 가져와야 했다. 켈 대위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한 번은 그의 운전병이 휴가를 가서 내가 대신 운전하게 되었다. 그는 장비를 챙기라고 하더니 단둘이 지프를 타고 강 북쪽으로 향했다. 임진강 리버티교(자유의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달렸다. 가는 내내 그는 길 안내 외에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임진강의 작은 섬인 '크랩 아일랜드(Crab Island)'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도착했다. 그 섬은 진흙과 덤불로 뒤덮인 곳이었는데, 북한군이 남하할 때 은신처로 쓰인다고 알려져 포병대가 주기적으로 사격 연습을 하던 곳이었다. 늦은 오후, 그는 시계를 보더니 "이제 곧 시작될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들이 섬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는 대위였다. 그는 시가를 피워 물고는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아름답지 않나, 패튼(내 별명)?"이라고 물었다. 나는 "네, 아름답습니다, 대위님"이라고 답했다. 밤이 깊어지자 강 북쪽 도로를 달리는 게 걱정되었다(등화관제를 해야 했으므로). 이상하고 무서운 경험이었지만 무사히 복귀했다. 나중에 원래 운전병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그는 대위가 자주 거기 가서 시가를 피우며 쉰다고 했다. 포탄이 터지는 걸 보며 휴식을 취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DMZ에서 총 4개월하고 며칠을 더 보냈다. 4개월은 북쪽(DMZ), 4개월은 남쪽 부대에서 교대로 근무하며 13개월의 복무 기간을 채우는 식이었다. 한국에서 18세 생일을 맞았는데, 강가 순찰 중에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1967년과 1968년의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도 한국에서 보냈다. 명절은 그냥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가족이 있는 친구들은 좀 다르게 느꼈겠지만 말이다.
글래디스 초소의 벙커와 장벽 철책 근무도 섰다. 벙커들은 샌드백과 목재로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고, 가구라고는 앉을 수 있는 탄약 상자 몇 개가 전부였다. 탄약과 수류탄이 가득했고, 병사들이 '집 같은 분위기'를 내려고 붙여놓은 누드 사진들이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만 한 쥐들이 항상 득실거렸다. 아주 크고 공격적이었는데, 벙커장 성향에 따라 총으로 쏘거나 몽둥이로 때려잡았다. 먹이로 유인하기도 했다. 지루한 병사들은 무엇이든 게임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한국에 비가 오면 정말 무섭게 쏟아졌지만 벙커 배수는 대체로 잘 되었다. 흙바닥 위에는 나무 팔레트를 깔았다. 초소의 모든 시설은 높은 관측탑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지하에 있었다. 우리는 샌드백으로 쌓인 7피트 깊이의 참호를 통해 이동했다. 한 번은 관측탑에 올라갔는데, 거기 근무자는 하루 종일 북쪽을 관찰하며 적군을 향해 손가락 욕을 날리고 있었다. 거기서 북한이 만든 선전 마을인 '평화의 마을(기정동 마을)'이 보였다. 겉보기엔 멀쩡한 집들이었지만 사람은 살지 않는 것 같았고, 러시아산 자동차 몇 대가 뱅글뱅글 돌고 트랙터는 같은 땅만 반복해서 갈고 있었다. 초소 근무병들은 MDL 너머 적군과 자기들만의 전쟁을 치르는 특수한 집단이었다.
음식에 관해서라면, 부대 식당 음식은 대체로 괜찮았다. 순찰 중에 먹는 차가운 전투식량(C-ration)보다는 훨씬 나았다. 적진 근처에서는 불을 피울 수 없었다. 내가 정말 그리워한 건 바삭한 감자튀김을 곁들인 치즈버거였다. 레드 클라우드(Camp Red Cloud)나 애스컴(ASCOM) 같은 큰 기지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그걸 먹었다. 한국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솔직히 뭐가 들어갔는지 믿을 수 없었다. 한 번은 야끼만두와 볶음밥을 먹었는데 맛은 괜찮았지만(술이랑 먹으면 뭔들 안 맛있겠나), 나중에 그 고기가 개고기라는 걸 알고 나서 그만두었다. 할머니가 매번 과일 케이크를 보내주셨는데 나는 정말 싫어했다. 그걸 먹어주는 건 우리 소대 카투사뿐이었다. 군대에서 편지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다. 나는 편지를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그게 당시 내 삶이었다.
위문 공연(USO show)도 가끔 있었다. 밥 호프(Bob Hope)가 온 적도 있다지만, 우리는 너무 북쪽에 있어서 캠프 레드 클라우드까지 내려가서 볼 엄두를 못 냈다. 부대 안 작은 클럽에서 현지 연예인들이 공연을 하기도 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다. 다만 맥주 한 잔에 10센트, 독주 한 잔에 25센트 하던 '다임 나이트'나 '쿼터 나이트'는 기억난다. 돈이 다 떨어진 월말에는 아주 즐거운 이벤트였다.
가끔 DMZ를 벗어나 휴가를 가기도 했다. 서울 이태원에 두 차례 3일 휴가를 갔는데, 좋은 시간을 보냈고 흥미로운 사람들도 만났다. 하지만 '슬릭키 보이(slicky boy, 소매치기)'에게 당시 최고급이었던 펜탁스 카메라를 소매치기당했다. '비즈니스 걸'과 자고 일어나니 카메라는 사라지고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경험이라 생각했다. 그 이태원 여행 때 맞춤 정장 몇 벌을 만들어 집으로 보냈는데, 1년쯤 지나니 실밥이 다 풀려버렸다. 역시나 경험이었다. DMZ 밖의 시간은 좋았지만, 나는 시골뜨기 소년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상황을 잘 알고 통제할 수 있는 DMZ로 돌아가는 게 더 편했다. 시간이 흘러 '세상 물정'을 좀 알게 되면서 휴가는 점점 더 나아졌다.
서울 애스컴(부평)으로 휴가를 갔을 때, 숙소를 잡으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아보니 고등학교 친구 마브 월러(Marv Waller)였다! 세상에,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우리는 정말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막 한국에 도착해 전입 절차를 밟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로 나가 정말 즐겁게 놀았다. 마지막으로 본 마브는 숙소 뒤에서 심하게 구토를 하고 있었고, 나는 북쪽으로 떠났다. 그 이후로 마브 소식은 듣지 못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사업은 매춘이었다. 강 북쪽엔 민간인이 없었지만 강 남쪽엔 넘쳐났다. 부대 정문에 나가면 여자들이 줄을 서 있었고, 우리는 한 명을 골라 한국군 헌병(아마도 포주였을)에게 신고하고 데려왔다. 막사 안으론 못 들어갔지만 클럽에 데려가 술을 사줄 수는 있었다. 가격이 정해지면($3~$5 정도), 트럭 뒤나 트럭 아래, 비어있는 벙커 등 장소를 찾아 일을 치렀다. 처음 전입 왔을 때 군은 성병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끔찍한 교육 영화를 보여줬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임질이나 사타구니 이(crabs, 사면발이)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삶의 일부였다. 사면발이가 너무 흔해서 나는 내 전용 변기 의자를 따로 만들어 약을 뿌려 관리했고, 침대 주변에도 항상 약 가루를 뿌렸다. 불결해서가 아니라 그냥 환경이 그랬다. 어떤 순진한 친구들은 매춘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해서 미국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군대에서 담배를 배우기 시작해 한국에 있을 땐 하루에 두 갑씩 피웠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피우는 담배와 맥주 한 잔은 최고였다. 도박은 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의 포커 게임을 구경하는 건 즐거웠다.
부대 안에는 마약이 좀 있었던 것 같지만, DMZ 작전 중에는 없었다. 대부분 술이 주된 탈출구였다. 내가 아는 한 순찰 중에 술이나 약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근무 시간 외에 남쪽 부대에서는 다들 긴장을 풀고 미친 듯이 놀았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원치 않는 곳에 와 있는 전형적인 미군들의 모습이었다.
부대 근처 문산에 고아원이 있었다. 매일 차를 타고 지나가던 곳이었는데, 어느 날 동료 길리엄과 함께 직접 가보았다. '마마상'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시설이 너무 열악했다.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전까지 나는 아이들이 미군 트럭에서 던져주는 사탕이나 레이션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걸 그저 구경거리로만 생각했었다. 왜 그날 고아원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정말 마음이 쓰였다. 가장 큰 아이가 14살 정도였고, 일부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일부는 사교적이었으며 딱 봐도 미군의 아이인 경우도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의 처지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8학년 때 선생님인 워드 캐리 씨에게 편지를 써서 사진과 함께 상황을 설명했다. 몇 주 만에 22박스의 옷이 도착했다. 선생님이 전교생 프로젝트로 진행해주신 것이었다. 길리엄과 나는 트럭을 빌려 그 상자들을 고아원에 전달했다. 정말 따뜻한 광경이었다. 내 '차가운 보병의 심장'조차 녹아내렸다. 미시간 주립대 스웨트셔츠를 입은 아이의 사진이 고향 신문에도 실렸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트럭에서 물건을 던지는 장난을 치지 않았고, 그런 동료들을 꾸짖었다. 적어도 내가 DMZ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실감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군대 내 인종 문제는 늘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마을로 휴가를 나갔을 때 그 문제가 자주 불거졌다. 하지만 현장(전장)에서는 모두가 잘 지내야만 했다. 켄터키 출신의 리스 웨더스(Reese Weathers)라는 흑인 친구와 아주 친했다. 그는 1968년 8월 매복 중 내 곁에서 부상을 입어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다. 리스는 담배도 안 피우면서 전투식량 속 성냥을 항상 모았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디트로이트에 있는 내 동생들이 쓸 게 부족해서"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사실은 마을에 있는 여자친구(Yobo)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최근에도 그와 통화했는데, 그는 항상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백인 꼬맹이, 잘 지내나?"라고 묻는다.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1968년부터 내가 제대한 1970년대 초까지 인종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술과 약물이 섞이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공포의 민낯을 본 적도 있다. 리스가 부상당했던 그 매복 작전 때였다. 새벽 2~3시경 매복이 시작되었다. 전방의 움직임에 클레이모어를 터뜨리고 소총 사격을 퍼부었다. 적의 반격과 수류탄 투척이 이어졌다. 리스가 머리에 파편상을 입어 피를 많이 흘렸다. 날이 밝기 직전 갑자기 조용해졌다. 빛이 비치자 내 오른쪽 옆에 있던 신병이 보였다.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핀이 뽑힌 수류탄을 손에 꼭 쥔 채 누워 있었다. 내가 수류탄을 던지라고 속삭였지만 그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기어가서 수류탄을 건네받아 던졌다. 알고 보니 그는 교전 시작부터 내내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그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보병이 아니라 통신선을 수리하러 온 기술병이었는데, DMZ가 어떤 곳인지 보고 싶다며 중대장을 설득해 순찰에 합류했던 친구였다. 뭐, 제대로 보고 간 셈이다.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다들 '고난의 파견(hardship tour)'이라고 불렀다. 에어컨이 없는 것, 차를 운전 못 하는 것, 미국 여자(round eyes)가 없는 것,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가 없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고 싶은 만큼 못 자는 것이 힘들었다. 가끔 레드크로스(적십자) 여직원들이 오면 반가웠지만 '눈으로만 보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을 보며 언젠가 진짜 여자들이 가득한 '본국(The World)'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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