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2/21 01:00:21
Name   Darker-circle
Subject   서평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 대상이 특정지어지지 않은 글입니다. 문체는 편지글처럼 쓰고 싶어요. 양해 바랍니다.

0. 실재하지 않은 사랑의 한 사이클을 지난 것 같아. 우연으로 시작되어 순간 타올랐지만 끊임없이 상대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화자. 직장 동료와 눈 맞아 떠나버린 여자. 헤어진 뒤 맞은 크리스마스에 태연하게 전화를 걸어온 동료. 새로운 관계가 다시 시작되려는 순간 작가는 글을 맺었어.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 일들. 먹먹하지만 흔한 이야기들을 보통은 그의 언어로 풀어내더라. 그가 20대에 쓴 글이라 약간의 허세가, 그 나이에 느낄법한 미성숙한 성년의 투박함이 묻어 나왔어. 역자는 그가 가진 '매혹적인 "가벼움"'에는 독자의 아량이 베풀어 질 것을 부탁한다고 했어.

1. 화자는 자신의 언어로 저 짧은 플롯에 자기 생각을 투사했어. 그래서 제목을 'Essays in Love'라고 했나봐. 어쩌면 이 글은 자신의 '사랑' 개념의 재정립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일지도 모르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마치 마음에 드는 고기를 감별하듯 내게 투영된 '너의 모습'을 사랑한다고 표현한 것처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것을 적절하게 상대에게 주는 것이 '성숙'이라고 보는 것처럼.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논고'에 그랬던 것과 같이 혹은 구성주의자들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언어를 다루는 것처럼, 그렇게 풀어낸 걸.

2. 둘만의 언어들. 닮아가는 말투와 암호들. 사랑할 때엔 그렇게도 잘 맞던 것들이 차갑게 식어버린 뒤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음을. 겪어보기 전에는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이 깨지고 나면 남는 것은 죽을 것처럼 조여오는 마음과 지속할 수 없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기력함 뿐이었고. 내가 너에게 마지막 순간을 알려야 했듯,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네가 보낸 메시지에 무뎌졌던 마음이 다시 무너졌듯, 너라는 존재는 그렇게 한 켠에 자리하게 됐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차마 네게만은 전할 수 없었던 '마시멜로'. 그 '마시멜로'가 전해진 경우에도 막을 수 없는 일들은 꽤 많더라. 어쩌면 네게 전해지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어.

3.
https://youtu.be/x6EITzLE0mQ

입술이 포개어진, 영원할 것만 같은 순간. 시작부터 결말은 정해진 거였다고. 다만 누가 먼저 선을 걷어내는지의 문제였고, 눈물 속에서 그렇게 끝을 알렸지. 모든 일이 시작된 바로 그 곳에서. 글을 읽는 동안 많이 아팠어. 이 글을 읽지 않을 너와의 기억 때문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아줬으면 해. 어디서든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결국 이건 잘 짜여진 픽션이니까. 겨울이 아직 가지 않았던 때, 왜 그런 말뭉치들이 오갔고 서로의 맘을 깼는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흔한 엔딩 플롯을 예상했기에 그랬는지도 몰라.

4. 혼재된 사고와 뒤얽힌 채 묻혀진 감정선이 다시 깨려 할 때 읽는 것을 멈췄어야 했는지 몰라.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움직이고 있어. 좋은 글이었냐고 묻는다면 글쎄. 감정선을 동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무언가 얻어내기엔 부족했어. 건조하게 보면 비행기에서 남녀가 눈맞아서 사귀다가 여자가 남자 동료랑 바람나서 떠났고, 남자는 차였다고 찌질거린게 다니까. 그래서 이 글이 그리 편하지는 못한가봐. 책 한 권을 읽었다는 성취감보다, 몇 가지 마음에 드는 문단을 발견한 것 보다, 묻어둔 기억이 건드려진 게 더 힘들어. 그래서 글이 건조한가봐.

잠이 오지 않아.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591 정치선거일 직전 끄적이는 당별관련 뻘글 23 the hive 24/04/09 2024 0
    2625 정치선거방식과 정당체계 12 김덕배 16/04/16 4963 2
    13862 일상/생각선거때 집토끼, 산토끼 표현 15 우연한봄 23/05/16 2258 0
    14569 정치선거공보 정독하기 1 당근매니아 24/04/01 1327 6
    12593 도서/문학선거 기다리느라 초조하신 중년 여러분을 위해 정치소설 추천합니다. 6 arch 22/03/08 5636 4
    12860 정치선거 공보물을 보고서… 15 Picard 22/05/26 3156 0
    13538 사회석학의 학술발표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왜곡되어 소비되는 방식 13 카르스 23/02/03 2847 29
    11884 정치석열이형, 준석아 공작 떡밥 물면 안돼!! 22 Picard 21/07/15 3915 2
    9931 도서/문학서효원 - '천년마제' 6 덕후나이트 19/11/02 5684 0
    4650 일상/생각서해대교에서. 1 regentag 17/01/18 3143 0
    8945 도서/문학서평 『웃는 늑대』 - 쓰시마 유코 2 메아리 19/03/08 3879 5
    8870 도서/문학서평 『새의 선물』 – 은희경 1 메아리 19/02/17 4818 9
    8854 도서/문학서평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1 메아리 19/02/10 4379 9
    8990 도서/문학서평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2 메아리 19/03/22 5076 6
    9121 도서/문학서평 『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메아리 19/04/25 4520 4
    9034 도서/문학서평 『가나』 – 정용준 2 메아리 19/04/04 5909 3
    8810 도서/문학서평 「자살의 전설」 - 데이비드 밴 1 메아리 19/01/27 3686 4
    12498 도서/문학서평 : 카프카의 <변신> 1 닉네임 변경권 22/02/08 3757 3
    11138 도서/문학서평 -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2 메아리 20/11/15 4361 10
    8891 도서/문학서평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Darker-circle 19/02/21 3728 6
    2633 도서/문학서평 -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에 반하는 사람들 2 커피최고 16/04/18 4508 2
    8786 도서/문학서평 - 「나무 위의 남작」 – 이탈로 칼비노 2 메아리 19/01/21 4371 10
    8758 도서/문학서평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메아리 19/01/13 4096 11
    14711 경제서초구에서 대형마트 새벽배송이 가능해집니다. 9 Leeka 24/05/28 1108 0
    4168 기타서원철폐 21 피아니시모 16/11/16 4391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