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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7/23 18:10:08
Name   quip
Subject   자전거 시민
대부분의 날들이 그러하듯, 그 날도 딱히 특별하다 할 만한 건 없는 날이었다. 날씨도,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도, 담배를 몇 대 피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올해 봄 어드메였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초여름이었을 수도 있고, 작년 가을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 날, 기억나는 사건은 하나뿐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다가, 자빠졌다. 거하게.

가양대교와 성산대교 사이에 있는 한강변 자전거도로 어느매였을 것이다.

물론 이조차 불분명하다. 그냥 한강 북부 자전거도로 어느매, 라고 하자. 나는 하루치 주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고, 도로는 한산한 편이었다. 랜덤 재생을 걸어둔 플레이리스트에서는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만든 플레이리스트이기에 대체로 다 좋아하는 노래들이었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더 좋아하는 노래라는 건 있는 법이다. 인생이란 대체로 다 지루한 날들이지만, 더 지루한 날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노래가 흐르고, 자전거가 흐르고. 그리고 앞에는 느릿느릿 흘러가는 세 대의 자전거가 있었다. 성인 여성 한 명과, 아동 두 명. 나는 추월을 마음먹었다. 자. 흘러가자고. 곧게 펼쳐진 도로, 맞은편에 보이는 자전거는 없었다. 나는 중앙선을 충분히 넘은 채, 노래를 따라부르며 페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내 앞의 꼬마 친구가, 중앙선을 넘어 블로킹을 시전했다. 이런. 나는 급브레이크를 잡았고, 뒷바퀴가 들렸고, 핸들에 갈비뼈를 들이박은 후, 장렬하게 고꾸라졌다.

하늘이 노랬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팔꿈치와 무릎과 몸통이 천하제일 고통대회를 펼치고 있었다. 내가 제일 힘들어. 내가 더 아프다고. 시끄러 임마 내가 더 아파.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제일 아픈 건 팔꿈치와 무릎과 몸통이 같이 아픈 나인 것 같았지만, 각 부위는 딱히 내 설명에 설득될 생각이 없는 듯 싶었다. 남은 힘으로 자전거를 끌고 도로 옆 잔디밭에 기어들어가, 누웠다. 아오. 으. 아. 아오. 다행히도 일단 딱히 어디가 부러지거나 찢어진 곳은 없었다. 힙색을 열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행히 옛날 바이크 사고 때처럼 핸드폰이 반으로 접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일시적인 충격 탓인지, 음악이 안 꺼졌다. 그렇게 음악이 흐르고, 신음이 흐르는 동안, 앞의 셋이 자전거를 세웠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가서 아저씨한테 사과해야지. 방금 내 진로를 막은 꼬마가 내게 왔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나는 쿠허으어아어가아악 야 이 새끼야 우캉허아 이게 괜찮아보이냐 이새끼 싸이코패스의 자질이 충만한 새끼네 사람 쑤셔놓고 아유 이런 날씨에 바람구멍도 생기고 시원하시겠어요 할 놈이야 아주 크하오하아아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주 밝아 아오.

라고 하는 대신 진짜 전력으로 미소를 쥐어짜며 응큽, 아저씨 괜찮아웈. 이라고 말했다. 똥같은 선임이 '표정 왜 그따위냐'라고 해서 억지로 웃었을 때보다 두 배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 느낌이다. 꼬마가 사과하고 있잖아. 관대한 웃음으로 받아주는 어른이 되어야지. 이 꼬마 신사에게 사과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줘야지. 뒤이어 여자가 왔다. 대략 나랑 동년배인 것 같았다. 아들일까, 조카일까. 그녀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게 와서 아저씨 괜찮으세요, 라고 물었다.

네. 괜 흡 찮아요. 큽 제 엌 잘못인데 뭨.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고, 내 잘못도 있지만 아니 야 자도에서 그렇게 랜덤차선운행을 하면 어떻게 해 이새끼야, 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전심으로 참았다. 뒤이어 마지막 꼬마가 왔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아파보여요. 아파 썅 존나 아파서 진짜 뒈질거같고 지금 나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잖아 딱 봐도 안괜찮아 보이잖아 그러니까 제발 자꾸 말걸지 말고 그냥 나 놔두고 좀 가라고.

라는 대신 꼬마에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내고 여자에게 말했다. 저 진짜 괜찮으니까, 가셔도 되요. 제발 빨리 가기를 바랐다.

그래. 우주의 기운이 뭉쳐 작은 사고가 났다. 그리고 그 사고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미소 어린 얼굴로 사과를 잘 받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충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진짜 죽을 힘을 다해서 끝까지 시민다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니까 제발 가라. 빨리 가라고. 그들이 가고 나서야 나는 신음에 몸을 맡겼다. 아오 요기도 아프고 조기도 아프고 죽겠구만 아주. 핸드폰의 음악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한 십오분 잔디밭을 뒹굴고 있자니, 안전순찰대가 왔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구급대원이 내리자 나는 거의 울먹이는 표정이 되어 아저씨 제가 이렇게 넘어져가지고 여기도 쑤시고 여기도 아프고 아야 여기 여기 부러진 거 같은데 살려주세요 아저씨, 하고 매달렸지만 그들은 시민적인 얼굴을 하고 몇 군데를 만져보더니 '크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네요. 조심히 천천히 잘 들어가세요'라고 말하고 가버렸다. 뭐, 실제로 한 십오분 누워 쉬고 있자니 크게 아픈 곳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핸드폰이 기능하기 시작해서, 음악을 껐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약 삼일간 원인불명의 흉통에 시달리다가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고 '갈비뼈에 실금 간거 같은데 무리하지 마셈'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후로 한 달 정도를 고생했다. 하지만 뭐랄까, 자부심 가득한 통증이었다. 나는 사과하는 이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꼬마는, 앞으로 나중에, 혹시나 무언가를 실수하게 된다면, 제대로 사과하는 민주 시민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 물론 꼬마는 앞으로 나중에, '아 사람새끼 하나 자빠뜨려도 사과하면 땡이구나'하는 종류의 시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뭐, 세상을 믿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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