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5/21 00:30:10
Name   Xayide
Subject   에버랜드를 혼자 갔던 상병의 이야기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일입니다.
보통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해외나 제주도를 가곤 합니다만, 우리 지역은 예외였습니다.

우리 지역이 제주도였거든요.

다른 학교는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간다고 했는데, 우리 학교는 국내여행이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수학여행은 놀러 가는거잖아?"

수학여행 4박 5일 코스에는
스키장이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정말 제대로 놀게 해 주려던 것이었습니다.

오전 한 시간은 초보자 코스에서 넘어지기만 했지만
학생은 상급 코스를 들여보내주지 않았지만
중간에 스틱을 실수로 반납해버려서 오후엔 스틱 없이 탔지만
매점도 뭣도 없이 그저 스키장만을 이용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그 날, 눈으로 새하얗게 덮혀 있는 그 리프트는 잊지 못합니다.



중학교 때는 에버랜드였습니다.

학교보다 더 넓은 놀이공원.
평일 오전이라 적은 사람과 짧은 대기시간.
손목에는 자유이용권 팔찌.

용돈이 없어서, 사 먹지 못한 츄러스.
아껴써야 해서, 사 보지 못한 롤러코스터 인증사진.
여유가 없어서, 가 보지 못한 장미정원.
학생이라서, 볼 수 없던 밤 퍼레이드.

어쩌면, 그 때부터 '다시 한 번 더 와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마음 깊히 깔려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은 흘러, 군대에서 어느덧 상병을 달고 난 뒤였습니다.

행보관님께선 휴가 빨리빨리 쓰라고 독촉하셨고
마침 제겐 4박 5일짜리 휴가가 있었습니다.

선임들은 5월 중후반에 나가고 싶어했고
저는 거기에 밀려 5월 첫째 주에 휴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광고를 보았습니다.

'외박/휴가증 인증시 무료이용권을 드립니다.'

5월 5일 에버랜드를 가겠다고 휴가계획서에 적어 제출했고
소대장님은 쓰기 귀찮아도 거짓말은 쓰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제가 진심이었다는 것은 저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을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 동창이, 자기 기숙사 룸메가 휴학해서 방에 자기뿐이니 와도 된다고 했습니다.

비행기표 값이 없어서 그동안 포상휴가를 타인에게 양보해야 했다는 내 투덜거림을 기억한 친구는, 그래도 옷은 사이즈가 안 맞으니 못 빌려준다고 했습니다.

에버랜드도 남자 둘이서 가긴 쪽팔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제 결심을 꺾진 못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스키장에서 깨달았습니다.
자유로움에서 오는 해방감.
돈 걱정도 시간 걱정도 없이, 그저 스키 위에서 즐기는 그 속도.

파란 하늘과 하얀 언덕이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색상이 되던 날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그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포근하게 안아주던 날

그리고 다시 느끼는 중학교 때 제대로 즐기지 못한 그 한.


휴가를 나오자마자, 아울렛으로 갔습니다.

이월상품 할인을 하는 곳으로 가서
신발 만칠천원, 바지 만오천원, 반팔티 오천원
그리고
"제가 휴가나와서 돈이 부족해서 이 곳으로 왔는데, 생각보다 옷이 이쁘고 좋네요!"
라는 입털기로 오천원을 할인받아내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자기 옷 세탁해놓고 저에게 빌려주려던 친구는
제 옷을 보고 말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가 에버랜드를 혼자 갈 결심을 꺾지 않았던 건 몰랐습니다.


피시방에서 밤을 샜습니다.

진정하고 자려고 해도 설레임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눈을 감아도 에버랜드의 관람차가 떠올라서.
(그리고 사실 스투하느라)

밤을 새고, 친구가 있는 기숙사에서 경건히 씻고

새벽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 날은 5월 4일이었습니다.

어린이날 준비로 분주한 놀이공원
평일 오전이라 적은 손님과 짧은 대기줄과
몇 년 새 추가된 새로운 놀이기구 티 익스프레스.
손목에는 자유이용권 팔찌.

중학교 때 해 보지 못한
정말 사보고싶던 사진
정말 먹어보고싶던 츄러스
정말 가보고싶던 장미정원
정말 지켜보고싶던 퍼레이드

몇 년이 지나 다시 눈 앞에 그대로 펼쳐진 그 때 그 세계.


그리고 그 날 밤
손목에 에버랜드 자유이용권을 본 제 친구는

'그래 이 x끼 원래 이런 놈이었지' 라는 표정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휴가 복귀 후 제 에버랜드 사진은
우리 중대원이 모두 한번씩 보고
"미친..." 이라는 말을 한번씩은 했다나 뭐라나.



10
  • 꿈과 희망의 나라. 아, 여긴 롯데월드인가.
  • 환상의 나라 에버랜드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661 역사여요전쟁 - 완. 귀주대첩 7 눈시 17/01/20 4939 6
7558 일상/생각에버랜드를 혼자 갔던 상병의 이야기 12 Xayide 18/05/21 4939 10
9507 음악[클래식]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Paganini Caprice No.24 4 ElectricSheep 19/08/03 4939 1
10391 의료/건강코로나19 방대본 브리핑, 7-3지침 6 다군 20/03/17 4940 1
4842 음악N.EX.T - Lazenca, Save Us 8 April_fool 17/02/11 4941 2
6017 여행현재 진행중인 몰디브 여행 항공, 숙박 준비 8 졸려졸려 17/07/28 4941 2
6186 영화[후기] 킬러의 보디가드 14 CathedralWolf 17/08/28 4941 0
7308 스포츠이재형 캐스터 홍차넷 인사 27 Toby 18/04/01 4941 22
2529 정치정의당 욕 좀 할께요 83 리틀미 16/04/03 4942 6
3556 역사나치의 만행 : 자동차 배기가스 학살 6 Toby 16/08/22 4942 0
10223 일상/생각중학생때 썼던 소논문을 지금 보니 너무 웃깁니다. 15 경제학도123 20/01/26 4942 1
11781 게임[와클] 마그롤 후기 16 leiru 21/06/14 4942 2
9359 게임세키로에서 이 장면은 언제 봐도 멋진 것 같아요. 4 뜨거운홍차 19/06/28 4943 0
3464 꿀팁/강좌조용함의 떠들썩한 효과 26 눈부심 16/08/07 4944 7
6819 기타방금 어느 대형포털에서 글 한번 썻다가 어이없는 이유로 사이트 정지를... 9 1hour10minuteidw 17/12/23 4944 0
8655 역사1592년 4월 부산 - 충렬공(忠烈公) 눈시 18/12/19 4944 8
7166 오프모임[간보기]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회 번개 하면 오실 분이 있으실까요? 12 타는저녁놀 18/02/26 4945 0
2154 음악P!nk - Please, don't leave me 7 새의선물 16/02/01 4945 1
2431 음악요즘 듣고 있는 해외앨범 16(2016.1.29 Panic At The Disco - Death Of A Bachelor) 1 김치찌개 16/03/19 4945 0
6000 기타(덕내주의, 뻘글주의) 문통과 연느가 참여한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성공 다짐대회 16 elanor 17/07/24 4945 3
6999 영화이번 주 CGV 흥행 순위 1 AI홍차봇 18/01/25 4945 0
9298 음악지하민 10 바나나코우 19/06/10 4945 2
12464 기타[홍터뷰] 다람쥐 ep.1 - 영화광 다람쥐 36 토비 22/01/25 4946 69
4536 게임게임 '헌티드 맨션' 만든 얘기 28 Toby 17/01/04 4947 27
11143 일상/생각현대사회에서 소비를 통해 만족감을 얻기 힘든 이유. 20 ar15Lover 20/11/18 4947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