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12/25 03:41:55
Name   감나무
Subject   덴마크의 크리스마스
지구 반대편으로 시집을 와서 처음 맞은 명절은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남편 누나네 가족이 호스트가 되어 가족들을 초대했어요.
시부모님은 이혼 후 어머니만 재혼하셨는데, 시어머니 부부와 시아버지, 그리고 저와 남편까지 시누 형님네 집에 모였죠.
시어머니의 새 남편과 시아버지와 한 자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제게는 너무너무너무너무 뜻밖이었기 때문에... 문화충격 그 자체였어요.
그 전 해까지는 어머니 아버지가 각자 자기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남편은 부모님을 번갈아가며 방문하고,
저희 시누 형님은 본인 시댁까지 세 군데를 번갈아가며 찾아가고 있었대요.
저희 조카들, 즉 손주들 보는 게 낙인 저희 시부모님 입장에선 세 번에 한 번 차례를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동의하신 거겠죠?

크리스마스 이브 점심때쯤 형님네 집에 도착하니 제일 멀리서 오는 저희가 가장 늦게 도착했더군요.
덴마크 크리스마스의 하이라이트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입니다. 늦게 가긴 했네요.
메인 요리는 오리와 돼지 로스트인데, 오리는 시아버지가 준비하고 계셨고, 돼지는 시어머니 남편분이 준비해 가져오셨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 조합으로 크리스마스를 몇 번 보냈는데, 항상 똑같이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시어머니랑 형님이 나머지 반찬(?)을 준비하시고,
잉여인원은 청소랑 설거지, 그리고 애들과 개들 뒤치다꺼리를 합니다.  

크리스마스 저녁은 트리 돌기로 시작합니다.
한 달 이상 (솔잎을 뿜으며... 생나무라서요) 거실 한 켠에 서 있던 크리스마스 트리를 거실 중앙으로 옮기고
트리에 진짜 촛불(!)을 붙입니다. 트리에 걸게 되어 있는 전용 촛대가 있어요. 모르긴 해도 이것 때문에 불 내는 집들 꼭 있을 겁니다. 매년 두려워요. 그게 저희가 될까봐...
그리고 트리 주변을 가족 전체가 둥그렇게 둘러 선 뒤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며 노래를 부릅니다.
크리스마스 메들리로 흔히 부르는 노래들이 있는데요, 각각의 곡이 가사가 4절 5절까지 있어서 다 부르는 데 시간 꽤 걸립니다...
가사를 어떻게 다 외우는지도 신기하죠? 다 외우는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 요맘때면 타이거 (플라잉타이거코펜하겐, 덴마크의 다이소) 에서 손바닥만한 크리스마스 메들리 가사집을 판답니다. 전 핸드폰 봅니다.
점점 빠른 노래를 부르며 트리 주위를 도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가 (왜 불 날까봐 무서워했는지 아시겠죠)
손에 손을 잡은 채로 기차놀이하듯이 온 집안 구석구석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끝납니다.
사실 이걸 자정 가까이 되어서 하는 게 보통이라는데 저희는 어린 조카들이 있어서 초저녁에 하는 것 같아요.

(추가)
아참 빼먹었는데, 일종의 장난꾸러기 집요정 - 대림 기간 내내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스칸디나비아의 산타같은 존재 니쎄 nisse 에게 내년 한 해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쌀죽을 다락에 헌납하는 의식도 이때쯤 합니다. 한 시간쯤 후에 올라가 보면 빈 그릇과 함께 아이들 선물이 놓여 있어요. 한 달 내내 매일 선물주느라 힘들었을텐데 마지막까지 열일하는 니쎄들입니다. 이 때문인지 아이들은 산타로부터 특별히 선물을 기대하진 않습니다.

한바탕 힘 뺐으니 저녁을 먹어야겠죠?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식사를 아~~주 거하게 합니다.
오리랑 돼지 로스트가 메인이지만
크리스마스 저녁식사의 주역은 단연 리스알라망, 쌀 디저트입니다.
달콤한 쌀알이 씹히는 차가운 크림죽(?)에 뜨거운 체리 소스를 얹어먹는 디저트인데요
한 솥 가득 만들어 잘게 부순 아몬드를 넣어 섞은 뒤, 통 아몬드 딱 한 알을 그 안에 숨깁니다.
자기 대접에 통 아몬드가 들어오면 아몬드를 찾은 사람을 위한 특별한 선물이 있어요.
선물은 뭐 별 거 아닐 수도 있고 별 거일 수도 있는데, 일단 콘테스트라는 특성 때문에 승부욕이 생기나 봅니다.
한 솥 가득 만들었다고 말씀 드렸죠? 어지간한 대가족이 아닌 이상, 1인당 한 그릇씩 먹어가지고는 반도 안 없어집니다.
첫 라운드에 아몬드 찾은 사람이 없나요? 2라운드 들어갑니다. 그렇게 세 그릇, 네 그릇까지도 갈 수 있어요.
이게 사실상 크림이라 많이 먹는 게 꽤 고역입니다. 딱 첫 번째까지만 맛있어요... 하지만 아몬드를 찾기 위해서 찾을 때까지 먹는 겁니다.
반전은 아몬드는 이미 첫 판에 누군가의 대접 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식구들이 부른 배를 부여잡고 꾸역꾸역 리스알라망을 먹는 걸 보기 위해서 조용히 아몬드를 숨겨놨다가 솥이 비어갈 때쯤 아몬드를 찾았다고 말하겠죠...
10세 미만의 아동이 아닌 사람이 아몬드를 찾았을 경우 굉장히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 -

식후엔 간단한 빙고 같은 보드게임을 합니다. 한 판씩 이길 때마다 집주인이 준비한 작은 선물들 (저희 가족들은 보통 주전부리를 포장해 둡니다) 을 가져갑니다.

그리고 모두가 가장 기다리던 시간... 선물 개봉의 시간입니다. 크리스마스 앞둔 한 달 동안 부지런히 사다 나른 선물들을 포장지채 트리 밑에 쌓아 두거든요.
그걸 다 뜯는 데 족히 두 세 시간 걸립니다. 이게 저희 집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꼭 한 번에 하나씩만 뜯고 나머지 가족들이 그걸 다 보고 있어요.
다같이 자기 앞으로 온 것 착착 분리해서 쌓아놓고 동시에 뜯으면 좋겠단 생각을 혼자만 하곤 합니다.

선물 다 뜯고 잘 사람은 자러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얘기하고
미리 한바탕 치우고
다음날 아침먹고 또 한바탕 치우고
저희는 점심 전후에 집을 나섭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형님이 본인 시댁에 가시기 때문에 저희는 저희끼리 보냅니다.
아버님은 시할머니랑 시고모네 가족이랑 보내신다고 하고요
어머님은 여행가신다네요.
매년 다양한 조합이 가능합니다. 그래도 완전 저희끼리 보내는 건 또 처음이에요.
남편은 생전 처음 크리스마스 오리를 셀프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맛일지 조금 두렵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는데 약 20분 후면 알 수 있다고 하는군요...

홍차넷 회원분들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신나는 연말연시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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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인류학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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