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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20 16:53:51
Name   틸트
File #1   bo1.jpg (137.9 KB), Download : 4
Subject   시즌은 돌고 돌며 우리는 늙는 것 아니겠습니까.


날씨도 따듯하니 한강에서 캐치볼이라도 하지 않을래, 라고 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군. 날씨도 따듯하니 뭘 할까.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이런 날씨의 한나절 정도는 쉬고 싶었다. 번역해야 할 글들과 써야 할 글들과 결재해야 할 영수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루하루 쉬다가 그렇게 산더미가 되어 버린 상황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것도 좋은 핑계거리가 될 테고 말이야. 그리고 지난 주는 고마운 불면증 덕에 하루에 다섯 시간씩 자면서 일했다고.

어제 경정비를 한 바이크가 떠올랐다. 투어링 시즌을 시작하기 좋은 날씨로군. 출근까지 다섯 시간. 시간이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서울 근교를 다녀올 수는 있겠다. 어디를 갈까. 일단 서울을 가로질러야 하는 서울 동남부쪽은 빼고 생각하자. 서울 빠져나가는 데만 삼십분은 걸릴 것 같은데. 하지만 서북부는 더 답이 없었다. 인천은 지겹고 파주는 멀다. 의정부 가서 커피나 마시고 올까. 근데 그 동네, 무수한 복잡계 인터체인지가 나를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산골짜기로 동두천으로 내몰았던 안 좋은 기억이 있는데. 날과 몸이 좀 더 풀리면 가야지.

그러다 갑자기 자라섬이 떠올랐다. 왜 떠올랐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자라섬에 가고 싶었다. 섬이니 뭐라도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나. 일요일 오후니까 차가 막힐 걱정도 없을 거고.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대성리에서 대학 시절의 추억이나 씹다 와도 괜찮을 거고. 그렇게 갈 길을 확인하고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참 신기한 일이야. 생산된 지 아니 이제 단종된지 이십 년도 넘은, 그리고 가만히 세워둔 지 세 달도 넘은 바이크가 경정비좀 받았다고 멀쩡하게 움직이다니. 역시 믿음과 신뢰의 혼다 바이크다. 혼다 바이크 같은 인간이 되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현실은 에드몬드 혼다처럼 배나온 아저씨가 되어버렸네.

룰룰루 바람을 맞으며 나간다. 일요일 오후의 서울은 의외로 한산했다. 생각보다 빨리 서울을 벗어나 지방 국도에 진입한다. 바람이 너무 좋다. 이건 진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기분이다. 화창한 봄날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 중에 세 번째로 좋은 것은 술을 마시는 것이고, 첫 번째로 좋은 것은 바이크를 타는 것이다. 그렇게 서울 권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진작부터 아름다웠던 하늘이 한층 아름다워졌고 땅이 두세 층정도 위험해졌다. 제기랄. 이번에 택한 국도의 상태는 개판이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펼쳐진 늙고 지친 도로는 늙고 지친 사람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시간과 바퀴가 스쳐간 방향으로 무수한 상처들이 기다랗다. 어떤 상처들은 깔끔하게 메워졌지만 어떤 상처들은 여전히 깊숙하고, 어떤 상처들은 상처보다 커다란 과장된 딱지를 얹고 있다. 그 모든 균열들은 상관없는 자들에게 상관없지만, 상관있는 자들에게 가혹하다. 휘청, 작은 균열에 올라탄 내 바이크가 흔들린다. 아름다운 하늘을 볼 여유는 없다. 잘못하면 영원히 저 아름다운 하늘로 가게 될 것이다. 온 신경을 눈앞의 땅바닥에 집중해, 지렁이 같은 균열을 피한다. 나는 투어링을 나온 건데, 왜 목숨을 건 똥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발리로 급작스러운 휴가를 떠난 이사의 업무를 대행하려는 꿈을 가지고 회사에 취직하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코타키나발루로 휙 떠나 펑크가 나버린 사장 아들의 업무를 대행한다. 내 바이크와 내 몸 둘 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이내믹하고 스포티한 라이딩을 하며 다시는 이 도로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온 몸이 욱신거린다. 한 차선 안에서 목숨을 건 무한 칼치기를 했다고.

그렇게 한참을 달려 자라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엥. 자라섬 유명하다던데. 왜 아무 것도 없지. 주차장 같은 곳에 바이크를 세우고 한참을 헤맸지만 아무래도 섬 같은 건 안 보였다. 그러다 우연히 발 아래를 살펴보고 그제서야 내가 있는 곳이 자라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한 자라섬은 중지도라거나 밤섬 같은 우뚝 솟은 그런 것이었는데, 자라섬은 그런 게 아니었다. 수면과 거의 수평을 맞춘 듯, 마치 얇고 평평한 맥주 거품같은 그런 느낌의 섬이었다.

섬을 보고 나서야 섬을 노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자라섬이구나. 온통 노란 자라섬을 둘러보았다. 노란 흙. 노란 잔디. 노란 갈대밭. 온통 노란 바닥 위로 사람들이 꼬물거린다. SUV에서 내린 4인 가족이, 캐치볼을 하고 있는 3인 가족 근처에 돗자리를 편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참 많군. 아이도 어른도 아닌 내가 혼자 놀고 있기 좀 민망한 걸.

씁. 민망한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딘가 조금 망한 게 아닐까. 내 나이에 부모님은 어른이었다. 나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켰고, 부모님을 부양했으며, 비록 커다란 SUV는 아니었지만 4인 가족이 탈만한 승용차에 이것저것을 싣고 서울 근교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눈앞의 가족들처럼 말이다.

뭐랄까, 그들 사이에서 나는 그런 종류의 가정에 하나씩 얹혀 있는 이상한 삼촌이 된 것 같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삼촌이 둘 있었다. 언제나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다른 삼촌들과 달리 그들은 나를 비롯한 꼬맹이들과 잘 놀아주었고, 오락실도 자주 데려가줬고, 웃긴 말들과 재미있는 장난들도 많이 가르쳐주었다. 느낌상 그들이 바이크 같은 것을 탔어도 이상하진 않았을 것 같다(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만, 폭주족의 시대였으니). 내가 어린 시절 기억하는 삼촌의 나이쯤 되니 한 삼촌은 인터넷 도박 중독으로 폐인이 되었고 다른 삼촌은 도박장과 경마장을 전전하다 사라졌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있을까. 어쩌면 하늘 위에 있을까. 동생이 결혼하면 나는 어떤 삼촌이 될까. 자라섬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왜, 그런 것 있잖은가.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쓸데없이 효자가 된다. 즐거운 가족들을 보고 있자면 사람은 쓸데없이 외로움을 느낀다.

그렇게 쓸데없이 자라섬을 유랑하다가 뭐라도 재밌는 거 없나 하고 표지판을 보니 오, 선착장에 러버덕이 있다는군. 좋아. 나는 선착장으로 가서, 바람 빠진 러버덕의 잔해와 땅 위에 올려둔 고무 보트를 보았다. 이거 너무 내 인생 같은데. 아니, 나보다 낫나. 시즌이 시작되면 러버덕은 바람을 빵빵하게 머금고 귀여워질 것이고 고무 보트는 강 위를 질주하겠지. 내 인생의 시즌은 언제 시작되려나. 에이, 모르겠다. 일단은 바이크 시즌이 시작되었으니 거기 만족하도록 하자. 인생은 포커 패마냥 돌고 도는 것. 하지만 왜 저 새끼는 항상 에어라인 빅슬릿인데 나는 똥 같은 나인 투 스페이드 어게인 아니면 브론슨 핸드냐. 하지만 도일 브론슨은 그 유명한 개똥패 10-2를 들고도 판돈을 쓸어먹고 포커 챔피언이 되었다는데.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아쉽군. 생각보다 경치가 좋았고 쉬기 편했지만 시간이 없으니. 여유 있는 날 친구들과 함께 오면 참 좋을 텐데. 부모님을 모시고 와도 좋아할 것이다. 동생이랑 와도 괜찮겠지. 하지만 바이크는 사람을 태울 수 없고 나는 자동차는커녕 자동차 면허도 없다. 우울하군. 출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 돌아온다. 두어 시간 전에 절대로 다시 타지 않겠다고 결심한 도로에 진입한다.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고, 그 도로에서 헤매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다. 길을 찾으며 헤매는 것 보다는 길 위에서 헤매는 쪽이 안전하지 않을까. 그리고 서울로 향하는 쪽의 도로는 조금 더 안전할 지도 모르잖아.

는 빌어먹을 개소리죠 시팔. 도로는 최악이었다.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고, 중간중간 자주 쉬며 겨우 서울로 돌아왔다. 중간에 한번 잠시 쉬려 길가에 바이크를 세우다가 보기 좋게 나자빠졌다. 도로 가운데의 균열들은 잘 피했는데, 멍청하게도 도로변의 균열을 밟고 미끄러지다니 한심하군. 개막전, 영양가 없는 안타 하나 치고 승부처에서 시즌 1호 병살을 친 기분인데.

어쨌거나 무사히 서울에 도착해 겨우 시간을 맞춰 출근했다. 출근길에 낮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캐치볼이나 할까 했는데 왜 전화도 안 받고. 친구는 조카와 놀아주느라 진을 뺐다고 한다. 언니가 둘째 낳고 산후조리원 들어갔는데, 형부가 애 보다가 탈진해서 주말 하루만 맡아달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이렇게 미세먼지 가득한 날 무슨 캐치볼이야.

그렇군. 오늘 찍은 사진들을 훑어보면서 친구 언니의 가족이 커다란 SUV를 타고 자라섬에 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해태 타이거즈와 선동렬 선수의 열혈팬이며 기아 타이거즈와 선동렬 감독의 비판적 지지자인 그 아저씨는 SK 와이번스의 팬인 와이프를 옆좌석에 태우고 자라섬으로 간다. 뒷자리에 탄 두 아이들은 공평하게 타이거즈와 와이번스의 아동용 레플을 입고 있을 것이다. 타이거즈는 선동렬 레플일텐데, 와이번스는 누굴까. 언니는 정상호 팬이시라던데 정상호일까, 아니면 역시 김광현인가. 아이고 우리 광현이도 언젠가 먼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SK와이번스의 전설, 킹갓엠퍼러 김광현 대투수님이 되겠지. 취미로 깊게 사진을 찍는, 디자이너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에게 오늘 찍은 사진을 몇 개 보냈다. 그는 ‘작년 사진에 비해 너무 엉망진창인데. 차이가 너무 크군.’이라고 말했다. 뭐, 인생은 돌고 돌며 우리는 늙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이런 영양가 없는 글을 쓰다 또 한나절을 날려먹었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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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티타임 게시판 규정을 읽어보고 공지게시판을 욕설/비속어로 검색하여 살펴보았는데 관련된 제제를 발견하지 못하여 일단은 그냥 올립니다. 문제가 된다면 해당 욕설 부분을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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