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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7/05 11:24:47 |
Name | 뤼야 |
Subject | [한밤의 아이들]과 퀴어퍼포먼스로 읽어보는 시선과 권력의 이야기 |
![]() 살만 류슈디의 소설 [한밤의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소설을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아담 아지즈는 의사가 되기 위해 독일에서 공부한 뒤, 인도로 막 돌아옵니다. 그는 한 지주의 딸을 진찰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는데, 지주의 집에 도착하여 딸을 보자고 하자, 그녀의 아버지인 지주는 자신의 딸이 낯선 남자에게 몸을 보여주지는 않는 요조숙녀라고 설명하지요. 어리둥절한 아지즈는 한 방으로 안내를 받는데, 그곳에는 프로레슬러 같은 체격을 한 두 명의 여자가 거대한 흰색 (침대)시트의 한 모서리를 각각 잡고서 뻣뻣하게 서있습니다. 시트의 정중앙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은 약 7인치 직경의 원입니다. 의사는 이 구멍 뚫린 시트를 통해서만 환자를 진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며, 어떤 부위를 진찰하려 하는지 지정해 달라고 친절하게 요청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의사가 그의 환자와 사랑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삼 년간의 절차가 시작됩니다. 그 기간 동안, 지주의 딸은 엄청난 수의 사소한 질병에 걸리며, 의사 아지즈의 방문은 거의 주말행사가 되지요. 매 경우마다 그는 구멍 뚫린 시트를 통해, 그 어린 여인의 몸의 각각 다른 7인치 원에 대한 일별一瞥을 허락받습니다. 지주의 계획이 놀랍도록 효험을 발휘한다는 것과 오직 부분부분으로만 알고 있는 지주의 딸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의사 아지즈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타인의 시선에 한 번도 발가벗겨지지 않은 요조숙녀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객체로서 주체에게 욕망의 악무한(헤겔) 루프를 걸어버리는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타인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는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라캉이 이야기하듯 수치심은 근본적으로 냉혹할 수 밖에 없는 타자의 시선 앞에 놓임으로서 발생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늘 타자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늘 타자의 시선 아래 놓입니다. 사회적 교환(들뢰즈)이 가능하지 않을 때, 주체의 시선은 욕망의 시선이 됩니다. 아지즈와 지주의 딸인 나심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주체가 바라본 대상은 주체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원죄란 이미 타인이 존재하는 세계에 내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했지요. 늙으나 젊으나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을 보기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름다운 여성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남성에게 전유되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이렇게 객체로 전락해버린 여성의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요. 걸그룹의 유혹적인 몸짓은 '당신은 주체, 나는 객체, 나를 가져봐!'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서 이런 메세지를 상품화해서 파는 것에 딱히 부정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지씩 우리의 재주를 팔아먹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이 완벽한 주체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지요. 시선이 곧 권력, 즉 시선을 가진 이는 주체이고 시선의 대상은 객체가 되는 비대칭적 현상에 관해 알기위해 우리는 굳이 푸코씩이나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를 쳐다본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은 술자리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심치않게 일어나는 일인데다가, 퀴어퍼레이드가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시선의 비대칭성과 이러한 비대칭성이 곧 권력의 구조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푸코는 이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찰을 했겠지만, 그딴거 다 집어치우고 이 두 가지의 사례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쳐다본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른 사건은 말하자면, '네 시선 아래 나는 객체가 되기를 거부하겠어!'라는 열사의 몸부림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또한, 퀴어퍼레이드를 보면서 불편해 하는 사람들은 [주체인 내 시선 아래 놓인 객체의 모습이 몹시 욕망하기 껄끄러운 형상을 하고 있음]에 대한 감정적 토로이겠지요. 김수영의 시 [하루살이]에 이런 싯구가 등장하지요. '모여드는 모여드는 하루살이여/나의 시각을 쉬게하라'... 시를 쓰다가 잠시 쉬는 자신의 시야에 사로잡힌 하루살이에게 시인이 내지르는 일갈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주체로서의 시인 자신과 시인의 시야에에 머무르는 객체로서의 하루살이는 주체의 일상을 방해하는 방해꾼인 것이죠. 하루살이는 자신의 일을 할 뿐이고 시인의 시쓰기 따위가 안중에 있을리 없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그들의 퍼포먼스가 어떤 철학을 담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소수자로서 비대칭적인 시선아래 놓였던,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살아왔다기 보다 타인의 시선에 항상 신경을 쓰며 객체로서의 자신을 더 챙겨야했던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즉, 이성애를 당연시 여기는 사회의 공기(시선)가 그들을 주체로 살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며 살아야하는 객체로 전락하게 했다는 이야기지요. 아무리 위아더월드를 외쳐도 우리의 시선에 그들에 대한 타자화와 차별이 있다는 것이 그들이 모를까요? 우리가 바보가 아닌만큼 그들도 바보가 아니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받는 방식에 이의異意가 있었을 것입니다. 왕따와 이지메를 당하는 사람이 왕따와 이지메를 안당하려고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슬픈 이야기입니다. '해치지 않아.' 따위의 메세지로 존재를 인정받는다니요. 이것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마치 이유가 있으면 얼마든지 왕따도 이지메도 승인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 말이 되지요. 그들이 퍼포먼스는 다소 과격한 방식이긴 하지만, 수긍할만한, 그리고 객체가 아닌 주체로 다시 서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읽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객체로 놓이는 여성의 노출과 주체로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그들의 노출이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거기에 놓인 코드가 다르니까요. 예쁘게 노출하라?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주체로 서기 위한 자리에 그들은 누구에게 예쁘게 보여야 할까 생각해봅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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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놓고 피드백이 없었던 점 죄송합니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글에도 썼듯이 퀴어퍼포먼스를 \'권력과 시선\'의 문제로 보고 축제의 자리에서 타인의 시선아래 객체화 되어버린 그들의 자주성을 희화가 되었던, 미화가 되었던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라는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노출의 문제가 단지 축제 현장의 표현의 자유로만 생각하기에는 너무 지나치다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자세히 아는 바는 없으나 신체를 노출하는 것에 있어 어디까지를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또는 표현의 자유로 보느냐의 문제... 더 보기
글을 써놓고 피드백이 없었던 점 죄송합니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글에도 썼듯이 퀴어퍼포먼스를 \'권력과 시선\'의 문제로 보고 축제의 자리에서 타인의 시선아래 객체화 되어버린 그들의 자주성을 희화가 되었던, 미화가 되었던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라는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노출의 문제가 단지 축제 현장의 표현의 자유로만 생각하기에는 너무 지나치다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자세히 아는 바는 없으나 신체를 노출하는 것에 있어 어디까지를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또는 표현의 자유로 보느냐의 문제는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인 듯합니다. 물화되고 주체성을 상실한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드러냄으로써 신체의 상징질서를 파괴하려는 논리에 설득당할 수도, 또는 전혀 포섭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의 방식이 다소 불편하다는 것으로 배제의 논리로 작동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타인을 자신의 시선 아래 가두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니까요.
뤼야님의 글은 늘 잘 보고 있습니다만 가끔 좀 현학적이지 않은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아는 바를 늘어놓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나 그로 인해 사유와 표현의 밸런스가 깨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거든요.
A가 B를 바라보는 걸 A를 주체 B를 객체로 놓고 B에 대한 A의 폭력이나 전유로 놓는 발상은 실은 \"보다\"라는 타동사의 활용에 익숙한 서양 철학자들의 생각, 특히 남성 철학자들의 생각이 묻어 있어서 좀 꺼려집니다. 저 꽁깃꽁깃한 남정네들은 \"보여주다\"가 얼마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인지 주의깊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 더 보기
A가 B를 바라보는 걸 A를 주체 B를 객체로 놓고 B에 대한 A의 폭력이나 전유로 놓는 발상은 실은 \"보다\"라는 타동사의 활용에 익숙한 서양 철학자들의 생각, 특히 남성 철학자들의 생각이 묻어 있어서 좀 꺼려집니다. 저 꽁깃꽁깃한 남정네들은 \"보여주다\"가 얼마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인지 주의깊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 더 보기
뤼야님의 글은 늘 잘 보고 있습니다만 가끔 좀 현학적이지 않은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아는 바를 늘어놓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나 그로 인해 사유와 표현의 밸런스가 깨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거든요.
A가 B를 바라보는 걸 A를 주체 B를 객체로 놓고 B에 대한 A의 폭력이나 전유로 놓는 발상은 실은 \"보다\"라는 타동사의 활용에 익숙한 서양 철학자들의 생각, 특히 남성 철학자들의 생각이 묻어 있어서 좀 꺼려집니다. 저 꽁깃꽁깃한 남정네들은 \"보여주다\"가 얼마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인지 주의깊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글의 도입부, 소설 이야기와 그 뒤에 이어지는 해석이 서로 상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글의 도입부에서 말씀하신 바 지주와 지주네 딸은 젊은 의사에게 완벽한 객체가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주객을 전도시킨 사례가 아닌가요. 남성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강제함으로서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주체성은 전적으로 지주와 딸에게 있지 의사에게 있었던 건 아니지요. 의사는 그저 상대방이 면밀하게 준비한 통제된 공간에 들어가서 러브러브빔 인체 노출 생체실험에 희생된 모르모트일지언정 어떤 의미로도 주체라고 말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주체적인 [보여주기] 일거에요. 내가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고 싶은 곳에서 보여주는 것, 이건 여성이 완전한 통제력을 획득한 것이니 이 보여줌의 과정에서 전유되거나 물화되거나 객체화되거나 수치스러울 게 없지요. 그건 마치 수백장의 셀카를 찍고 그 중 제일 만족스러운 걸 추려서 SNS에 올려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줌으로써 만족을 획득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이 [보여주기]과정이 뜻하는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경우 말씀하신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상황들이 발생하겠지요. 그렇다면 이건 보려는 사람과 보이려는 사람 간의 힘싸움이라고 해야하지 보는 사람을 일방적 주체로, 보이는 사람을 일방적 객체로 놓을 수 없는 거에요.
이렇게 되돌려 생각해보면 걸그룹의 유혹적인 몸짓은 [넌 주체(인줄 알겠지만 사실은 내 매력의 노예), 난 객체 (인줄 착각하겠지만 실은 매혹의 주체), 날 가져봐 (라는 착각 속에서 지갑을 열어봐)] 정도로 해석해야 옳을 겁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퀴어퍼레이드가 꽤 중도적인 관찰자들에게조차 불편함을 일으켰던 건,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도덕의 문제였다기보다는 [전략]의 실패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애초에 전략이라고 부를 만한 무어라도 있었느냐에 대해 회의적이긴 하지만 (깊이 반성해볼 여유 없이 해외 여러 곳에서의 퍼레이드를 보고 그냥 복제품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요) 일단 있었다 치고 이야기해보자면 이런 종류의 퍼레이드는 마치 지주네 딸의 방이 아지즈를 후려치기 위해 최적의 장이었던 것처럼 가장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보여주기]의 장이 되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어필했어야지요. 지주의 딸이 아지즈에게 은밀한 부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치밀하게 덜 은밀하고 덜 성적인 부분을 차례차례, 오랜기간 노출했던 것처럼, 걸그룹이 그냥 다 벗고 춤을 추지 않는 대신 벗을듯 말듯한 춤을 추는 것처럼, 연예인들이 수백장의 셀카를 찍어놓고 그걸 고르고 골라서 고심 끝에 한장 딱 올려놓고 간을 보는 것처럼요.
A가 B를 바라보는 걸 A를 주체 B를 객체로 놓고 B에 대한 A의 폭력이나 전유로 놓는 발상은 실은 \"보다\"라는 타동사의 활용에 익숙한 서양 철학자들의 생각, 특히 남성 철학자들의 생각이 묻어 있어서 좀 꺼려집니다. 저 꽁깃꽁깃한 남정네들은 \"보여주다\"가 얼마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인지 주의깊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글의 도입부, 소설 이야기와 그 뒤에 이어지는 해석이 서로 상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글의 도입부에서 말씀하신 바 지주와 지주네 딸은 젊은 의사에게 완벽한 객체가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주객을 전도시킨 사례가 아닌가요. 남성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강제함으로서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주체성은 전적으로 지주와 딸에게 있지 의사에게 있었던 건 아니지요. 의사는 그저 상대방이 면밀하게 준비한 통제된 공간에 들어가서 러브러브빔 인체 노출 생체실험에 희생된 모르모트일지언정 어떤 의미로도 주체라고 말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주체적인 [보여주기] 일거에요. 내가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고 싶은 곳에서 보여주는 것, 이건 여성이 완전한 통제력을 획득한 것이니 이 보여줌의 과정에서 전유되거나 물화되거나 객체화되거나 수치스러울 게 없지요. 그건 마치 수백장의 셀카를 찍고 그 중 제일 만족스러운 걸 추려서 SNS에 올려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줌으로써 만족을 획득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이 [보여주기]과정이 뜻하는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경우 말씀하신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상황들이 발생하겠지요. 그렇다면 이건 보려는 사람과 보이려는 사람 간의 힘싸움이라고 해야하지 보는 사람을 일방적 주체로, 보이는 사람을 일방적 객체로 놓을 수 없는 거에요.
이렇게 되돌려 생각해보면 걸그룹의 유혹적인 몸짓은 [넌 주체(인줄 알겠지만 사실은 내 매력의 노예), 난 객체 (인줄 착각하겠지만 실은 매혹의 주체), 날 가져봐 (라는 착각 속에서 지갑을 열어봐)] 정도로 해석해야 옳을 겁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퀴어퍼레이드가 꽤 중도적인 관찰자들에게조차 불편함을 일으켰던 건,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도덕의 문제였다기보다는 [전략]의 실패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애초에 전략이라고 부를 만한 무어라도 있었느냐에 대해 회의적이긴 하지만 (깊이 반성해볼 여유 없이 해외 여러 곳에서의 퍼레이드를 보고 그냥 복제품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요) 일단 있었다 치고 이야기해보자면 이런 종류의 퍼레이드는 마치 지주네 딸의 방이 아지즈를 후려치기 위해 최적의 장이었던 것처럼 가장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보여주기]의 장이 되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어필했어야지요. 지주의 딸이 아지즈에게 은밀한 부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치밀하게 덜 은밀하고 덜 성적인 부분을 차례차례, 오랜기간 노출했던 것처럼, 걸그룹이 그냥 다 벗고 춤을 추지 않는 대신 벗을듯 말듯한 춤을 추는 것처럼, 연예인들이 수백장의 셀카를 찍어놓고 그걸 고르고 골라서 고심 끝에 한장 딱 올려놓고 간을 보는 것처럼요.
제 글이 현학적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인문학적 수사를 쓰는 이유는 제 삶의 경험만큼이나 독서의 경험도 제 삶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인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부 졸업생일 뿐입니다. 서양철학자들이 타동사의 활용에 익숙한지 아닌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제 글은 제 삶의 경험과 제2의 삶의 경험인 독서를 녹여낸 결과물일 뿐입니다. 정말 현학적이고자 한다면 저는 이 게시판에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일 뿐더러, 맥락상 이해되지 못할 구절을 가져다 붙인 기억도 없습니다. 다만, 인... 더 보기
제 글이 현학적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인문학적 수사를 쓰는 이유는 제 삶의 경험만큼이나 독서의 경험도 제 삶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인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부 졸업생일 뿐입니다. 서양철학자들이 타동사의 활용에 익숙한지 아닌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제 글은 제 삶의 경험과 제2의 삶의 경험인 독서를 녹여낸 결과물일 뿐입니다. 정말 현학적이고자 한다면 저는 이 게시판에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일 뿐더러, 맥락상 이해되지 못할 구절을 가져다 붙인 기억도 없습니다. 다만, 인문학을 전공하신 분들이 보기에 제 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신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저는 논문을 쓰고자 함이 아니고, 제 삶의 경험을 제가 읽은 책을 통해 끊임없이 메타화하는 것이 버릇일 따름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예로 든 소설이나 걸그룹의 예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어찌보면 예정된 수순이겠지요. 그러나 제 글에 맥락상 그런 것까지 읽어내는 것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서 한참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다만 시선과 권력의 문제에 대한 비근한 예를 든 것이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관계의 역전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퀴어퍼레이드에서 관찰자에게 불편함을 일으켰던 것이 전략의 실패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전략의 문제로 깊이 파고 들어가면 노출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더 커질 뿐이고, 퍼레이드 당사자들이 가진 문제는 희석되고 맙니다. 여러 퍼레이드의 복제품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에도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읽어낸 코드는 이러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만약 퍼레이드를 벌인 당사자가 외국의 퍼레이드를 따라했다고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왜 노출했는가?\'의 진정성문제는 오직 그만이 알 뿐이고, 저는 그의 진정성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알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의 행위를 제가 가진 기준으로 판단했을 따름이지요.
말씀하신대로 제가 예로 든 소설이나 걸그룹의 예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어찌보면 예정된 수순이겠지요. 그러나 제 글에 맥락상 그런 것까지 읽어내는 것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서 한참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다만 시선과 권력의 문제에 대한 비근한 예를 든 것이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관계의 역전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퀴어퍼레이드에서 관찰자에게 불편함을 일으켰던 것이 전략의 실패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전략의 문제로 깊이 파고 들어가면 노출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더 커질 뿐이고, 퍼레이드 당사자들이 가진 문제는 희석되고 맙니다. 여러 퍼레이드의 복제품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에도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읽어낸 코드는 이러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만약 퍼레이드를 벌인 당사자가 외국의 퍼레이드를 따라했다고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왜 노출했는가?\'의 진정성문제는 오직 그만이 알 뿐이고, 저는 그의 진정성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알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의 행위를 제가 가진 기준으로 판단했을 따름이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타인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했지요.\"
이 문단에서 너무 많은 용어사용과 인용이 글 전체의 호흡과 사유의 조리있는 표현에 방해가 되지 않나 싶었어요. 어떤 주제로 어떤 글을 쓰고자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해당 문단에서 길이 헝크러진 느낌이에요. 살만 루슈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일화는 말씀드렸다시피 단순히 A가 B를 바라본다는 행위가 권력의 우열을 나타낸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윗 댓글에서 \"그 이후에\"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듯이 이야기하... 더 보기
\"타인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했지요.\"
이 문단에서 너무 많은 용어사용과 인용이 글 전체의 호흡과 사유의 조리있는 표현에 방해가 되지 않나 싶었어요. 어떤 주제로 어떤 글을 쓰고자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해당 문단에서 길이 헝크러진 느낌이에요. 살만 루슈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일화는 말씀드렸다시피 단순히 A가 B를 바라본다는 행위가 권력의 우열을 나타낸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윗 댓글에서 \"그 이후에\"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듯이 이야기하... 더 보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타인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했지요.\"
이 문단에서 너무 많은 용어사용과 인용이 글 전체의 호흡과 사유의 조리있는 표현에 방해가 되지 않나 싶었어요. 어떤 주제로 어떤 글을 쓰고자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해당 문단에서 길이 헝크러진 느낌이에요. 살만 루슈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일화는 말씀드렸다시피 단순히 A가 B를 바라본다는 행위가 권력의 우열을 나타낸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윗 댓글에서 \"그 이후에\"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듯이 이야기하셨는데 그게 아니라 애초에 역전되고 말고 할 주객 관계가 있기나 했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할 정도로요.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 라캉, 사르트르, 헤겔, 푸코 등을 열거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셨던 메세지는 도입부의 소설 이야기와 잘 맞물리지 않으며, 더 나아가 굳이 이 이름들을 열거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글쓰기의 목적 같은 게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부끄럽게도 전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인문계 대학원에서 논문 쓰며 살지만 말씀하신 빅 네임들이 쓴 책을 한 권도 못읽어봤거든요. 어찌어찌 귀동냥한 세월이 있어서 대충 무슨 의미로 인용하신 건지는 알아들었습니다만, 홍차넷에 매일 출근하는 800여 회원들 가운데 과연 위 5인의 주저 중 3권 이상 읽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를 두고 내기를 건다면 전 열 명 이하라고 배팅할 거에요. 나아가 그 열 명 중에 정신현상학을 읽어본 이가 몇 명이나 될까를 두고 내기하자면 보수적으로 잡아도 한 손 안에 들어온다는 데 걸 거구요.
아마 뤼야님의 글을 읽은 회원 100명 중 저처럼 빅네임들의 현란한 전문용어에 주눅이 든 사람들이 90명 이상일 텐데, 주어진 상황이 이렇다면 차라리 더 간이직절한 문체로 글을 작성하셨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타인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했지요.\"
이 문단에서 너무 많은 용어사용과 인용이 글 전체의 호흡과 사유의 조리있는 표현에 방해가 되지 않나 싶었어요. 어떤 주제로 어떤 글을 쓰고자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해당 문단에서 길이 헝크러진 느낌이에요. 살만 루슈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일화는 말씀드렸다시피 단순히 A가 B를 바라본다는 행위가 권력의 우열을 나타낸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윗 댓글에서 \"그 이후에\"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듯이 이야기하셨는데 그게 아니라 애초에 역전되고 말고 할 주객 관계가 있기나 했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할 정도로요.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 라캉, 사르트르, 헤겔, 푸코 등을 열거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셨던 메세지는 도입부의 소설 이야기와 잘 맞물리지 않으며, 더 나아가 굳이 이 이름들을 열거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글쓰기의 목적 같은 게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부끄럽게도 전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인문계 대학원에서 논문 쓰며 살지만 말씀하신 빅 네임들이 쓴 책을 한 권도 못읽어봤거든요. 어찌어찌 귀동냥한 세월이 있어서 대충 무슨 의미로 인용하신 건지는 알아들었습니다만, 홍차넷에 매일 출근하는 800여 회원들 가운데 과연 위 5인의 주저 중 3권 이상 읽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를 두고 내기를 건다면 전 열 명 이하라고 배팅할 거에요. 나아가 그 열 명 중에 정신현상학을 읽어본 이가 몇 명이나 될까를 두고 내기하자면 보수적으로 잡아도 한 손 안에 들어온다는 데 걸 거구요.
아마 뤼야님의 글을 읽은 회원 100명 중 저처럼 빅네임들의 현란한 전문용어에 주눅이 든 사람들이 90명 이상일 텐데, 주어진 상황이 이렇다면 차라리 더 간이직절한 문체로 글을 작성하셨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저 표현(용어)들은 제것이 아니라는 표시일 뿐입니다. 제 생각을 전달하는데 사용한 용어가 제가 읽은 책의 저자가 최초 사용한 것으로 제 것이 아닌 것을 표시한 것이고, 누가 용어를 선점했는지 밝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또한 읽지 않았어도 맥락상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문장들입니다. 위에 덧글을 달아주신 분들 모두 읽기 어려워하시지 않았기에 덧글을 다셨겠지요.
오히려 제가 인문학적 함의 없이 사용한 것은 주체와 객체라는 용어입니다. 제가 이 두 용어를 사용해 퀴어퍼레이드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과 다른 수사를 끌여들여온... 더 보기
오히려 제가 인문학적 함의 없이 사용한 것은 주체와 객체라는 용어입니다. 제가 이 두 용어를 사용해 퀴어퍼레이드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과 다른 수사를 끌여들여온... 더 보기
저 표현(용어)들은 제것이 아니라는 표시일 뿐입니다. 제 생각을 전달하는데 사용한 용어가 제가 읽은 책의 저자가 최초 사용한 것으로 제 것이 아닌 것을 표시한 것이고, 누가 용어를 선점했는지 밝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또한 읽지 않았어도 맥락상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문장들입니다. 위에 덧글을 달아주신 분들 모두 읽기 어려워하시지 않았기에 덧글을 다셨겠지요.
오히려 제가 인문학적 함의 없이 사용한 것은 주체와 객체라는 용어입니다. 제가 이 두 용어를 사용해 퀴어퍼레이드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과 다른 수사를 끌여들여온 것이고, 이 두 용어야 말로 기아트윈스님이 알고계시는 인문학적 맥락없이 읽혀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글도 그런 식으로 전개했구요. 주체와 객체라는 용어에 얼마나 많은 인문학적 함의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 제가 인용한 소설의 도입부의 구멍뚫린 시트의 사례를 통해 제 글 안에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가 인문학적 함의 없이 사용한 것은 주체와 객체라는 용어입니다. 제가 이 두 용어를 사용해 퀴어퍼레이드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과 다른 수사를 끌여들여온 것이고, 이 두 용어야 말로 기아트윈스님이 알고계시는 인문학적 맥락없이 읽혀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글도 그런 식으로 전개했구요. 주체와 객체라는 용어에 얼마나 많은 인문학적 함의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 제가 인용한 소설의 도입부의 구멍뚫린 시트의 사례를 통해 제 글 안에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문장으로 써야할 것 같지만 단순한 의문이 드는 점이 있는데요. 주체와 객체, 시선과 타자 등으로 표현되는 권력에 대한 묘사는 이제 흔한 것이죠. 물론 최신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폐기된 얘기겠지만 이런 관점 자체가 남성성의 시각이 아닌가 싶어요. 시선을 주고 욕망하는 자가 주체가 아니라 시선을 빼앗고 욕망을 받는 자가 주체일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런 주체를 여성적 주체라고 서술하면 현대 페미니스트들에게 대차게 까이겠지만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의 강력함과 주체성이란 오래된 레파토리로 만국 공통 아니겠습니까?
시선을 강탈해오는 ...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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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문장으로 써야할 것 같지만 단순한 의문이 드는 점이 있는데요. 주체와 객체, 시선과 타자 등으로 표현되는 권력에 대한 묘사는 이제 흔한 것이죠. 물론 최신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폐기된 얘기겠지만 이런 관점 자체가 남성성의 시각이 아닌가 싶어요. 시선을 주고 욕망하는 자가 주체가 아니라 시선을 빼앗고 욕망을 받는 자가 주체일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런 주체를 여성적 주체라고 서술하면 현대 페미니스트들에게 대차게 까이겠지만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의 강력함과 주체성이란 오래된 레파토리로 만국 공통 아니겠습니까?
시선을 강탈해오는 퀴어 퍼레이드의 노출이 억압에 대한 표출이라면 그것이 표출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욕망 받는 자로서의 여성적 주체가 될 수 있어서가 아닌가 그런 생각입니다.
별개로 동성애에 대한 혐오 정서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자체나 그 혐오 정서 자체에 대해서 저는 사실 별 느낌이 없습니다. 특히 노출에 대한 혐오감을 이유로 들면서 뜨뜻미지근하게 \"좀 그렇지 않아?\"라는 표현을 하는 사람한테는 더욱 더요. 가장 큰 이유는 내 일이 아니라서 겠지만, 동성애에 대한 혐오 정서에 분노하는 것은 보편 타당한 인권 개념에 의거한 것이라 조금 더 이성적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직관적 판단이 먼저 작동한 것일테니까요. 노출 핑계를 먼저 대는 사람은 직관적 거부감에 대해서 그나마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내놓는 사람입니다. 동성애의 직접 이해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그나마 좀 더 말이 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설명해줘야겠죠.
시선을 강탈해오는 퀴어 퍼레이드의 노출이 억압에 대한 표출이라면 그것이 표출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욕망 받는 자로서의 여성적 주체가 될 수 있어서가 아닌가 그런 생각입니다.
별개로 동성애에 대한 혐오 정서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자체나 그 혐오 정서 자체에 대해서 저는 사실 별 느낌이 없습니다. 특히 노출에 대한 혐오감을 이유로 들면서 뜨뜻미지근하게 \"좀 그렇지 않아?\"라는 표현을 하는 사람한테는 더욱 더요. 가장 큰 이유는 내 일이 아니라서 겠지만, 동성애에 대한 혐오 정서에 분노하는 것은 보편 타당한 인권 개념에 의거한 것이라 조금 더 이성적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직관적 판단이 먼저 작동한 것일테니까요. 노출 핑계를 먼저 대는 사람은 직관적 거부감에 대해서 그나마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내놓는 사람입니다. 동성애의 직접 이해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그나마 좀 더 말이 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설명해줘야겠죠.
직관적 판단에 대한 어떤 합리화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의 따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합리화일 뿐이죠. 문명화되고 자아 성찰이 가능한 인간이라면 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직관적 판단을 바꿀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고도의 과정이 불가능합니다. 멍청한 건 나쁜 일이죠. 멍청한 사람들을 똑똑해지게 만드는 일이 혐오 정서에 대해 제3자가 취해야 할 도덕적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에 대한 설득의 과정이 아니더라도 문화적 변화나 여론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저런 혐오 정서를 가진 인간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 더 보기
직관적 판단에 대한 어떤 합리화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의 따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합리화일 뿐이죠. 문명화되고 자아 성찰이 가능한 인간이라면 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직관적 판단을 바꿀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고도의 과정이 불가능합니다. 멍청한 건 나쁜 일이죠. 멍청한 사람들을 똑똑해지게 만드는 일이 혐오 정서에 대해 제3자가 취해야 할 도덕적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에 대한 설득의 과정이 아니더라도 문화적 변화나 여론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저런 혐오 정서를 가진 인간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분노하는 것보단 그냥 조금이라도 말 통할 가능성에 대해 타진하면서 담담히 받아들이는 게 더 결과론적으로 좋지 않나 싶어요. 그렇다고 그에 대해서 분노하고 화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요.
동성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저랑 견해가 다르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은 집단에 둘러 싸여 있다보니 태도가 바뀐 걸 수도 있겠어요. 제가 다니는 병원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특수한 상황이라서 그런가 교수부터 학생까지 전부 일베충입니다 -_-;; 딱히 티내지는 않지만 어쨌든 갈수록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 들이려니 덤덤해진 걸 수도 있겠네요. 오히려 의사 입장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어떤 부분들에서 진보적 입장을 내세운다면 그게 더 가식적으로 느껴졌을 지도 모릅니다. 뭐... 합리화와 변명에 대의의 껍질을 덧쓰는 사람들에게 더 큰 껍질을 썼다고 더 비겁하다고 생각하진 않으렵니다. 오히려 더 큰 껍질이라서 벗겨내기 쉽다는 생각만 하려고요.
동성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저랑 견해가 다르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은 집단에 둘러 싸여 있다보니 태도가 바뀐 걸 수도 있겠어요. 제가 다니는 병원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특수한 상황이라서 그런가 교수부터 학생까지 전부 일베충입니다 -_-;; 딱히 티내지는 않지만 어쨌든 갈수록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 들이려니 덤덤해진 걸 수도 있겠네요. 오히려 의사 입장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어떤 부분들에서 진보적 입장을 내세운다면 그게 더 가식적으로 느껴졌을 지도 모릅니다. 뭐... 합리화와 변명에 대의의 껍질을 덧쓰는 사람들에게 더 큰 껍질을 썼다고 더 비겁하다고 생각하진 않으렵니다. 오히려 더 큰 껍질이라서 벗겨내기 쉽다는 생각만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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