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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9/11 15:24:28
Name   별빛속에
Subject   매미 이야기
소수매미란 것을 알고 있는가?
주기매미라고도 불리는 이 매미들은 수명이 13년, 17년과 같이 소수로 되어 있는데..
사실 이런 상식은 이 이야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소수매미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코 상식테스트에서 수준 이하의 점수를 받고 어떻게든 상식인 포지션을 회복하고자하는 발버둥은.. 아니다. 아닐 것이다.

보통 매미는 시끄러운 소리와 달리 눈에 잘 안 띈다. 매미인가 하고 자세히 보면 허물일 경우도 많다.
어렸을 때에는 곤충채집에서 매미를 잡아 오면 일약 스타가 될 정도였다.
지금은 보여도, 안 보여도 특별한 의미는 없다.

산책길에서 매미를 발견했다.

이 매미는 어딘지 모르게 의욕도 없고 소리도 작아서 2세를 남길 가망이 많지 않아 보였다.

나를 보더니 이야기를 꼭 하고 싶은 눈치인데 나는 갈길을 가고 싶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으나 불러세우는 소리에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맴맴소리는 작으면서 부르는 소리는 어찌나 우렁차던지.
.......

결국 찻상 하나 사이에 두고 매미의 하소연을 듣는 처지가 되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더 가깝고 피부에 와 닿았단 말이죠.
당신이 레트로 컴퓨터나 옛날 게임, 만화를 보며서 그때는 그랬지 하고 느끼는 것처럼.

땅속에 있을 때는 바깥에만 나가면 꿈같은 날들이 펼쳐질거라 생각했어요.
푸른 하늘 속을 마음껏 날며 우렁찬 울음소리에 피어나는 나무진액처럼 달콤한 로맨스..

그렇지만 곧 현실에 부닥쳤어요.
요즘 소음공해로 기본 울음소리 레벨이 확 올라갔단 말이에요.

근데 태어날 때부터, 아니 우화할 때부터인가?
울림통도 작고 요령이 없는 저는 소리가 남의 반 밖에 안 되더라고요.
힘차게 울어봐야 다른 매미의 소리에 묻힐 뿐이고..
그나저나 말매미 소리는 왜 이렇게 크답니까?

경쟁을 피해서 조용한 나무로 이사가 거기서 작은 소리로 울어 보았지만..
마침 근처에 있던 집에서 시끄럽다고 빗자루로 쫓아내려고 하고 암매미도 없는 것 같고, 그쪽 진액도 요즘 입맛에 맞지를 않아서 진퇴양난이랍니다.

차라리 예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 허물을 벗었던 그 나무로 가 봤어요.
내가 벗었던 허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군요.
다시 들어가 보려고 애를 써 봤지만..
그건 누워서 과자만 먹다가 비둔해진 몸으로 옷장에서 낡은 교복을 꺼내 억지로 입어보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서글픔에 그만두었답니다.

어떻게 해도 그때로 돌아갈 순 없어요.
그때는 그때죠. 그래, 굼벵이로서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던 것을.. 그땐 알지 못했죠.
이 푸른 하늘을 -- 좀 습하고 덥긴 하지만 -- 날아다니는 지금, 땅속에서 뒹굴던 그때가 더 좋게 느껴지다니.

남은 시간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이 작은 소리로 어떻게든 짝을 찾아 볼까요? 가능성이 적더라도? 아니면 옛 선인들이 매미를 보고 품었던 마음처럼 선비연하면서 고고하게 시를 읊다가 쓸쓸하게 죽어갈까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깐. 그런데 로맨스라고는 하지만 짧은 달콤함 뒤에 바로 죽는 거 아닌가? 연어처럼.
나의 삶의 파편이 이어진다는 뿌듯함은 있겠지만.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매미는 그걸 미리 알면 안돼요. 그러면 매미들의 명맥이 끊길 수도 있어요. 세상은 그런거라고요. 모든 비밀이 다 드러나면 세상이 지속될 수 없는걸요.

나는 조용히 식은 차로 목을 축였다.
방구석 폐인에 가까운 내게 있어 그에게 해 줄 희망적인 말 따위는 아직 생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도 비슷하지 어쩌구 하면서 쓸데없이 핀트나간 공감을 해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찻잔 안을 들여다 보다 말했다.

그래도 말이지,
이 땅에서 밟아가는 시간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대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그게 뭐냐고 하면 각자가 가진 다른.. 색깔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 색깔에 시간이 합쳐지면서 의미가 부여돠는거지. 꽃이 지면 추레해 보일 수 있어도 그 시간은 끝까지 함께 하기에 더 풍성한 맛이나 향기 같은 걸 남기는 것 같아.

뭐라고 말을 잘 못 잇겠는데..
이제 내리막길에서 크게 바랄 것 없는 작은 삶이라도, 기다림과 그 안에서 나의 빛깔 그리고 시간은 내가 자아낼 수 있는 작은 무늬를 가진 천의 재료가 될 것 같아. 그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 안될지는 중요하지 않아. 기억되든 않든 시간에 새겨져 가는 거니까..
이봐 졸고 있어?

이제 시원한 바람 불어 오는데
대청마루의 옛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간에서 그의 작은 울음소리.. 아니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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