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8/23 00:27:55수정됨
Name   아침커피
File #1   Perl_programming_language.png (36.7 KB), Download : 9
Link #1   https://crmn.tistory.com/151
Subject   펄 쓰던 개발자의 회상


십여 년 전, 스크립트 언어를 배워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비주류 좋아하는 성격 탓에 당시 한창 뜨던 중인 파이썬을 안 하고 슬슬 지기 시작하던 펄을 공부했었다. C로 - 그러고보니 C++도 아니고 - 문자열 처리 코드 짜고 있던 나에게 펄은 신세계였다. 요즘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지만 배열 마지막 원소를 arr[-1] 같이 -1이라는 인덱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C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펄은 참 재미있는 언어였다. 한국어로 치자면 "거시기"에 해당되는 변수가 자동으로 존재한다. $_ 라는 변수인데, 그 덕에 코드를 듬성듬성 짤 수 있었다. 다른 언어에서는 명확하게 변수와 값을 지정해주었어야 할 상황에서 펄은 "거시기" 변수만 불러와 보면 얼추 필요한 값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변수를 생략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if문과 함께 unless 문도 있었다. Unless 문의 작동방식은 if문의 정반대. 즉 if (true)는 unless (false)와 같고... 이런 조건문을 겹쳐서 if ( unless ( if ( true ) ) ) 같은 식으로 볼썽사나운 코드를 짜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이런 코딩이 가능하다 보니 남이 짠 펄 코드를 이해하는 건 정말 어렵고 어쩔때는 내가 예전에 짠 펄 코드도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그래서 펄 사용자가 많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고. 이런 펄의 특성은 "어떤 일을 하는 데에는 하나 이상의 길이 있다 (There's more than one way to do it, TMTOWTDI)" 라는 펄의 슬로건에 잘 나타나 있다. 펄 코드에는 개발자의 개성이 원없이 묻어난다. 어쨌든 나는 펄이 참 좋았고, 펄은 내 석사 연구의 꽤 많은 부분과 함께 했다.

펄과 완전 반대편에 있는 언어가 바로 파이썬이다. 파이썬에서 import this를 치면 파이썬의 철학이 죽 나오는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작업을 하기 위한 하나의, 되도록이면 단 하나의 자명한 방법이 존재한다. (There should be one-- and preferably only one --obvious way to do it.)" 그래서 파이썬은 띄어쓰기를 몇 칸으로 할 것인지까지도 한번 정하면 끝까지 지켜야 한다. 펄은? 펄 사용자들끼리 신나서 자주 하는 게 어떻게 하면 한 줄 안에 코드를 잘 구겨넣을까 하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여러모로 펄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파이썬은 영어를 닮았다. 한국어에서는 온갖 생략이 가능하다. "사랑해" 라고 하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인 줄 다 안다. 영어에서는 "Love" 라고 하면 못 알아듣기 때문에 단 둘이 있어도 굳이 "I love you" 라고, I가 you를 love한다고 다 꼬치꼬치 말해줘야 한다. 우리는 사과를 먹었으면 됐는데 영어에서는 굳이 사과를 한 개 (an apple) 먹었는지 두 개 이상 (apples) 먹었는지를 말해줘야 한다. 영화 황산벌에 나오는 계백 장군의 대사인 "그러니께 이번 여그 황산벌 전투에서 우리의 전략 전술적인 거시기는, 한 마디로 뭐시기 할 때꺼정 갑옷을 거시기한다, 바로 요거여. 알겄제?" 는 영어로는 말이 안 되고, 번역해 봐야 억지스럽다.

이런 다양성, 다의성은 인간의 언어에서는 언어를 풍요롭게 하고 문학의 비옥한 토양이 되는 존재이지만 프로그래밍 언어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프로그래밍에서는 간단함과 명료함이 미덕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파이썬 사용자는 많아지고 펄 사용자는 줄어만 간다.

예전, 대략 버전 관리 시스템으로 git이 아니라 cvs나 svn을 쓰던 때, 수많은 개발자들의 땀과 눈물이 서려있을 Visual C++ 6.0이 현역이었을 때, 간혹 3.5인치 디스켓 드라이브를 볼 수 있었을 때, 안드로이드는 나왔는데 안드로이드 스튜디오는 없어서 이클립스로 앱 만들던 때, 도스에서 터보C를 쓰던 때의 코딩은 참 자유로웠다. 참조할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으니 다 개발자가 어떻게든 직접 해야 했고, 그러다보면 좀 삐그덕대더라도 분명 내 손에서 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기곤 했다. 홈페이지도 메모장에 직접 html 코드를 쳐 가면서 만들곤 했지.

요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거대해지면서 많은 부분이 규격화되었다. 이미 남이 만들어놓은 코드를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으로 잘 가져다가 쓰는 게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예전처럼 내가 다 하려다가는 "왜 바퀴를 재발명하고 있냐?" 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깃허브에서 여러 코드를 받아오고 스택 오버플로우에서 이것저것 찾아서 어떻게 하다 보면 금세 프로그램 하나를 뚝딱 만들 수 있다. 요즘 간단한 스마트폰 앱은 파워포인트 만들듯이 마우스로도 만들 수 있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속 한 구석이 왠지 허전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내가 만든 부분이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펄을 마지막으로 써 본 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옛 생각이 나서 인터넷에서 펄을 검색해 보니 5년 안에 사용자가 사라질 언어 중 하나로 펄이 꼽혀 있었다. 바퀴를 재발명하던 때가 그립다. 스택 오버플로우 없이 프로그램을 짜던 때가 그립다. 괜히 커맨드 창에서 perl을 실행시키고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창을 닫았다. 기분이 참 $_ 한 오늘이다.



26
  • 회상이란 제목이 잘 어울리는 글이네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958 기타펠리세이드 3.8 AWD 4천 km운행기 17 맥주만땅 19/03/13 12181 16
13477 기타페페로니 피자 1티어 어디인가요 17 작은연이 23/01/12 3546 0
5978 일상/생각페이코 좋당 'ㅇ'.. 7 Sereno설화 17/07/19 3281 0
1702 꿀팁/강좌페이코 이벤트 꿀빠세요 (티몬 1만원 할인, 벅스 6개월 990원) 5 Toby 15/12/04 8528 1
5374 IT/컴퓨터페이스타임 오디오를 능가하는 강자가 나타났다(!) 17 elanor 17/04/05 5890 4
7365 IT/컴퓨터페이스북 정보 유출 확인 주소 5 Leeka 18/04/11 4949 0
3096 꿀팁/강좌페이스북 동영상 게시판에 퍼오기 3 Toby 16/06/22 5146 1
8437 스포츠페이롤로 알아보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2019년 우승 가능성. 6 AGuyWithGlasses 18/10/30 4424 2
9530 경제페북펌) 한일 경제 분쟁에 대해 새로운 시각 30 소원의항구 19/08/09 6518 2
13336 정치페미니즘-반페미니즘 담론은 정점을 지났는가 100 카르스 22/11/20 5006 2
4837 사회페미니즘 단체들의 여성징병제 반대가 이중잣대인가? 23 타키투스 17/02/11 9163 0
9956 일상/생각페미니즘 계급문제 노동문제로의 환원 공정과 평등 80 멍청똑똑이 19/11/08 7247 39
9360 일상/생각페미니스트로서 트렌스젠더 이해하기? 18 와하하하 19/06/28 5385 4
15055 방송/연예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5 알료사 24/11/20 3316 32
3812 게임페르소나5 플레티넘 트로피 취득 후 감상 5 YORDLE ONE 16/10/02 5071 0
3528 역사페라리와 프란체스코 바라카 2 모모스 16/08/17 7447 2
5289 사회페다고지와 안드라고지 사이 13 호라타래 17/03/25 11669 6
8812 스포츠페-나-페-나-페-나-조-조-조 8 손금불산입 19/01/27 4540 0
2902 영화펑꾸이에서 온 소년 (1983) _ 젊은이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 2 리니시아 16/05/27 6531 1
11839 정치펌글)20대 남자의 악마화 작업은 중단되어야 한다 38 cummings 21/07/02 5441 4
4056 정치펌)최순실 정국을 보는 눈 8 님니리님님 16/11/02 4660 0
6769 의료/건강펌) 문케어의 미래를 알수 있는 치과 사랑니 발치 32 tannenbaum 17/12/15 6098 5
12178 게임펄어비스 - DokeV 게임 플레이 영상 공개 6 2막4장 21/10/17 4166 2
13103 IT/컴퓨터펄 쓰던 개발자의 회상 30 아침커피 22/08/23 3743 26
6839 방송/연예퍼포먼스의 차이와 성적의 차이, 그 간극. 22 레지엔 17/12/28 4441 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