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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2/21 17:20:21수정됨
Name   심해냉장고
Subject   노래가 끝나고
가장 인상깊은 영화의 엔딩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엔딩이었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같은 병실의 두 젊은이가, '죽기 전에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글귀에 혹해 바다를 보러 떠난다. 어차피 죽을 거, 가보자고. 병원을 떠나기 전날 새벽, 병원 식당에 잠입해 테이블에 레몬을 잔뜩 던져둔 채 데낄라도 한 병 마셔주고 그렇게. 뭐 그렇게 그들은 좌충우돌 사고들에 휘말리며 바다를 보러 간다. 중간의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인상깊었는데,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는다. 차가 없어서 길가의 차를 훔쳤는데 그게 하필 거대 범죄조직의 마약 운반차였나 해서 결국 조직의 두목에게 끌려가 처맞고, 사정을 들은 두목이 웃으며 '그래, 바다를 보러 가라'고 흔쾌히 차를 내주는 그런 에피소드도 있었던 거 같은데. 그렇게 그들은 결국 바다를 본다. 바다를 보며 데낄라를 마시고, 한 명이 쓰러진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쓰러진다. 죽은 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죽으면 왠지 너무 싸구려 엔딩 같으니까. 그저 너무 취하고 피곤해서 쓰러진 거겠지. 하지만 죽은 거라도 나쁘진 않다. 불과 한 문장만에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아무튼 바다, 시한부의 젊은이들, 데낄라란 인상적일 수 밖에.

소설로 가보자면 아무래도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고르도록 하자. 마찬가지로 너무 오래 전에 읽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농담 한 마디 잘못했다가 역사와 정치의 수레바퀴에 농담처럼 으깨진 사람들의 일대기가 흐르고,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은 미묘한 복수를 계획한다. 동네의 축제날, 주인공은 나쁜 마음으로 이런저런 약병과 이런저런 복수심을 준비해두는데, 독약병과 설사약의 병이 바뀌고, 마셔야 할 사람이 바뀌고, 온동네가 똥통이 되고, 그렇게 모든 게 마치 농담처럼.

하지만 왠지 나는 좋은 엔딩의 이야기보다는, 엔딩 이후의 이야기들을 잠깐 다뤄주는, 에필로그가 재밌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영광스러운 호드의 일원이었던 나는, 마지막 뒤에는 찐막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니까. 때에 따라 찐찐막도 괜찮다. 신데렐라 결혼 일년만, 성격차이로 헤어져 평생 혼자 살았을지 아닐지 모르고 싶지 않다는 거다. 알고 싶다. 아니, 굳이 모르고 알고의 문제가 아니다. 뭐라도 떠들고 싶고 뭐라도 듣고 싶은 것이다.

늙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종종 여러가지로 인생의 한 막이 끝난 거 같은 느낌을 받곤 하는데(딱히 엄청나게 나쁜 일이 여러개 있는 건 아니다),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히도 나는 오늘도 눈을 뜨고 내일도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딘가 엔딩 이후의 삶을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써볼까, 라는 건 시제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한 오년쯤 뒤에 '아 5년 전의 내가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구나' 라고 평가하는 건 가능할 지 몰라도. 지금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딘가 멋쩍은 느낌이라서. 아, 시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의지적인 문제인가. 아무튼.

그냥 최근에 읽은 소설의 마지막, 아니 찐막이 너무 유쾌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화자인 '내'가, 20년 전 기억을 뒤적여서, 같은 하숙집에 기거하는 잘생긴 의대생 친구와 그 친구 산책 루트에 사는, 부잣집에서 첩살이하는 가련한 예쁜 여자의 애끓는 연애담(사실 둘이 한 건 눈빛 두어번 교환한 게 전부다)을 굉장히 자세하고 아름답게 끼적인 건데, 서사의 끝도 좋았지만 마지막의 반 페이지가 너무 좋았다.

「이 이야기는 당시의 기억들과, 이후로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어 들은 이야기를 엮어 정리한 것이다. 독자들은 나에게 물을 지도 모른다. '그녀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떤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는가?'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도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야기의 범위 밖에 있다. 단지 내가 그녀의 연인이 될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은 세삼 논할 여지도 없으니, 독자들은 쓸데없는 억측을 삼가기 바란다」

모리 오가이, 「기러기」란 소설이다. 이야기의 범위 밖에 있는, 진짜 이야기의 끝. 잘생긴 의대생 친구는 결국 그녀와 말한번 못 나누고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녀는 그 후로 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일들이 있었고, 내가 이걸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면, 아 근데 나도 그여자랑 뭐 한 건 아닌데. 라고 하면 좋은 고전소설을 너무 천박하게 요약하는 거 같지만, 뭐 어떤가. 이것도 이야기의 범위 밖의 이야기인데. 몸이 좀 안 좋은 채로 누워 뒹굴거리며 이런 걸 읽고 있자면, 아무래도 이런 '찐막'의 감성에 잠식당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파서 누워있는 채가 엔딩이라면, 일어나 저런 걸 읽고 이런 걸 끄적이고 피식거리고 있는 게 찐막이란 느낌이고 막.

어린 시절 제일 충격받았던 '찐막'은 아무래도 만화 '시가테라'였던 거 같다. 이나중 탁구부로 유명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제법 심각하고 어둡고 시리어스한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왕따 소년이 어쩌다 예쁜 여자를 만나 이런저런 에피소드-별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기억이다. 납치라던가. 정신병자의 살인사건이라던가. 교통사고로 친구가 죽는다거나 뭐 대충 그런 이야기들-를 거쳐, 주인공은 마침내 '이렇게 살면 안 되. 제대로 살아야지. 멀쩡한 어른이 될거야’라고 결심하며 잠든다. 끝. 이 나고 최종장. 임신한 여주인공의 행복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렇게 남주의 퇴근길로 이어지고, 어, 어라, 남주의 여자친구가 나온다. '왜 임산부를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어? 구멍이 뚫릴 정도로. 너 전에 말했던 아기 생겼다는 친구, 그냥 친구가 아니라 전여친이지?' 사실 둘은 헤어져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었습니다, 가 뻔한 반전의 엔딩으로 제시되었다면 어딘가 아쉬울 수 있겠지만 본편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멀쩡한 어른이 될꺼야'로 끝난 것이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일의 이야기. 그러니 최종장은 일종의 부록 같은 찐막.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장난스러운 'end. not to be continued' 찐막. 뭐, 작가나 다른 독자가 어떻게 읽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본편의 서사가 끝난 이후로 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끝의 끝에 또 이런 이야기가 있을 테지만, 이야기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음. 끝의 끝. 찐막. 영화는 음, 역시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인가. 마찬가지다. 영화의 끝으로 볼 수도 있고, 모든 서사가 끝난 이후의 마지막 한 씬으로 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왠지 끝은 남주가 울면서 떠나는 거고 다시 영화의 도입부 같은 여주의 '살아가기'는 끝 후의 끝, 찐막의 감성이고. 뭐, 이야기가 끝나도 다들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다. 나쁘지 않게.

격변의 시기 격변의 또라이 청춘들이 춤추는 소설, 무라카미 류의 식스티 나인의 에필로그도 뻔하지만 좋았다. '1968년, 이 해에, 도쿄대학은 입시를 중단했다. 비틀즈는 화이트 앨범과 옐로 서브마린과 애비로드를 발표했고, 롤링 스톤즈는 최고의 싱글 홍키 통크 우먼을 발매했으며, 머리가 긴, 히피라 불리는 친구들이 사랑과 평화를 외치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드골이 퇴진했다. 베트남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여고생들은 탐폰이 아닌 생리대를 쓰고 있었다.' 앨범 몇 장과 사건 몇 개로 요약될 수 있는 혼란과 환상의 시기, 우당탕탕 남고생들의 뻘짓과 반란들이 한바탕 이어지고, 학교와 선생과 제도와 등등에 쳐맞고, 청춘의 이야기는 끝난다. 에필로그는 개조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십년 뒤인가 이후를 그린다. 68년의 감성 그대로 사는 녀석들도, 번듯하고 멀쩡한 녀석들도, 죽은 녀석들도 있는. 이야기는 끝나지만 끝나지 않고 그렇게 찐막이. 그리고 또 계속 살아가겠지. 생각해보니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대체로 언제나 에필로그가 붙어있던 거 같기도 하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도 그랬고, 교코도 그랬고. 그래서 한때 그렇게 좋아했었나. 뭐, 지금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근데 어렸을 때나 지금 생각에나 이사람의 에필로그 코멘트는 좀 과해. 본인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려나. 이십대에 때 쓴 작품을 오십이 넘어 읽는 건 무슨 느낌일까. 라고 쓰고 찾아보니 이제 일흔이시네 무라카미 류 선생님. 얼마나 많은 소설과 삶을 시작하고 끝내고 했을까, 일흔동안.

단정하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도 물론 좋지만, 꼭 그렇게 한마디 더 하고 싶고 한마디 더 듣고 싶은 게 노인의 감성이렸다. 끝의 끝이 쌓이게 되면, 나중에 돌아보면 이또한 새로운 노래 한 곡이려나. 뭐, 사실은 끝이 아닐 지도 모르고. merry go round라는 곡이 있다. 5분 30초에 달하는 꽤 긴 곡인데, 뭐 제목답게 삶은 회전목마처럼 돌고 도니까 힘내고 봄에 다시 만나요, 봄에 만나요, 봄에 만나요, 봄에 만나요 하고 끝나는 노래다. 그렇게 멜로디가 작아지며 끝나고는, 메인 멜로디가 다시 커지며 돌아오고, 그리고는 마침내 끝난다. 그래서 5분일 노래가 5분 30초가 된다. 돌고 도는 봄에 대한 연출이려나. 안타깝게도 이 노래를 부른 hide 선생은 봄에 돌아가신 바람에, 팬들은 봄에 이걸 듣다가 울게 되버리는 문제가 있다(이걸 쓰다가 잠깐 노래를 켜고, 듣고 잠시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그렇게 봄은 오니까.

4-5분짜리 노래가 시작되고 끝나고 한두시간 분량의 단편 소설이나 영화가 시작되어 끝나고 끝난 줄 알았는데 이어지고 이어진 줄 알았는데 새로운 시작이고 하는 게 인생이려나, 그렇게 아무튼 한 계절의 순환이, 겨울의 노래가 끝나고, 이제는 봄이니, 좀 더 상쾌해져야지. 그러니 아무쪼록 상쾌해집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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