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11/18 02:55:48
Name   BriskDay
Subject   기면증 환자로 살아남기 - 1
많이 겪어왔고, 어느 정도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네요. 답답한 게 가라 앉질 않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치면 좀 나을까 싶어 그냥 글을 써봅니다. 2편이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2번째 쓸 때 또 다른 제목 붙이기가 고민 되니까 1편으로 해볼게요.

https://www.youtube.com/watch?v=llo58EK5UfI&t=31s

기면증에 대해서 모르시거나, 잘못 알고 계시는 분이 있을 수 있으니 배경 설명을 먼저 하는게 낫겠지요. 정확한 설명은 위쪽 유튜브를 봐주세요. 보기 싫거나 귀찮으신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 드리자면, 기면증은 잠을 참을 수 없는 병입니다. 사람은 기상 상태일 때, 하이포크레틴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 녀석이 사람을 깨어있게 하는데, 기면증 환자는 이게 일반인보다 현저히 적어요.

그래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잤는지 여부와 상관이 없이, 낮에 졸리게 됩니다. 다른 증상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개인 차가 심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수면 발작과 자동 행동이 있는데요. 수면 발작은 그냥 졸음이 오는 겁니다. 컴퓨터 게임 하다가, 수업 듣다가, 영화 보다가.. 갑자기 졸려와요. 피곤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잠깐 자면 개운해져요.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HP 100 인 상태인데 간헐적으로 HP 1 이 되는 상태 이상입니다. 5 ~ 20분 졸고 나면 다시 HP 100 이 되요.

자동 행동은 이게 정의가 정확히 맞는지, 기면증 환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그런지는 모르겠네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존 순간을 인식하지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글을 읽다가 10분을 졸았다고 쳐볼게요. 10분 내내 푹 자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아닌 경우는, 중간에 눈을 떠서 글을 읽습니다. 그리고 졸고, 깨서 글 읽고 반복. 나중에 일어나면, 제가 존 지도 모르고 글을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기억을 해요. 대화도 해봤고, 수학 문제도 풀어봤고, 학교 시험도 쳐봤습니다. 물론 제 컨디션은 안 나왔지요.

제 발병 시기에 대해서는 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인데,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 때로 추정됩니다. 저 시기가 추정인 이유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제가 처음 학교에서 졸았던 게 저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졸기는 커녕, 학교에서 졸리다는 생각조차 못 해봤어요. 다른 하나는 제가 실제로 검사를 받고 확진 받은 것이 군대 제대 후 대학교 2학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기면증인지 의심도 하지 못 했죠. 보다 정확히는, 기면증이란 병이 있는지도 몰랐죠.

보통 얘기 되는 잠 깨기 위한 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저도 여러 가지 시도했었죠.

1. 커피, 박카스 - 효과 없는 것 같아요.

2. 레드불, 핫식스 - 1캔 섭취 시 효과 없었고요. 2캔 이상 섭취 시 어느 정도 버틸만했는데, 졸린 타이밍이 있는 건 차이가 없었어요. 이 음료 자체가 제가 기면증 진단 받은 이후에 알게 됐어요.

3. 허벅지 찌르기 - 만화나 소설 같은 미디어에서 한번씩 나오길래, 볼펜으로 찔러가면서 해봤습니다. 처음에는 좀 괜찮은가 했는데 소용 없더라고요. 나중에는 펜 쥔 채로 찌르다 잠들어 버려서 패스.

4. 졸릴 때마다 엄지 따기 - 3번에 적응이 되었나 싶어서 대체재 개념으로 생각했던 건데.. 볼펜형 수지침 아시나요? 체할 때 쓰는.. 그걸로 졸릴 때마다 엄지를 땄습니다. 피 닦는다고 휴지로 꾹 누르고 있다가 졸더군요. 한 4번쯤 하니까 옆자리 짝꿍이 이상하게 쳐다봐서 포기.

5. 눈두덩에 물파스 바르기 - 물파스 바른 그 순간에만 효과 있습니다. 물파스 바르고 눈 따갑다고 깜빡깜빡 하다가 1분인가 뒤에 졸아봤어요.

6. 서서 있기 - 이걸 효과가 있다고 봐야 하나 싶은데.. 서서 있는 그 순간은 괜찮은가 싶습니다. 필기 하려고 책상에 기대서 밑줄 치다가 좁니다.

7. 세수 하기 -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졸면 화장실 가서 머리 감고 오라던 분이셨습니다. 머리 감고 세수하고 와서 졸아서 다시 갔다 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저는 많이 졸았습니다. 덕분에 욕도 먹었구요. 시험시간 때 조는 놈이 어딨냐, 제정신이냐.. 어제 밤에 딴 짓 하느라 그런 거 아니냐.. 그리고 그 말 뒤에 붙는 게 상식적으로 밤에 8시간 자고도 학교에서 조는 게 말이 되냐.. 사실 위의 말들이 정말 듣기 싫어서 시도한 건데, 보시다시피 다 실패했죠. 그리고 체념했습니다. 처음에는 반발심이 일었는데, 나중 가니 내가 정말 의지 박약이 맞는게 아닌가. 얼마나 게으르면 잠 하나 참을 수가 없냐,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참는데 난 왜 안 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눈꺼풀을 없애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살고, 군대에서도 여러 일들이 있었고.. 제대하고 나서, 대학 동기 한 명이 혹시 너 기면증 아니냐 하더군요. 자기가 어제  TV 프로그램에서 봤다고. 여러모로 찾아보니, 얼추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진단을 바로 받으러 갔을까요? 아니요.

전 두려웠습니다. 혹시나, 만에 하나, 내가 기면증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진단을 받아버리면, 남들의 그 지적이 과학적으로 증명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그거 아세요? 기면증 검사 비용이 약 100만원 가량 됐었습니다. 단순히 기면증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100만원 쓰고 게으름뱅이 인증서 획득하는 건 아닌가 겁이 났었어요. 한 1주 고민하고 나서 결론 지은 게, 어차피 반쯤 체념하고 살았는데 게으름뱅이 확정된다고 달라지는 거 있나? 100만원 쓰고, 나아질 가능성 있으면 할만한 도박 아닌가?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전 기면증이 맞았습니다. 의사한테 설명을 들었고, 약을 받았죠. 많이 나아졌습니다. 모든 게 끝난 줄로만 알았습니다.

==========================================================================

사실 뒤에 더 쓴 내용이 많았는데, 옛날 사내에서 커뮤니티 글이 들켜서 난리 난 사람도 있는 데다, 시대가 시대라 너무 자세하게 적었다가 큰일 날까 싶어서 후다닥 지웠습니다. 신원 특정 안 되도록 수정하려니 거진 픽션이 되어버리고, 다시 다른 내용으로 채우기도 어색한데, 안 올리자니 또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올려봅니다. 이런 거 보니 의지 박약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19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134 일상/생각영화 <색, 계> (와 아주 살짝 관련된 이야기) 16 black 16/11/11 4828 17
    9379 일상/생각. 4 BLACK 19/07/02 4550 17
    1438 일상/생각메가박스 어플쓰다가 데이터 날리는 경험을 했네요. 8 black tea 15/11/03 7199 0
    10292 댓글잠금 기타홍세화 칼럼, "민주당에는 민주주의자가 없다" 28 Blackmore 20/02/15 7036 13
    207 기타2015년에 다시 보는 2003년 사스(SARS)대책 협조문 5 Blue Sky 15/06/04 8580 0
    448 기타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10살 소년 엘리엇- 5 Blue Sky 15/06/27 8252 0
    157 기타[계층] 프라탑이 쌓여가면서 5 BLUE_P 15/06/01 7994 0
    7271 일상/생각3월은 탈주의 달... 4 BONG 18/03/23 4689 0
    7913 요리/음식랩노쉬(Labnosh) 푸드쉐이크 시식기 5 BONG 18/07/22 7741 3
    12282 일상/생각기면증 환자로 살아남기 - 1 4 BriskDay 21/11/18 4110 19
    11621 일상/생각간편하게 분노하는 시대 30 BriskDay 21/04/27 4723 25
    8887 스포츠[ACL] 2019 ACL 조편성이 완료되었습니다. 4 Broccoli 19/02/19 4703 1
    6483 일상/생각알고 있는 것, 알려줘도 되는 것 1 Broccoli 17/10/30 3308 1
    8021 스포츠[축구] 2018 하나은행 FA컵 16강이 끝났습니다. 2 Broccoli 18/08/08 4600 0
    9091 스포츠[FA컵] 대이변의 날입니다! 1 Broccoli 19/04/17 3537 2
    10022 스포츠[K리그1] 프로축구 연맹에 닥터스트레인지라도 있나요? (38R 프리뷰) 4 Broccoli 19/11/24 6089 5
    10785 스포츠[하나은행 FA컵] 연장으로 가득한 16강 결과 1 Broccoli 20/07/15 4342 3
    11072 스포츠[K리그] 1부, 2부 모두 여러모로 중요한 이번주 일정입니다 8 Broccoli 20/10/18 3453 0
    11425 일상/생각회사 동료분과 티타임 후에 많은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3 Brown&Cony 21/02/17 5433 12
    8904 일상/생각14년차 직장인 잡설 14 bullfrog 19/02/27 5229 12
    9084 일상/생각그냥…그날의 기억 4 bullfrog 19/04/16 4368 16
    11417 도서/문학[서평] 인에비터블(The Inevitable, 2016) 4 bullfrog 21/02/14 3602 3
    11223 일상/생각아버지께서 긴 여행을 가실 거 같습니다 10 bullfrog 20/12/14 4043 7
    11259 일상/생각여러분의 마흔은 안녕한가요 27 bullfrog 20/12/21 4724 23
    11299 일상/생각올해의 마지막날을 호스피스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15 bullfrog 20/12/31 4163 2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