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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3/02 23:32:07
Name   열린음악회
Subject   자유시 '참변'의 실제원인과 실체
자유시 참변은 국사 교과서에서 짤막히 본 적이 있읍니다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이런 역사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 보는 것도 뭐랄지 나름 신시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옮겨 적어 봅니다.

원글은 개드립의 읽을 거리 판에 안티파굳 님이 작성한 것으로, 핵심이 되는 게오르기예비치의 논문을 직접 번역을 맡긴 게 인상깊습니다.

다만 핵심 논문에 대한 검증은 글쓴이가 본문 내에서 시도하고 있으나, 검증의 엄밀도에 대해서는 홍치넷 횐님..ㅎㅎ 여러분께서 직접 평가해주시길 바라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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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의 실제원인과 실체

안티파굳 2020.07.27

 https://www.dogdrip.net/271899958

난 올해에 우연히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인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의 논문을 보게됐다. 여기엔 자유시 '참변'의 원인과 실체과 설명되어 있었다. 문제는 난 러시아어를 못했고 그 논문 내용은 번역기로 흝어보는 게 다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할 까 고민하다 처음에는 비전문가에 맡겼는데 근거로 쓰기엔 번역이 좋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러시어어 번역 전문가에 맡겨야 했다. 

 

 

(전문가에 맡기니 당연히 100만원이 넘는 돈을 써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러시아어 공부하기에 드는 시간과 돈이 너무 컸다. 전문가에 번역을 맡기는데 드는 돈이 컸지만 현실적으로 저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

다음은 전문가에 번역을 맡긴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의 논문 중 '자유시 참변'에 대한 내용이다. 이 논문은 원래 칼란다리쉬빌리의 범죄 행위에 대한 논문인데 여기에 자유시 '참변'에 대한 내용이 비중있게 나온다.

 

칼란다리쉬빌리의 사진 (http://baik-info.ru/irkutyanka-kalandarishvili)

 

1.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의 논문 중 자유시 '참변'에 대한 설명

 

『곧이어 칼란다리시빌리는 특히 심했던 국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20 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 천여 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러시아로 건너온 폭동의 한인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 나머지는 상해 혁명파로 방향을 잡았다. 반면,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1920 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아무르강 하류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를 이용해 공급 문제와 사적인 갈등을 해결했다. 1920 년 7 월 말, 인민혁명군 에이헤 총사령관과 그의 정치조력자 비샤린은 병사와 군간부들 중에 '직무상 범죄자나 정치사범이 많은' 한중연대를 정리할 것을 명했다. (44: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185. Op.6. D.24. L.601 )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 군대와 정당이 교류한 서신에 따르면, 한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에이헤 총사령관은 1921 년 1 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부대원이자 조선공산당 아무르지역위원회 위원장 이반 다닐로비치 박찬은에게 조선 유격대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고자 2 월 치타 또는 하바롭스크에서 유격대 회의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하고', 부대 사령관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45: 상동. F.221. Op.1. D.376. L.4 ) 당시 극동국 한인부의 모든 부대원들과 사할린 부대 사령관인 김 인노켄티와 박 일리아는 '당내 활동에서 규율을 준수하지 않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사무국 결정에 따라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김과 박은 국가안보국 아무르지역지부의 조사를 받았다.(박은 '모험가인 트랴피씬'의 열성적 옹호자이자 콜차크의 방첩활동 첩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러시아 군대 준위였던 김은 인민혁명군 복무를 회피한 혐의로 1920 년 이르쿠츠크에서 제 5 군대 특별부에 체포된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46: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41 )

 

최관윤을 의장으로 하고, 김관 강동유격대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21 년 3 월 11 일 치타에서 개최된 조선군사비상회의는 특별사할린유격부대 김 사령관과 박 군사인민위원을 파면하고, '연대 해산'을 위해 그들을 전지임시군사법원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분리주의를 니콜라옙스크 중대에 도입하고, 일반병사들과 연대 지휘권 논쟁을 야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예프파 유격대원들이 행한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 박 바실리 전 사령관의 사형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스보보드니시)에서 시골로 이동하면서 김과 박은 ‘사격수들이 평화로운 러시아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허용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한인 유격대의 무장해제와 한인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농민들을 무장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김과 박은 ‘니콜라예프파로 구성된 무책임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만들어 병사들과 조선독립보병연대 지휘부에 패닉을 야기했다’. (47: 상동. L.51) 

 

무정부 상태는 결국 트랴피씬의 독재 하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파르티잔의 규율을 무너뜨렸다. 1921 년 4 월 23 일 에이헤가 슈먀츠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은 사할린 부대가 식량 부족과 ‘부대장의 부재’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사 “농민들과 한인들 간에 공개적인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부대는 인접 지역 중 한 곳으로 옮겨질 계획이었다. 에이헤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칼란다리시빌리에게 출발을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48: 상동. L.62 )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한편, 1921 년 5 월 8 일 사할린 부대 군간부는 한인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하묵이 한때 대대사령관으로 ‘인민군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에게 전했다. 요청서에 서명한 그리고리예프 부대장(전 장교, 무소속), 김 부대장 보조, 박 군사위원(전 니콜라옙스크 부대장), 최 참모총장(제 2 비행대 전 참모총장), 림 제 1 대대장, 아무 제 2 대대장, 헤자욱 제 3 대대장 및 많은 사령관들은 오하묵에 불복할 것을 선언했다. (49 : 상동. L.69 )

 

다음 날, 슈먀츠키는 새로 임명된 라핀 인민혁명군 총사령관과 회담을 진행하면서 조선혁명군들의 성공적인 단합을 위해서는 “가장 야비한 적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총사령관은 이에 동의하며, “숙청은 진행될 것이다. 다만, 무단으로 소집된 군사협의회의 영향을 받은 부대에서 발생한 일부 불미스러운 일들은 해독제로서 어느 정도는 허용하고, 그러한 영향이 당신에게서 오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칼란다리시빌리를 조속히 파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고 대답했다. (50 :상동. L.70 ) 그리고 5 월 10 일 슈먀츠키는 라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칼란다리시빌리와 한인부대 혁명위원회의 임무는 “범죄적 민중선동을 일삼는 박 I와 한인부대의 다른 모험가들을 어떻게 징계할 지, 또는 (모두) 쓸데없으니 (그들을) 풀어주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슈먀츠키는 ‘할아버지’가 감당해야 할 일이며, 라핀은 조만간 특별사할린부대 유격대원들에 대한 주민들의 새로운 불만들을 처리해야 할 것이라며 확신에 차 말했다. (51 : 상동. L.71, 76 )

 

칼란다리시빌리는 조선군사혁명협의회 의장과 한인부대 총사령관 직에 임명되어(하묵은 부총사령관이 되었다) 5 월 19 일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이르쿠츠크를 떠났다. 슈먀츠키는 그에게 광범위한 임무를 부여했다: “칼란다리시빌리의 임무는 중국 마적떼('홍후즈')를 동원하여 조속히 완충지대에서 벗어나 한국으로 진군하는 것이다. 이들 조직의 관리는 중국공산당의 조력을 받게 될 오홀라에게 맡겨졌다. 홍후즈 마적떼의 임무는 한인부대들을 위해 완충지대를 벗어나 경계를 벗어날 때 최소한 그 후방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간섭주의 작전은 운게른 부대와의 전투 맥락에서 계획되었다: 당시 슈먀츠키는 운게른과의 전투를 위해 500 여명의 병사로 구성된 쉐틴킨의 부대를 몽골로 보냈다. (52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 )

 

라핀 총사령관은 1921 년 5 월 21 일 크라스노쇼코프 극동공화국 대통령에게 자유시 아래 위치한 크라스노야로보와 마자노보에 한인유격대원 1500 여명이 주둔해 있고, 그 지휘부는 한국에서 활동하다 일본군에 의해 격파된 후 극동공화국으로 떠난 일본 및 중국군의 전 한인장교들과 부대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이 임명한 지도자들을 인정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4 월에서 5 월까지 크로스노야로보 부대는 이르쿠츠크에서 온 한인연대로 보강되었다(500 여명이 넘는 병력, 러시아군대 한인 장교로 구성된 군간부들은 '연대 전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매우 신뢰할만 했다'.) 라핀은 이 연대로 사할린 부대를 보강함으로써 나머지 부대의 '심리적 요새'가 될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총사령관으로부터 강력한 체포권을 부여받은 칼란다리시빌리는 1921 년 6 월 9 일 '한인부대가 (그에게) 전혀 복종하지 않는다'고 자유시에서 전해왔다. (53 :  상동. L.88, 95 ) 합당한 권한을 부여 받은 야심에 찬 칼란다리시빌리는 불복종에 대한 대응으로 신뢰할 만한 이르쿠츠크 연대에 의지하여 사할린의용대를 '반혁명주의자들'로 신속하게 처리해버렸다. 블라고베쉔스크 인근 수라줴프카 마을에서 조지아 '권력층'의 지휘 하에 만행되어 블류헤르 인민혁명군 차기 총사령관에 의해 제지된 6 월의 '아무르 대학살'로 인해, 트랴피씬 한인유격대의 범죄성을 도외시했던 현대 연구가의 과장된 정보에 따르면, 피살, 익사, 실종된 반란군은 400 명 미만, 무장 해제되어 '반혁명군' 표시를 달고 러시아군에 전쟁 포로로 잡혀간 반란군은 900 명에 달했다. (54:  박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1917-30 년대 말). M., 이르쿠츠크, 상트페테르부르크, 1993. p.73-91 ) 또한 수 백명의 유격대원이 사망했으며, 한인사회는 사할린부대에 가해진 징벌에 분노하고 있다고 레닌에게 전해왔다. (55 : 불다코프 V.P. 유토피아, 침략, 세력. 혁명 이후의 사회심리적 동향. 러시아, 1920-1930 년. M., 2012. p.601 )

 

한편, 극동공화국 정치안보국 본부는 1921 년 7 월 16-19 일 이 사변을 보고하면서, 한인의 피해는 현저히 적었다고 전했다: “스보보드넨스키 지역에서 사령관의 무장해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사할린부대와의 충돌이 발생했다. 명령은 부대 내에 반형멱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것이었다. 충돌로 인해 부대 총 인원 1026 명 중 830 명이 항복했고, 나머지 일부는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또 일부는 도주했다.”(56 : 6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F. 372. Op. 1. D. 114. L.68  )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정보에 따르면, 비상위원회 정보와 마찬가지로 한인 36 명이 사망하고, 60 명은 제야강에서 익사했으며, 실종자는 60 명, 무장해제된 자는 860 명에 달했다. (57 : 토루쿠노프 A.V. 한국사(새로운 관점). M., 2003. P. 303-304 )  '실종자' 중에는 도망자들이 우세했다(박은 70 명의 병사와 함께 만주로 도주해 그곳에서 홍호자들과 함께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공식 보고서는 사령관들이 제 5 군 군사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던 이미 무장해제된 한인들에 대해 징벌을 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르사변’은 한국해방운동에서 깊고 오래된 분열을 더 악화시켰다. 

 

칼란다리시빌리는 여전히 볼셰비키의 관심 대상이었던 한인의용대의 징계 임무를 수행했다. 1921 년 1 월 중순, 국경을 통과하는 모든 한인 유격대원들을 '일본 정탐꾼들이 침입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러 낼 것'을 요구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은 1921 년 6 월 29 일 한인부대와 인민혁명군의 무장 충돌 소식을 듣고, 블류헤르 총사령관에게 계속해서 한인부대를 이용할 것을 제안했다. (58: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F. 17. Op. 13. D. 288. L.6, 100 ) 외교인민위원회도 의견을 같이했다. 1921년 7월 초, 치체린은 중앙위원회 극동국에 한인부대 사건에 관한 세부사항을 전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들에게 신중하지 못한 분별없는 행동이 가해진 것은 분명하니,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 한인들이 극동공화국에 있는 것은 불편한 일이나, 그들을 해산시킬 필요는 없으며, 그들이 머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르쿠츠크로 보내야 한다.”(59 : 상동. F. 372. Op. 1. D. 87. L.153 ) 한편, 한인부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했다: 1921 년 7 월 그들은 아무르주 체르니고프카 마을 주민들에게 식량을 요구하고, 마차를 약탈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총머리를 겨누며 집에서 쫓아 내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한인을 '제 2 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60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2. D.44. L.207, 213 )

 

세계 혁명의 화염을 불식시키기 위해 한국으로 갈 생각을 진지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공적은 무정부주의 사할린부대가 해산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극동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호소함으로써 슈먀츠키의 모험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극동공화국 크라스노쇼코프 대통령은 극동공화국 인명혁명군 라핀 총사령관의 의견을 듣고 (61: 라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조차도 동족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일은 한국으로 향하는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당 사절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란다리시빌리 세력이 한국 국경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89) ) 일본의 도발을 두려워 하며, 1921 년 6 월 치체린과 레닌에게 계획된 모험에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다: “…. 한인들에 대한 슈마츠키의 계획, 일본의 도발을 유도하게 될 계획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특히 그는 한국으로 진군하면서 한인들을 지휘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습과 잡음을 일으키며 극동공화국 전역을 훑고 지나갔던, 나이가 들어 의식이 흐릿한 동방 전역에서 유명한 유격대원인 칼란다리시빌리를 수장에 세웠다. 끔찍한 사실은, 1) 4000 명이 한인들이 블라고베쉔스크의 일본인들 앞에 집결해 약탈, 강간 등 끔찍한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며, 자기 측에서 선출된 지휘부에만 복종하고 있다….. 노인네(칼란다리시빌리)가 2 천노리의 한국 진군을 위해 한인들과 중국 영토로 이동한 것은 좀 부드럽게 말하자면, 시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나, 삼국협약의 눈앞에서 완전히 정당화된 일본의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 외교인민위원회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 '모험을 가능한 한 조속히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62 :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 p.73-91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teplyakov-alexey@rambler.ru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이 논문에 근거하면 현지로 망명한 독립군들이 심각한 약탈, 테러, 폭동을 저질렀고 그 탓에 진압이 일어났다. 그러나 독립군들이 현지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벌인 폭력은 자유시 '참변'이 벌어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 농민들에게 한국인 독립군들은 "제2의 사무라이" 취급을 당했다. 즉 일본군 같은 취급을 당했다.

 

 

2.전문성

 

 

만약 비전문가가 역사학자에게 반박한다면 그건 귀납적으로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논의되는 문제에 관해 관련 지식을 가질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말이 참으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우연일 뿐이다."(앤 톰슨 지음, 최원배 옮김, 2012, 『비판적 사고: 실용적 입문 3판』, 서광사,128쪽)

 

그러나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는 분명 전문가다. 

 

견해의 신뢰성: 다른 분야가 아니라 해당 전문분야에서 전문가인 사람의 견해에는 신뢰성이 있다.
(앤 톰슨 지음, 최원배 옮김, 2012, 『비판적 사고: 실용적 입문 3판』, 서광사, 128~129)

 

출처의 신뢰성: 다른 분야가 아니라 해당 분야에 전문 지식이 있는 전문가인 사람이 출처라면 신뢰성이 있다.
(알렉 피셔 지음, 최원배 옮김, 2018, 『피셔의 비판적 사고(제2판), 서광사, 129쪽)

 

논리적 오류성 여부와 건전성: 분야가 다른 전문가의 주장을 근거라 제시하는 건 오류다. 하지만 해당 분야에 전문가의 사람의 논문을 근거로 제시하는 건 귀납적으로 건전하고 바람직하다. '전문가니깐 무조건 진리다'같은 궤변만 아니라면 사실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아니다. (서정선, 2002, 『논리학의 첫걸음』, 서광사, 87~88) (한상기, 2007, 『비판적 사고와 논리』, 서광사, 304~306) (김희정·박은진, 2008, 『비판적 사고를 위한 논리』개정판, 아카넷, 175~177) (irving M. copi·carl cohen·kenneth mcmahon 저자, 박만준·윤진각 옮김, 2015, 『논리학 입문 - 제 14판』, 도서출판 경문사, 172~173쪽) (로버트 바움 지음, 전재원 옮김, 2016,『비형식 논리학』원서 제4판, 이문출판사, 253~256)

 

즉 지금 본문의 인용된 내용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글이다. 전문성에 밀리지 않는다. 다음은 해당 전문가의 논문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다.

 

3. 전문가의 논문을 뒷받침하는 증거들.

 

- 러시아로 망명하는 독립군이 무장해제를 거부하자 현지 러시아인 군인들이 보인 반응들

 

간도독립군들은 대규모로 러시아로 이동해왔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만주침공 때문이다. 일본군의 침공과 학살 탓에 간도에서는 투쟁이 불가능해졌기에 독립군부대들은 러시아지역으로 퇴각했다.(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윤상원, 2010,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167)

다시 말해 일본군의 학살로 위협을 받고 주둔지를 잃었기에 러시아로 간 것이다. 

 

다음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도 인정하는 내용이다.

 


『1920년대 초 대규모의 항일독립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초토화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는 토벌공세를 높여 경신참변과 같은 만행으로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독립군 입장에서도 일련의 대전투에서 무기, 탄약을 소진하여 현존 무력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백기인·심헌용 집필, 김용달·한시준·박환·장세윤·황민호 감수, 2017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94~95)

 

이 과정에서 김좌진과 홍범도는 해산했던 독립군인들을 다시 집결할 것을 고했다.

 
『해산한 아군사에게 고한다.

지난번 아대병을 해산한 것은 일시의 변법에 지나지 않고 광복사업 성취하지 않는 한 그를 해하려서는 안된다. 이제야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 충분하고 또 무기탄약은 제한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이다. 이래 와신상담 산야에 전전한 목우즐풍 영일 없이 상하 서로 피를 철하고 맹약한 바를 지켜야 할 것이다.』


- 김좌진·홍범도
(백기인·심헌용 집필, 2017, 78~79쪽)


다시말해 러시아로 가기전에 이미 해산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군대 유지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현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몰려오는 한국독립군에게 ‘무장해제’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하였다. 
이 때 이들은 독립군을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1월 3일

1
남쪽에서부터 중립지대를 거쳐 왔거나 중국 영토로부터 왔거나 제2아무르군 관할지역에 온 모든 한인부대를 즉각 무장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이경우 무력이라는 가장 단호한 수단 도 동원 가능하다. 무장해제는 완벽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총포류나 도검류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다.

2
한인 무장부대를 무장해제한 후에 구역 책임자들은 한인들이 자유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는 정치적 이민자로서 갖는 일반 권리에 의거해 스스로 자신의 거주 장소로 선택한 먼 후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차량이나 마차들을 즉각 요청한다.

3
무장해제를 실행하는 책임자들은 즉각 모든 무기를 목록화 하여 각 사단이나 제2군의 포병보급 부서로 보낸다.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임시 직무대리 뷔로프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2~53)

 

그런데 일부 한국독립군들은 무슨수를 써서라도 무기를 갖고 넘어가려고 했다. 일부 독립군은 자신들이 위기라서 타민족의 영토에 이동하는 처지이면서 현지 지휘관의 무기 양도 요구를 거부하고 들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이 현지지휘관의 요구를 거부하며 러시아에 접근하자 제2군사령관은 단호하게 막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 독립군에 대한 조치를 중국마적(홍후즈)에 대한 조치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 중국마적(홍후즈)과 마찬가지로 한국독립군도 절대 현지로 넘어오지 못 하도록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현지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에는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현재지역에 들어온 독립군에게는 무장해제 거부할거면 제발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3월 9일

1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즉각 무장해제하라는 금년 1월 3일자 제2아무르군 각 부대에 대한 명령18호를 반드시 집행할 것을 확인한다. 만약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군사활동을 개시하여 길을 차단하여 그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용인하지 말라. 반대의 경우, 그들에게 우리 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떠나라고 제안하라.

2
아무르 국경지대에 출현한 무장 홍후즈 부대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 동원을 포함한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한인 부대들에게 대해서도 그 지도부에 동일한 조치를 취하라. 우리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 범죄분자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각 경우에 관해 군사령부에 즉각 알려야 한다.

제2군사령관 파블로프
군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쉬콜린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54~55)

 

김좌진·서일·이범석·나중소 부대는 다시 만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가지 않은 군인들은 자유시로 이동했고 그 이후 양도했던 무기들을 되돌려받았다. (윤상원, 2010, 170~171; 백기인·심헌용, 2017, 95~96쪽)

 

자유시로 이동해온 간도 독립군들은 이전 재러 한인독립군과 함께 대한의용군으로 들어갔다.(자유시엔 1921년 1~3월에 도착해 온 연해주 출신 한인 빨치산 부대인 이만군대·다반군대·니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 군대 등과 북간도 밀산을 거쳐 온 최진동·안무군대 등의 독립군부대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이청천 부대들이 집결한 상황인데 이 중 니항부대가 극동화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였다.  이중 오하묵이 주도한 자유대대는 니항부대와 대한의용군을 거부했다.  백기인·심헌용, 2017, 96~98)  

 

참고로 대한의용군=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 이다.(윤상원, 2010, 178; 윤상원, 2017,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 한국사연구 (178) , 243 쪽; 임경석, 2009,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42권 초기 사회주의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72)

 

이후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마자노프란 마을에 집결하였다.(윤상원, 2010, 180; 윤상원, 2017, 245; 임경석, 2009, 173~174)

 

그런데 당시 독립군 각 부대들은 "자기들의 장교에게 스스로 그 지휘를 원하고 다른 군대의 장교는 일면도 없는 까닭에 지휘를 받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윤상원, 2010, 175~176) 그러니깐 독립군들은 타민족의 영토에 들어와놓고 자기들의 장교에게만 지휘를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 마자노프에서 벌어진 독립군 폭동과 약탈

 

한국독립군들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려하였다. 그런데 현지 러시아 농민들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러시아 농민들에겐 한국독립군을 위해 식량을 바쳐야할 의무나 책임이 당연히 없었다. 그러자 독립군들은 현지 러시아농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뜯어가며 폭력을 일삼았다.

 

현지 러시아 농민들은 한국 독립군에게 분노를 느꼈다.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졌고 한국독립군과 현지 러시아 농민 사이의 전면적 무장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총사령관 에이헤는 4월 23일부터 이미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치타.
1921년 4월 23일 20시
전보
이르쿠츠크.
제5군 혁명군사호의 위원 슈먀츠키 귀하.

치타에서 귀하와 함께 한인사할린빨치산부대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 부대는 자신의 활동으로 지역 농민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이 현상의 주된 원인은 부대의 어려운 식량 사정이며, 그것을 제거하기란 전박적 식량위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적합한 부대장의 부재 또한 그 원인입니다. 상황 악화를 피하기 위해 부대는 다른 인접지역으로 이전될 것입니다. 상황의 정리 및 예정대로 신속한 부대 이전을 위해 칼란다리쉬빌리 동무의 조속한 출발을 요청합니다.
제369호

총사령관 에이헤』
(이완종, 2014, 177쪽)

 

현지 농민들이 한국독립군을 거부한다는 건 독립군 본인들의 보고서에도 나와있다.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 본부.
1921년 5월 7일
제2군 사령관 및 정치위원 귀하.

(……)현 시점에 부대가 식량문제로 위기상황이 있고 그 때문에 농민들과의 갈등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갈등은 수습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비록 3일간이라도 부대를 방치할 수 없습니다. 식량은 스보보드니 식량기지에도 배급지점에도 없습니다. 스바보드니 식량기지에서 수령한 200푸드의 밀가루는 스바보드니 시의 보급창에 쌓여있는데, 운송수단도 없고 농민의 완강한 협조거부 때문에 각 부대로 배급할 수 없습니다. (……)』
(이완종, 2014, 93)

 

다음은 당집회 위원들이 총사령관에게 보낸 청원이다.


『당집회 위원들의 총사령관에의 청원

1921년 5월 13일
총사령관 귀하

부탁이 있습니다. 즉각 [판독불가]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에 3000명이 있는데 3개월간 주둔하고 있습니다. 면 주민들은 가난하며, 이들이 새로 정주한 병사 3000명을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향후 그들이 계속 주둔한다면 들판에 뿌릴 종자마저 없어질 것입니다. 부대는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체포와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는 무장충돌의 일보직전에 있습니다. 귀하의 결정을 촉구합니다.

당집회 위원 안친페로프, 데예야토프, 프로야예프』
(이완종, 2014, 199)

 

다음은 정치특사가 보낸 보고서이다.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블라고베센스크 제01928호
1921년 5월 14일
전보
치타. 총사령관 귀하.

창립회의 아무르 위원들이 마자노보에서 타전합니다. 마자노보 지역에서 숙영하고 있는 한인부대가 주민들에 대해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에 대해 근거 없는 체포 및 폭력을 자행하고 지역에 전시상태를 선포하였으며, 저녁 10시 이후 통행을 금지하여 그럼으로써 현재 아주 늦게 끝나는 농민들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귀하의 지시를 어기고 한인부대는 주민들에게서 계속 식량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창립회의 위원들은 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주민들과 대립이 극단적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알리면서 한인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위한 실제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합니다. 본인에게 타전하시기 바랍니다. 제178호.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이완종, 2014, 198)

 

다음은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가 한국독립군과 지역주민 사이의 관계를 보고한 보고서이다.


『독립사할린빨치산부대가 배치된 곳의 지역주민들은 부대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대 철수를 청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격 및 내부적 성격의 문제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인부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청합니다. 다른 지역으로의 부대 이동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문제가 악화되면 농민과 한인부대 간의 전면적 투쟁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제 652호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참모장 쉬코미
암호해독: [판독불가]
(이완종, 2014, 166)

 

총사령관은 제2군 사령관에게 한국독립군이 일반주민에게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치타. 1921년 5월 14일.
제2군 사령관 귀하.
사본은 제12여단 정치위원에게.

특별사할린부대 한인 빨치산들이 일반 주민들에 자행하는 난동과 강압에 대한 불평등이 또다시 본인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치산들은 생존을 위한 정상적 조건 보장이라는 뜻에서 주민들이 그들에게 나타내는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귀하에게 직접 이 일에 대한 감독 책임을 부과합니다. 동시에 혁명 질서의 유지와 감독을 위해 부대에 대리인을 파견하십시오. 귀하의 조치들로 인해 본인이 부대에 대한 불평을 듣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총사령관 A. 라핀』
(이완종, 2014, 195)

 

- 자유시 '참변' 이후

 

『총사령관 귀하
하바롭스크 1921년.

한인의 폭동, 우리 부대에 의한 그들의 무장해제, 대포가 동원된 12시간의 전투 및 인민군 지휘간부 및 병사의 손실은 칼란다리쉬빌리 동무에게 아주 답답한 기분을 조성하였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지시들로 우리 지휘부의 조치에 완전한 무정부상태를 주입한 칼란다리쉬빌리 동무는 폭도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를 그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대는 방탕, 약탈, 무자비한 폭력 같은 것에 몰두하였습니다. 결국에는 6월 29일 집회를 소집한 칼란다리쉬빌리는 제4사단장 파데예프 문제를 집회에서 다룰 것이라고 직통전화를 통해 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금 진압된 폭동이 칼란다리쉬빌리 동무 덕분에 다시 시작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란다리쉬빌리 동무를 1년 이상 알면서 가끔 그와 함께 일한 우리는 그의 할동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 한인부대를 무장해제하는 것이 우리 부대에겐 이미 두 번째 일입니다. 그들의 재무장은 아무르 주민들이 이미 충분히 겪은 반란과 강도행위를 다시 야기할 것이며, 향후 자기 지역에서 칼란다리쉬빌리 부대 같은 것의 주둔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각 칼란다리쉬빌리를 제2군 사령부에 완전히 복종케 하거나 아니면 그를 군의 관할에서 완전히 제거하여, 그럼으로써 주민과 군이  폭동과 전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를 요청합니다.

제2군 사령관
군정치위원
군참모장』
(이완종, 2014, 36~37)

 

4. 맺음말

 

전문가의 논문도 있고 실제 증거도 있다. 한국인 독립군들은 현지 러시아인 농민들에게 온갖 폭력을 저질렀다.

저렇게 보면 소비에트 정부가 정말 나쁜 건 맞다. 왜냐면 한국인 독립군 망명자들을 러시아인 농민들이 있는 지역에 보냈기 때문이다. 즉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인 독립군에게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러시아인 농민들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이다. 

진짜 피해자는 현지 농민들이다.



6
  • 마지막 문장이 딱이네요. 진짜 피해자는 현지 농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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