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05 17:59:02
Name   아침커피
File #1   DSC_0974.JPG (1.08 MB), Download : 30
Link #1   https://crmn.tistory.com/100
Subject   많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중국 서남부에 있는 운남(雲南) 성은 인도, 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등과 같은 위도에 있지만 고도가 높아서 여름에도 서늘한 곳입니다. 운남성 여강(麗江) 시의 경우 평지가 이미 해발 2500m 정도 되어 백두산 높이와 비슷하고, 이곳에 있는 높이 5598m 짜리 옥룡설산은 만년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삼국지를 즐겨 읽은 사람에게는 맹획의 고장으로 유명할 것입니다.

2016년 12월에 이 곳에 여행을 갔었습니다. 도착하자 마자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공기에 감탄했고, 몇 걸음 걷지 않아 먼지만 없는 게 아니라 공기도 없어서 숨이 잘 안 쉬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주일 내내 약한 고산병 증세로 추정되는 소화불량과 두통을 달고 살았지만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중국 하면 흔히 생각하는 한족이 아닌 여러 소수 민족들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곳이라 볼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았습니다. 만약 신라가 676년에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나라 자리에는 중국의 어느 성이 신라성 정도의 이름으로 들어서 있었을 것이고 한민족은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 되었을 것이며 인터넷에는 “이민족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중국 신라성 5박 6일 여행 특가상품” 같은 게 팔리고 있었겠지요.

하여튼 생각할 것이 참 많던 운남성 여행에서도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옥룡설산이었습니다. 말이 여강이지 숙소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직 달이 떠 있던 새벽부터 일어나서 승합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가야 했습니다. 가이드로부터 두툼한 노란색 방한복과 함께 헤어스프레이 통처럼 생긴 산소통을 받고 옥룡설산 발치까지 가서 케이블카를 탔습니다. 케이블카가 출발하던 곳의 높이가 이미 해발 3356m였고, 케이블카에서 내린 곳은 4506m, 대충 한라산 두 개 반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보통 지평선을 보려면 평야에 가야 하는데 그 정도 높이까지 가자 산으로 가득찬 지평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관광객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난간 저쪽으로는 사람의 발자국이라고는 전혀 찍혀있지 않은 눈인지 얼음인지 모를 것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눈은 몇천 년을 그 자리에 그렇게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가끔씩 날아와서 쉬다 간 매라면 모를까 그 자리에서 시야에 가득 차게 들어오는 끝없이 펼쳐진 산을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설령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한 모험가가 옛날에 그곳까지 올라갔었다 하더라도 제가 케이블카에서 보았던 광경은 못 보았을 것입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곳의 산과 눈과 하늘은 2016년 12월에 저에게 그 경치를 보여주기 위해 적어도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을 묵묵히 기다려왔던 셈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많은 임금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지만 보지 못했다.” 운남성 여행을 곱씹을 때 마다 이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운남성의 왕이었던 맹획도, 맹획을 잡으러 왔던 제갈량도, 중국의 그 어떤 황제도 제가 보았던 광경은 보지 못했습니다. 북경에 인공으로 이화원을 지을 정도로 경승지를 좋아하던 황제들이었으니 기회만 되었다면 옥룡설산의 비경을 보러 가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중국을 쥐고 흔들던 황제들도 보지 못했던 경관을 입장료와 케이블카 비 몇만 원만 내고 본 제 눈은 복이 있습니다.



9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303 과학/기술맛없는 것 투성이었던 옛날 17 눈부심 16/02/28 5420 5
    13881 일상/생각맘에 드는 카페가 생겼습니다. 3 큐리스 23/05/19 1993 2
    1403 정치맑스주의와 사르트르로 본 메갈리안 29 nickyo 15/10/31 10870 3
    2750 꿀팁/강좌맑스 엥겔스 친필문헌을 열람해보자 8 기아트윈스 16/05/06 4165 0
    6993 게임말이 많아도 너무 많은 게임. 토먼트 :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 10 Weinheimer 18/01/24 5442 2
    8565 일상/생각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35 파랑새의나침반 18/11/26 7054 2
    10428 사회말라리아 치료제로 COVID-19를 극복할 수 있을까? 10 치킹 20/03/24 4483 7
    10458 창작말 잘 듣던 개 6 하트필드 20/04/04 4026 3
    13571 게임말 나온김에 심심해본 LCK 도깨비팀 평행이론(?) 4 SCV 23/02/15 2115 1
    7061 IT/컴퓨터많이들 헷갈리는 USB-C와 USB3.0 그리고 썬더볼트의 차이점 16 보리건빵 18/02/07 37354 10
    1586 기타많이 쉬워진 장기 묘수풀이 <21> (댓글에 해답있음) 4 위솝 15/11/18 6763 0
    10929 여행많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1 아침커피 20/09/05 4078 9
    8966 일상/생각많은 생각이 드는 날이네요 12 LCD 19/03/17 3778 0
    10542 도서/문학많은 분들이 읽으면 좋을것 같은 책들을 소개합니다. 7 化神 20/05/02 5011 15
    340 기타만화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2 안녕하셈 15/06/16 6652 0
    11748 도서/문학만화책 나눔 30 하트필드 21/06/02 4042 14
    14357 기타만화)오직 만화만이 할 수 있는 것. 아트 슈피겔만의 <쥐> 1 joel 23/12/24 1907 13
    3408 역사만화 킹덤의 육대장군과 삼대천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16 Raute 16/07/31 19551 0
    13245 문화/예술만화 원피스가 타 소년만화와 차별화 되는 부분(?) 7 OneV 22/10/19 2625 0
    10080 육아/가정만점 부모가 아니여도 괜찮아 5 Jace.WoM 19/12/14 6185 26
    1997 꿀팁/강좌만장일치의 역설 30 눈부심 16/01/11 5923 10
    2519 일상/생각만우절, 30번째 생일 10 리니시아 16/04/01 3156 4
    7744 오프모임만약 보드게임 모임을 한다면 관심 있으신 분 계신가요? 26 알탈 18/06/25 5499 0
    3124 IT/컴퓨터만약 V3 계열 제품을 사용중이신데 하드디스크에 숨김폴더가 만들어지셨다면.. 9 삼성그룹 16/06/25 4418 0
    7447 의료/건강만성 기침은 무엇인가요? 14 세상의빛 18/04/27 5359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