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6/06 14:46:55
Name   710.
Subject   공부하다 심심해 쓰는 은행원의 넋두리 썰.
안녕하세요, 저는 서른 살, 은행 근무 오년 차 행원이에요.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공부하러 나와 인강을 듣다가....
넘모나 심심해서 썰을 좀 풀어 보려고 해요. 어떤 직업이든 안 그렇겠냐만, 포털사이트 댓글이나 커뮤니티를 보면 보통 은행원들은 영업 때문에 인성을 팔아먹은 파렴치한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반면에 4시에 문 닫고 노는 거 아니냐!!!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새벽 여섯시 출근 10시 퇴근을 삼년 쯤 했습니다ㅠ_ㅠ)  그래서 좀 친근해 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름 소소한 고충들을 털어놓고 싶었어요:)


1. 달력/신권 전쟁

각 은행은 연초에 달력을 배부합니다. 달력 교부일 근처가 되면 모든 은행원들은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아 또 달력시즌이네..'
사무실에서는 종종 캘린더를 쓰긴 하지만, 벽걸이 달력은 사용해본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이게 왜 난리가 날 만한 일인가 의아했었는데, 옛날에는 은행 달력을 사용해야 재복이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하네요.
의외로 나이드신 분들 뿐 아니라 젊은분들까지 달력 때문에 은행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12월 15일이 달력 교부 시작일이라고 하면, 11월 초순부터 달력 안들어왔냐고 물어보는 고객님들이 슬슬 늘어나기 시작해요. 안그래도 연말/연초에 업무에 시달리는데, 달력에까지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는거죠.

'다른 지점은 다 주는데 여긴 왜 안 주느냐', '내가 여기 몇년 거래했는데 몇개 더 달라', '나 xxx지점장 친구다'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달력 사용량은 줄어들 수 밖에 없고, 은행에서도 슬슬 교부량을 줄이는데 몇 개씩 더 달라고 객장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고객님들을 보면 참 속이 상합니다.

마찬가지로 명절시즌에는 신권으로 전쟁을 치루지요. 달력보다는 이해는 되는데, 뭐 손주들 용돈 주실 때 빳빳한 신권으로 주면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겠죠. 저도 입사하고 첫 급여 때가 추석과 겹쳐서, 빳빳한 신권 2백만원을 부모님께 드렸을 때 뿌듯했던 기억이 있네요.
그런데 요새 들어, 한국은행에서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의 상태가 양호하여.....' 신권을 잘 배부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도 없어요ㅠ_ㅠ

보통 지점의 막내가 지점 전체의 통화를 세고 관리하는 '출납'이라는 업무를 맡는데, 일년 내내 신권을 조금씩 모아요. 명절 때 신권이 부족하면 고객들에게 모든 지점 직원들이 욕을 먹거든요. 제가 일년 간 본점 유관부서에 사정사정해서 모아 놓은 신권을 명절때 푸는 거죠.
보통 저희 지점의 일인 교부 한도는 오만원권 여섯 장, 만원짜리 스무 장, 오천원권 열 장, 천원권 스무 장입니다.
이렇게 쪼잔하게 교부하는 저희도 마음이 좋지는 않은데 방법이 없답니다...ㅠㅠ


2.민원에 너무나 취약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음

은행, 혹은 금감원 민원이라는 제도는 고객 보호를 위해 필수적이긴 하지만, 의외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아요. 요새는 그래도 말도 안 되는 민원에 대해서는 행 내에서도 어느정도 이해를 해 주기는 하지만, 제가 입행했을 때만 해도 어떤 민원이 들어오더라도 지점 성적에 감점이 있었고, 따라서 상황에 상관 없이 직원이 피해를 입고, 고객에게 무조건 사과를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업무가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민원을 넣겠다'라고 협박성으로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많고, 실제로 민원도 많이 들어와요. 은행원들은 대부분 자기네들을 쫌팽이 샌님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민원이 들어오면 (특히 여직원 분들은) 벌벌벌 떨어요. 민원 얘기하시면 양반인데, 앞 직원이 유약하게 생긴 여직원이거나 하면, 밤길 조심해라- 칼로 찔러버리겠다- 죽여버리겠다- 등 폭언도 꽤나 자주 받습니다. 업무하다가 실제로 창구에서 쓰러지시는 분들도 봤고... 펑펑 우는 분들은 일년에도 수 번 보구요 ㅎㅎ.

제가 받았던, 보았던 민원 중에 황당했던 것들은...

- 대출 심사 다 해 놓고 실행 예약까지 걸어놨는데, 그 전날에 현금서비스 풀로 쓰시는 분들.
당연히 대출은 못 나가고, 고객은 민원 걸어 지점은 난리가 나고, 상황을 설명 드리면 현금서비스가 대출인 줄 몰랐다/신용에 안 좋은지 몰랐다.
설명을 니가 제대로 안 해 주었으니 대출 해줘라. 못해? 그럼 금감원 민원 걸어야지.

- 20대 여성분이 통장 지참하여 출금 요청을 하는데, 통장에 신고된 사인을 펴놓고 거의 그리듯이 출금전표를 쓰시네요..? 신분증과 얼굴은 비슷한데 기존 거래 신청서를 까보니 필체가 엄청나게 다릅니다. 조용히 추궁하니 자기는 동생인데 언니의 허락을 맡고 대신 찾아주는거라고 하네요. 이 경우 업무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언니가 동의하지 않았으면 범죄이니 주의하라고 안내해 드렸습다. 그리고 나니 저녁에 민원이 들어오네요. 은행원이 자기를 범죄자 취급해서 너무 불쾌하하시다네요. 역시 전화해 사과드렸습니다.

- 이 외에도 은행원이 업무를 하다 코를 팠다던가....(그분이 그러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표정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라던지, 목소리가 너무 커서 옆사람이 내 금융정보를 다 들었다..... 뭐 여러가지 민원을 받습니다. 뭐 이제 해탈하기는 했어요ㅎㅎ. 최근에는 구청 입점 점포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는데, 생각 외로 공무원분들은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욕을 들었을 떄라던지, 꽤나 전투적으로 방어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나가라고 소리를 같이 지르신다던지, 선생님!!!! 욕은 하지 마세요!!! 같이 소리지르신다던지...... 저희는 그걸 보면서 꽤나 대리만족을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네요ㅎㅎ. 이래 징징거리는 글을 쭉 쓰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은행원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나름 재미도 있고.. 그렇습니다. 항상 글쓰기는 마무리가 어렵네요. 생각보다 고객을 마주할 떄나, 커뮤니티에서 은행/대출/금융상품 등에 대해서 잘못 알고 계신 부분도 많고, 소개하고 싶은 상품들도 종종 있는데(중소기업 취업청년 전월세보증금대출이나, 청년전세자금대출.....등등) 시간이 나면 AMA도 한번 해보고 싶네요. 그럼 이만 글을 맺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31
  • 달력 들어왔나요?
  • 신권 들어왔나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 신권 들어왔나요?
  • 달력 하나만 더주세요
  • 달력 필요 없습니다.
  • 초저리로 대출해주세요. (feat. 신불자)
  • 춫천
  • 달력 그냥달라고 하지않겠습니다
  • 신문들어왔나요?
  • 거 달력 얼마 합니까? 내 돈 주고 사겄소! 내 이래봬도 만주에서 말 좀 타던 사람이외다!
  • 카드받으러 왔읍니다.
  • 제가 먼저에요. 잠깐 볼일보러 다녀왔는데 번호 지나갔어요
  • 거 달력 얼마나 한다고 그걸 안주네!!! 내가 XX은행을 몇년째쓰고있는데! 으잉!
이 게시판에 등록된 710.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284 요리/음식(내맘대로 뽑은) 2020년 네캔만원 맥주 결산 Awards 36 캡틴아메리카 20/12/27 5975 32
11276 일상/생각어느 택배 노동자의 한탄 11 토비 20/12/26 4132 32
11828 일상/생각안티테제 전문 25 순수한글닉 21/06/29 4401 32
10815 의료/건강벤쿠버 - 정신건강서비스 4 풀잎 20/07/25 5396 32
9874 일상/생각착한 여사친 이야기 9 Jace.WoM 19/10/23 5587 32
9788 기타참치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습니다. 29 김독자 19/10/07 5305 32
9419 사회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적정비용을 찾아서 35 Fate 19/07/10 6767 32
8008 일상/생각알기만 하던 지식, 실천해보기 9 보리건빵 18/08/06 4414 32
7922 정치노회찬씨의 죽음에 부쳐 9 DrCuddy 18/07/23 4891 32
6590 일상/생각무죄 판결 20 烏鳳 17/11/14 5547 32
5730 기타사람은 아픈만큼 성숙해지지 않는다 11 소맥술사 17/06/01 5873 32
5342 기타부쉬 드 노엘 13 소라게 17/03/28 4805 32
4783 일상/생각고3 때 12 알료사 17/02/06 4141 32
15028 도서/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892 31
15025 생활체육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65 31
15022 기타[긴급이벤트] 티타임 따봉 대작전 (종료) 19 dolmusa 24/11/05 1140 31
14006 과학/기술유고시 대처능력은 어떻게 평가가 될까? - 위험 대응성 지표들 18 서포트벡터 23/06/26 2856 31
13257 댓글잠금 일상/생각성 상품화에 관한 뻘글_ 나는 왜 성 상품화를 싫어할까? 192 Iowa 22/10/21 10096 31
12859 일상/생각형의 전화를 끊고서, 진토닉 한 잔을 말았다. 4 양양꼬치 22/05/26 3453 31
12556 기타[홍터뷰] 기아트윈스 ep.1 - 닥터 기아트윈스 28 토비 22/02/28 4060 31
11775 역사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70살에 재상이 된 남자. 백리해. 17 마카오톡 21/06/10 5134 31
11264 정치편향이 곧 정치 19 거소 20/12/23 5117 31
10655 일상/생각공부하다 심심해 쓰는 은행원의 넋두리 썰. 10 710. 20/06/06 5872 31
10556 일상/생각나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9 켈로그김 20/05/06 4206 31
10253 의료/건강입국거부에 대한 움직임 변화 49 Zel 20/02/02 7253 3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