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 게시판입니다.
Date 15/06/13 17:46:28
Name   kpark
Subject   스핏볼과 이물질, 걸리는 놈이 바보?
[KBO 공식 야구규칙 3.02: 선수는 흙, 송진, 파라핀, 감초, 사포, 금강사포 등 이물질로 일부러 공을 변색시키거나 흠집을 내서는 안 된다.]

야구공에는 다른 구기종목에서 쓰는 공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붉은 실밥이 표면에 솔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 실밥 혹은 심(Seam)이라 불리는 이것은 공을 잡고 던질 때 손가락 끝에 걸리면서 마찰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흔히 직구라 부르는 포심(Four Seam) 패스트볼은 검지와 중지가 심과 만나는 지점이 4군데라는 점에서 착안한 용어입니다. 심을 제대로 잡지 않고 매끄러운 하얀 표면을 잡고 던지면 공은 똑바로 날아가지 않습니다. 마구로도 불리는 너클볼, 가다가 땅으로 뚝 떨어지는 포크볼은 이렇게 고의로 심을 잡지 않거나, 심에 힘을 주지 않고 던지는 구종입니다.

야구에는 직구, 변화구를 포함 세세히 분류했을 때 10가지가 넘는 구종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너클볼을 빼면 이 구종들은 대략적인 궤적이 정해져 있습니다. 때문에 타자들도 예상하고 시속 130km가 넘으면서 부메랑처럼 휘는 공을 칠 수 있습니다. 너클볼은 실밥을 채지 않고 던지기 때문에, 회전 없이 날아가면서 공기의 저항을 받아 호날두의 무회전 프리킥처럼 변화무쌍한 궤적을 그립니다. 대신 공에 회전을 걸지 않고 프로 수준에서 통할 만큼 빠르게 던지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 남아있는 너클볼 투수는 2명이고, 한국에는 없습니다.

[나비처럼 춤추는 너클볼.]

하지만 너클볼만큼 변화무쌍한 공을 직구 던지듯 쉽게 던질 수 있다면? 이런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스핏볼(Spitball, Spitter)’입니다. ‘스핏(Spit)’은 침을 뱉는다는 뜻의 영어 단어입니다. 쉽게 말해 공에 침을 뱉고 던진다는 건데, 침과 변화구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스핏볼은 공에 이물질을 바르거나, 공 표면에 흠집을 내서 던지는 걸 뜻합니다. 그 궤적은 상상 이상입니다.

아래 영상은 과거 ESPN에서 메이저리거 제이크 피비의 도움으로 스핏볼의 효과를 실제로 보여준 프로그램입니다. 처음엔 땅콩버터를 바르고, 그 다음엔 공을 아예 잘라내서 던져봅니다. 마지막으로는 사포로 갈듯이 공의 표면을 거칠게 갈아서 던져봅니다. 그 결과는? 피비도 놀랄 정도였습니다.

[5분 40초부터 사포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궤적 비교는 7분 10초.]

엄밀히 말해 지금도 투수들은 야구공에 이물질을 발라 던지고 있습니다. 야구 규칙 상 투수는 우리가 TV중계에서 보는 ‘로진’이라고 부르는 하얀 가루만 바를 수 있습니다. 공의 미끄러운 표면 때문에 던지다 공이 의도치 않게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리그에서 공인한 진흙을 바르게 되어 있습니다. 정해진 회사 한 곳에서만 생산하는 진흙인데, 흙을 채취하는 장소는 100년 가까이 비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공이 미끄러지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일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진흙을 바르지 않고 공을 던지던 시절, 한 투수의 손에서 빠진 공이 타자의 머리에 맞았습니다. 타자는 결국 명을 달리했습니다. 당시 선수들은 헬멧을 겁쟁이나 쓰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어쩔 수 없이 투수들이 공을 던질 때 손에서 공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다 나온 해법이 진흙을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타자들이 헬멧을 쓰지만, 아직도 많은 투수들이 공을 제대로 채지 못하고 의도와 다른 곳으로 공을 던지고는 합니다. 어떤 때는 포수 머리 위를 넘어 백네트로, 어떤 때는 홈플레이트로 직행하기도, 어떤 때는 위험천만하게 타자의 몸 쪽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진흙과 로진 덕에 100년 전에 비하면 나아졌지만, 여전히 투수들은 미끄러운 공과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사실 손에서 미끄러진 걸지도 모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투수들이 알음알음 대안을 찾은지 오래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애용했다는 선크림(sunscreen)이나, 끈적끈적한 송진 등이 대표적인 해결책입니다. 보통 팔뚝이나 벨트 안쪽, 모자 아래, 글러브 안 등 다양한 곳에 이물질을 숨겨놓고 로션 바르듯이 공에 바른다고 합니다. 이런 세태는 이미 많은 언론과 팬들에게 알려진 터라, 규칙 위반임을 알고도 눈감고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규정 위반이지만 어느 정도는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은 느낌입니다.

미국 특유의 스포츠 문화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하는 듯 합니다. 그네들이(체고존엄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말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걸리는 놈이 바보’라는 겁니다. 사인 훔치기 논란에서도 이런 태도는 감지됩니다. 공식적으로는 상대팀의 사인을 훔치는 것이 규정 위반입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수많은 팀들이 상대 팀 사인을 해석하고 훔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설령 사인을 훔쳤다 해도 정말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적발할 길도 없습니다. 때문에 사인 훔치기 논란은 항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성은 내지만, 얻는 건 없는 피해자들만 속출하게 됩니다. 이물질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대놓고 스핏볼을 던지던 게일로드 페리라는 투수가 있습니다. 이분 지금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계십니다. 물론 현역 시절 절대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걸리지 않았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은퇴 후 자서전에서는 '소금과 후추, 초콜릿 시럽을 빼고는 다 이용해 봤다'고 고백했습니다.

[게일로드 페리. 자서전 제목부터 '나와 스핏볼'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규정 위반이고, 눈으로 확인 가능한 건이기 때문에 항상 논란의 소지가 된다는 겁니다. 1년에 팀 별로 162경기를 치르는 메이저리그지만, 한 팀에서 이물질 소지로 인해 적발되는 경우는 1년에 한 번도 많은 수준입니다. 상대팀에서도 눈감아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들도 즐겨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너무 티가 나게 이물질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상대팀 감독은 심판진에 고자질(?)을 해서 투수를 퇴장시키도록 하기도 합니다. 규정상 투수의 잘못이지만, 제가 지켜본 바 절반 정도는 퇴장 당하는 투수들이 항상 억울하다는 티를 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느냐는 얘기겠지요.

이렇게 개나 소나 공에 다른 물질을 바르고 다닌다면, 왜 굳이 규정을 완화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습니다. 투수들이 대는 이유도 일견 합당합니다. 문제는 스핏볼과 정당한 투구의 미묘한 경계선입니다. 분명 선크림을 발라야 공을 제대로 챌 수 있고, 그렇다고 해도 마구를 던지지는 못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로진이나 진흙에서 기대한 효과를 선크림으로 얻을 수 있지만, 그게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 효과를 구체적인 수치로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어느 정도 미묘한 선을 넘게 되면 그 이물질은 ‘공을 제대로 제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마구를 던지기 위한 치트키’로 변합니다.

메이저리그 관련 종사자들 사이에도 이 건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ESPN에 칼럼을 기고하는 버스터 올니는 5월에 칼럼을 통해 메이저리그가 규정을 완화하거나, 징계를 완화해야 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가 밝힌 일화는 꽤나 신선합니다. 본래 메이저리그에서는 경기 시작 전 심판들이 경기에 사용할 공들에 진흙을 바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경기장에서 일하는 클럽하우스 직원들이 이 일을 대신해주는 경우가 잦습니다. 어떤 직원은 심판들보다 더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경기 전 투수들이 팁을 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물질을 공에 발라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문제가 된 적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규정은 이미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면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에 글을 기고하는 매튜 트루블러드는 지금의 규정을 절대로 바꿔선 안 된다고 주장헀습니다. 이물질 없이 정해진 진흙과 로진만으로 야구공을 컨트롤하는 능력도 선수의 능력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논지를 전개하면서 예시로 들은 투수는 뉴욕 양키스의 마이클 피네다입니다. 피네다는 2011년 풀타임 선발투수로 데뷔해 부상으로 2년을 날려먹은 뒤, 작년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팔뚝에 송진을 묻히고 나온 것이 적발되어 퇴장 당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피네다의 변화구, 슬라이더의 움직임은 작년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래 그래프를 먼저 보시죠.

[가로축은 월, 세로축은 횡방향 움직임(단위: 인치)]

가로축은 피네다가 공을 던진 시기(월/연도), 세로축은 슬라이더의 수평 방향 움직임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세로축 값이 클수록 공이 많이 휜다고 보시면 됩니다. 09/11과 04/14 사이에 갭이 있는데, 04/14 즉 2014년 4월 이래 슬라이더의 움직임이 증가한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원인을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어찌됐든 트루블러드는 송진을 묻히고 나온 기억을 들어 이것이 이물질의 영향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공에 흠집을 내거나 이물질을 과도하게 바르면 궤적이 크게 변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습니다.

물론 트루블러드의 우려대로 어떤 선수들은 자신의 능력 이상을 발휘하기 위해 이물질을 악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비이락이라고, 과거 클레이 벅홀츠라는 선수가 이물질 적발로 퇴장 당한 이후 성적이 곤두박질 친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트루블러드의 논지를 그대로 차용하자면, 이런 이물질을 사용해서 성적을 내는 것 역시 선수 개개인의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스테로이드 등의 금지약물 논쟁 때도 항상 나오는 주장 중 하나는 ‘규정을 어겨도 B급은 계속 B급’이라는 것입니다. 선크림/송진 등의 이물질 역시 선수에게 도움닫기를 해주는 보조도구 정도의 역할 밖에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대놓고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걸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명 야구 선수들에게 규정 외의 이물질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있고, 그것이 비정상적인 수준이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어떤 관계자는 적극적으로 선크림 등의 이물질 정도는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과도한 이물질 사용은 스핏볼이라는 마구를 정상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실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 선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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