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자가 질문을 받을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AMA는 Ask me anything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뜻입니다.
Date | 17/09/21 16:00:35 |
Name | 기쁨평안 |
Subject | 개신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
저는 개신교인입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신앙이력은 아닌 것 같고요.. 제 이력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집안 성향이 초자연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분위기여서 (할아버지 원불교 / 할머니 기독교 / 어머니 불교 / 큰할아버지네 원불교 & 명리학) 잡다하게 접촉이 있다가, 군대 가기전 성당을 다녔습니다. 군대에서 별다른 종교생활을 안하다가, 꿈에 지옥에 갔다온 체험을 하게 되고 집요하게 성경을 파다가, 결국 제대하고 개신교에 귀의하게 됩니다. 주변에 성경에 대해 알려줄수 있는 사람이 없어 닥치는 대로 책과 인터넷을 통해 공부하다가, 어디어디가 좋다더라 이야기 들리면 닥치고 돌격해서 부딪히면서 개신교의 다양한 변주를 접합니다. 병고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기도원, 18세기 네덜란드 근본주의 교리를 따르는 독립교단, "예언 능력"을 훈련하는 선교단체, 사람들에게 예언을 해주는 팀을 운영하는 교회 등등. 요새 핫했던 전병욱이 담임하던 삼일교회에도 오래 다니고, 결혼하면서 2만명되는 교회로 옮겼다가, 올해부터는 7년간 성도가 한명도 없던 개척교회의 첫 성도가 되어서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안티 크리스챤이었던 적도 있고, 지금은 나름 열심히 생활하고 있기도 한데, 다른 분들이 오해하는 부분도 있기도 한 것 같고 아니면 제가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데, 이런 류의 이야기는 항상 싸움만 나서 조심스러웠지만, 홍차넷은 분위기가 좋아서 그냥 올려봅니다. 단, 저 역시 제 식견의 한계가 있어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또 제가 옳기만 한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비난과 공격은 좀 피해주시고, 편안하게 이야기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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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예전에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제가 기억이 안나네요 ㅎㅎ 그 당시에도 그렇게 크게 생각할정도로 심하게 뭐라 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신경안쓰셔도 될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들리실 수 있겠지만 개신교는 다른 종교보다 오히려 민주주의적입니다.
장로와 안수집사가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이 되고 장로들은 담임목사 고용(? 전문용어로 청빙) 및 제반 사항에 대한 의결권을 가집니다. 국회제도랑 똑같죠.
(그래서 장로들은 국회의원만큼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즉,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과 비슷하게 운영... 더 보기
신경안쓰셔도 될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들리실 수 있겠지만 개신교는 다른 종교보다 오히려 민주주의적입니다.
장로와 안수집사가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이 되고 장로들은 담임목사 고용(? 전문용어로 청빙) 및 제반 사항에 대한 의결권을 가집니다. 국회제도랑 똑같죠.
(그래서 장로들은 국회의원만큼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즉,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과 비슷하게 운영... 더 보기
일단, 예전에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제가 기억이 안나네요 ㅎㅎ 그 당시에도 그렇게 크게 생각할정도로 심하게 뭐라 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신경안쓰셔도 될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들리실 수 있겠지만 개신교는 다른 종교보다 오히려 민주주의적입니다.
장로와 안수집사가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이 되고 장로들은 담임목사 고용(? 전문용어로 청빙) 및 제반 사항에 대한 의결권을 가집니다. 국회제도랑 똑같죠.
(그래서 장로들은 국회의원만큼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즉,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과 비슷하게 운영되는 것 같습니다. 제도 자체는 민주적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세습 문제도 그 내부 교인들은 찬성을 하기 때문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은 올바르고 건전한 교회상에 대해 교육을 받은 경우가 드뭅니다. 결국 우민화가 이뤄지는 건데, 그건 교인들 스스로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교회 밖으로 돌려도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정보와 논리는 정립이 다 되어있거든요.
목사가 앞에서 설교하는데, 그 내용이 잘못되었을 때 정정하는 케이스에 대해서는 글쎄요 일단 따로 이야기를 해도 되고, 홈페이지 게시판에다 올려도 되고, 통로는 많이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마음에 안들면 신자가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그렇죠.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사실 교리 논쟁은 거의 천년넘게 계속되다보니 왠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가 다 끝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 95%? 최근에는 한 80%인것 같기는 하지만)
나머지 5% 에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건 사실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도 있고, 대세에 지장이 없는 경우도 많아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 겠지만)
신경안쓰셔도 될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들리실 수 있겠지만 개신교는 다른 종교보다 오히려 민주주의적입니다.
장로와 안수집사가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이 되고 장로들은 담임목사 고용(? 전문용어로 청빙) 및 제반 사항에 대한 의결권을 가집니다. 국회제도랑 똑같죠.
(그래서 장로들은 국회의원만큼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즉,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과 비슷하게 운영되는 것 같습니다. 제도 자체는 민주적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세습 문제도 그 내부 교인들은 찬성을 하기 때문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은 올바르고 건전한 교회상에 대해 교육을 받은 경우가 드뭅니다. 결국 우민화가 이뤄지는 건데, 그건 교인들 스스로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교회 밖으로 돌려도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정보와 논리는 정립이 다 되어있거든요.
목사가 앞에서 설교하는데, 그 내용이 잘못되었을 때 정정하는 케이스에 대해서는 글쎄요 일단 따로 이야기를 해도 되고, 홈페이지 게시판에다 올려도 되고, 통로는 많이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마음에 안들면 신자가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그렇죠.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사실 교리 논쟁은 거의 천년넘게 계속되다보니 왠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가 다 끝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 95%? 최근에는 한 80%인것 같기는 하지만)
나머지 5% 에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건 사실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도 있고, 대세에 지장이 없는 경우도 많아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 겠지만)
종교는 유/불/선/개신/카톨릭/무속을 다 아우르는 개념일텐데요.
만약 질문하신 맥락이 교회를 다녀야 개신교신앙을 가진걸로 인정되나요? 라고 물으신 것이라면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새는 생략하는 교회도 많이 있지만, 전통적인 예배에는 "사도신경"을 외우는 순서가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을 모두 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다 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 더 보기
만약 질문하신 맥락이 교회를 다녀야 개신교신앙을 가진걸로 인정되나요? 라고 물으신 것이라면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새는 생략하는 교회도 많이 있지만, 전통적인 예배에는 "사도신경"을 외우는 순서가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을 모두 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다 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 더 보기
종교는 유/불/선/개신/카톨릭/무속을 다 아우르는 개념일텐데요.
만약 질문하신 맥락이 교회를 다녀야 개신교신앙을 가진걸로 인정되나요? 라고 물으신 것이라면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새는 생략하는 교회도 많이 있지만, 전통적인 예배에는 "사도신경"을 외우는 순서가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을 모두 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다 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 "거룩한 공회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이 있으므로,
지금 당장 교회를 다니는 것과 별개로 교인들의 집합체인 큰 틀에서의 교회안에 속함을 믿는다면 같은 교인이라 할 수 있겠죠.
만약 질문하신 맥락이 교회를 다녀야 개신교신앙을 가진걸로 인정되나요? 라고 물으신 것이라면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새는 생략하는 교회도 많이 있지만, 전통적인 예배에는 "사도신경"을 외우는 순서가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을 모두 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다 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 "거룩한 공회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이 있으므로,
지금 당장 교회를 다니는 것과 별개로 교인들의 집합체인 큰 틀에서의 교회안에 속함을 믿는다면 같은 교인이라 할 수 있겠죠.
교리상 차이 약간 & 운영제도상의 차이가 결합된 경우가 많습니다.
장로교는 장로가 교회를 다스리고, 감리교는 감독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농담같은 사실입니다.ㅋㅋ)
대부분의 교리가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곳이 감리교인데요.
장로교 계열은 구원받을 사람이 이미 예정되어있고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함이 끝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인간은 누가 그 대상인지 절대 알수가 없다.
감리교는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어있고 그것에 응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더 보기
장로교는 장로가 교회를 다스리고, 감리교는 감독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농담같은 사실입니다.ㅋㅋ)
대부분의 교리가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곳이 감리교인데요.
장로교 계열은 구원받을 사람이 이미 예정되어있고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함이 끝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인간은 누가 그 대상인지 절대 알수가 없다.
감리교는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어있고 그것에 응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더 보기
교리상 차이 약간 & 운영제도상의 차이가 결합된 경우가 많습니다.
장로교는 장로가 교회를 다스리고, 감리교는 감독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농담같은 사실입니다.ㅋㅋ)
대부분의 교리가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곳이 감리교인데요.
장로교 계열은 구원받을 사람이 이미 예정되어있고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함이 끝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인간은 누가 그 대상인지 절대 알수가 없다.
감리교는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어있고 그것에 응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찌보면 결과에 대한 해석의 차이일뿐 실제로 보이는 현상은 큰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 외 침례/성결 이런 교단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순복음은 또 조금 다르긴 한데....거기까지 하기엔 너무 나간 것 같아서 이만 줄일게요 ㅎㅎ
장로교는 장로가 교회를 다스리고, 감리교는 감독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농담같은 사실입니다.ㅋㅋ)
대부분의 교리가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곳이 감리교인데요.
장로교 계열은 구원받을 사람이 이미 예정되어있고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함이 끝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인간은 누가 그 대상인지 절대 알수가 없다.
감리교는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어있고 그것에 응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찌보면 결과에 대한 해석의 차이일뿐 실제로 보이는 현상은 큰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 외 침례/성결 이런 교단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순복음은 또 조금 다르긴 한데....거기까지 하기엔 너무 나간 것 같아서 이만 줄일게요 ㅎㅎ
앞선 댓글들에 조금씩 말씀을 드렸는데 다시 정리하는 측면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장로교 : 장로가 교회를 다스립니다. 예정론(구원받을 신자가 예정되어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게 누군지 모른다.)을 믿습니다.
감리교 : 감독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좀더 중앙집권적(?)입니다. 각 감독이 있고 그 위에 지역별 교회를 총괄하는 주교(?) 개념이 있고..그렇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되어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라고 믿습니다.
침례교 : 입교를 할 때 세례(머리를 물로 적시는 것)를 하지 않고 침례(온 몸을... 더 보기
장로교 : 장로가 교회를 다스립니다. 예정론(구원받을 신자가 예정되어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게 누군지 모른다.)을 믿습니다.
감리교 : 감독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좀더 중앙집권적(?)입니다. 각 감독이 있고 그 위에 지역별 교회를 총괄하는 주교(?) 개념이 있고..그렇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되어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라고 믿습니다.
침례교 : 입교를 할 때 세례(머리를 물로 적시는 것)를 하지 않고 침례(온 몸을... 더 보기
앞선 댓글들에 조금씩 말씀을 드렸는데 다시 정리하는 측면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장로교 : 장로가 교회를 다스립니다. 예정론(구원받을 신자가 예정되어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게 누군지 모른다.)을 믿습니다.
감리교 : 감독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좀더 중앙집권적(?)입니다. 각 감독이 있고 그 위에 지역별 교회를 총괄하는 주교(?) 개념이 있고..그렇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되어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라고 믿습니다.
침례교 : 입교를 할 때 세례(머리를 물로 적시는 것)를 하지 않고 침례(온 몸을 물 속에 풍덩 담그는 것)를 행합니다.
성결교 : 국내산(?) 교단입니다.
순복음 : 내세에 치중한 구원과 죄사함 교리 외에 현세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가지 은총과 능력이 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단의 분류는 정말 다양하지만 "사도신경"이 일단 기본입니다.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을 하나라도 부정하면 같은 형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반 교양용으로 좋은 종교 서적은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소설로는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좀더 라이트한 소설은 조반니 과레스키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입니다.
장로교 : 장로가 교회를 다스립니다. 예정론(구원받을 신자가 예정되어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게 누군지 모른다.)을 믿습니다.
감리교 : 감독이 교회를 다스립니다. 좀더 중앙집권적(?)입니다. 각 감독이 있고 그 위에 지역별 교회를 총괄하는 주교(?) 개념이 있고..그렇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되어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라고 믿습니다.
침례교 : 입교를 할 때 세례(머리를 물로 적시는 것)를 하지 않고 침례(온 몸을 물 속에 풍덩 담그는 것)를 행합니다.
성결교 : 국내산(?) 교단입니다.
순복음 : 내세에 치중한 구원과 죄사함 교리 외에 현세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가지 은총과 능력이 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단의 분류는 정말 다양하지만 "사도신경"이 일단 기본입니다.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을 하나라도 부정하면 같은 형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반 교양용으로 좋은 종교 서적은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소설로는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좀더 라이트한 소설은 조반니 과레스키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입니다.
일단 기존에 인지하지 못하던 절대자에 대해 인식을 하게 되고 절대자가 존재하며, 지금 현재 여기에서 나와 교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게 되면,
즉, '믿음'이라는것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이성을 뛰어넘는 체험입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는 것이죠. 그 뒤로는 알고 있는 것과 경험한 것에 대해서 한 90%까지만 지식으로 가져가고 10%정도는 '내가 모르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정도로 공백을 가져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교인이라면 창조를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뒤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 더 보기
즉, '믿음'이라는것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이성을 뛰어넘는 체험입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는 것이죠. 그 뒤로는 알고 있는 것과 경험한 것에 대해서 한 90%까지만 지식으로 가져가고 10%정도는 '내가 모르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정도로 공백을 가져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교인이라면 창조를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뒤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 더 보기
일단 기존에 인지하지 못하던 절대자에 대해 인식을 하게 되고 절대자가 존재하며, 지금 현재 여기에서 나와 교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게 되면,
즉, '믿음'이라는것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이성을 뛰어넘는 체험입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는 것이죠. 그 뒤로는 알고 있는 것과 경험한 것에 대해서 한 90%까지만 지식으로 가져가고 10%정도는 '내가 모르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정도로 공백을 가져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교인이라면 창조를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뒤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한번의 창조로 모든 종류의 동식물이 탄생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생물체의 최초 발현 까지가 창조주의 섭리이며 그 이후에는 창조주의 법칙대로 진행되면서 진화가 일어났다는 주장,
생물체의 진화 과정에도 창조주의 개입이 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게 있습니다.
즉, '믿음'이라는것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이성을 뛰어넘는 체험입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는 것이죠. 그 뒤로는 알고 있는 것과 경험한 것에 대해서 한 90%까지만 지식으로 가져가고 10%정도는 '내가 모르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정도로 공백을 가져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교인이라면 창조를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뒤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한번의 창조로 모든 종류의 동식물이 탄생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생물체의 최초 발현 까지가 창조주의 섭리이며 그 이후에는 창조주의 법칙대로 진행되면서 진화가 일어났다는 주장,
생물체의 진화 과정에도 창조주의 개입이 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게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상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일단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인간인가?"에 대해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고 나서야 (본인의 영혼만이) 구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겠죠.
겉으로 드러난 사람이 아무리 거룩해보이고 선해보여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실제 어떠한지는 아무도 알수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장로교에서는 "사실은 구원이 예정되지 않았었나보군." 이라고 해석하고
감리교에서는 "마지막까지 구원을 거절하였군." 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끝까지 예정된 사람을 포기하지 않... 더 보기
일단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인간인가?"에 대해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고 나서야 (본인의 영혼만이) 구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겠죠.
겉으로 드러난 사람이 아무리 거룩해보이고 선해보여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실제 어떠한지는 아무도 알수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장로교에서는 "사실은 구원이 예정되지 않았었나보군." 이라고 해석하고
감리교에서는 "마지막까지 구원을 거절하였군." 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끝까지 예정된 사람을 포기하지 않... 더 보기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상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일단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인간인가?"에 대해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고 나서야 (본인의 영혼만이) 구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겠죠.
겉으로 드러난 사람이 아무리 거룩해보이고 선해보여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실제 어떠한지는 아무도 알수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장로교에서는 "사실은 구원이 예정되지 않았었나보군." 이라고 해석하고
감리교에서는 "마지막까지 구원을 거절하였군." 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끝까지 예정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인도하셨군.' 이라고 해석하고
감리교에서는 "결국 마지막에는 구원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였군." 이라고 해석합니다.
일단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인간인가?"에 대해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고 나서야 (본인의 영혼만이) 구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겠죠.
겉으로 드러난 사람이 아무리 거룩해보이고 선해보여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실제 어떠한지는 아무도 알수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장로교에서는 "사실은 구원이 예정되지 않았었나보군." 이라고 해석하고
감리교에서는 "마지막까지 구원을 거절하였군." 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끝까지 예정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인도하셨군.' 이라고 해석하고
감리교에서는 "결국 마지막에는 구원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였군." 이라고 해석합니다.
오히려 인간들 각자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며 맞춰나가라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들끼리 자신의 견해만을 내세우고 남의 견해를 짓밟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지만.
요한계시록의 도입부에 보면 요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묘사가 머리는 새하얗고 눈은 불꽃같고 입에서는 칼이 나오고...이런 묘사가 전체적으로 죽 나옵니다.
그 이후 일곱개의 교회에게 예수님이 전하는 메세지가 있는데, 각 교회에게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부분적입니다.
그 말은 일곱 교회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에게 보... 더 보기
그것을 인간들끼리 자신의 견해만을 내세우고 남의 견해를 짓밟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지만.
요한계시록의 도입부에 보면 요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묘사가 머리는 새하얗고 눈은 불꽃같고 입에서는 칼이 나오고...이런 묘사가 전체적으로 죽 나옵니다.
그 이후 일곱개의 교회에게 예수님이 전하는 메세지가 있는데, 각 교회에게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부분적입니다.
그 말은 일곱 교회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에게 보... 더 보기
오히려 인간들 각자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며 맞춰나가라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들끼리 자신의 견해만을 내세우고 남의 견해를 짓밟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지만.
요한계시록의 도입부에 보면 요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묘사가 머리는 새하얗고 눈은 불꽃같고 입에서는 칼이 나오고...이런 묘사가 전체적으로 죽 나옵니다.
그 이후 일곱개의 교회에게 예수님이 전하는 메세지가 있는데, 각 교회에게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부분적입니다.
그 말은 일곱 교회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에게 보여진 예수님의 모습을 공유하고 종합해야지만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만 드러내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교회는 서로 싸우느라 바쁘지만...
그것을 인간들끼리 자신의 견해만을 내세우고 남의 견해를 짓밟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지만.
요한계시록의 도입부에 보면 요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묘사가 머리는 새하얗고 눈은 불꽃같고 입에서는 칼이 나오고...이런 묘사가 전체적으로 죽 나옵니다.
그 이후 일곱개의 교회에게 예수님이 전하는 메세지가 있는데, 각 교회에게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부분적입니다.
그 말은 일곱 교회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에게 보여진 예수님의 모습을 공유하고 종합해야지만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만 드러내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교회는 서로 싸우느라 바쁘지만...
너무 포괄적인 주제에 대해 짧은 요청을 주신거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동성애에 대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극우적인 입장을 가진 기득권층이 있고, 인류애 측면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개혁파 쪽에 있습니다.
저는 개혁파 입장에 가깝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나올수 없습니다.
그 죄의 형태가 누구는 거짓말로, 누구는 폭력으로, 누구는 차가운 무관심으로, 누구는 문란한 성생활(동성/이성 구분없이)로 발현됩니다.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차별할 권리도 이유도 없다고 ... 더 보기
동성애에 대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극우적인 입장을 가진 기득권층이 있고, 인류애 측면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개혁파 쪽에 있습니다.
저는 개혁파 입장에 가깝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나올수 없습니다.
그 죄의 형태가 누구는 거짓말로, 누구는 폭력으로, 누구는 차가운 무관심으로, 누구는 문란한 성생활(동성/이성 구분없이)로 발현됩니다.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차별할 권리도 이유도 없다고 ... 더 보기
너무 포괄적인 주제에 대해 짧은 요청을 주신거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동성애에 대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극우적인 입장을 가진 기득권층이 있고, 인류애 측면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개혁파 쪽에 있습니다.
저는 개혁파 입장에 가깝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나올수 없습니다.
그 죄의 형태가 누구는 거짓말로, 누구는 폭력으로, 누구는 차가운 무관심으로, 누구는 문란한 성생활(동성/이성 구분없이)로 발현됩니다.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차별할 권리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거대한 영적인 흐름으로써 세속적인 가치관이 퍼지는 것은 경계를 하고있습니다.
그 속에는 외모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성적인 문란함 등이 포함되어있고요.
그런 측면에서 쾌락만을 위한 성관계(동성/이성 구별없이)가 만연해지는 것은 반대합니다.
율법은 글쎄요. 그 시절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한 법률이죠..?
동성애에 대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극우적인 입장을 가진 기득권층이 있고, 인류애 측면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개혁파 쪽에 있습니다.
저는 개혁파 입장에 가깝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나올수 없습니다.
그 죄의 형태가 누구는 거짓말로, 누구는 폭력으로, 누구는 차가운 무관심으로, 누구는 문란한 성생활(동성/이성 구분없이)로 발현됩니다.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차별할 권리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거대한 영적인 흐름으로써 세속적인 가치관이 퍼지는 것은 경계를 하고있습니다.
그 속에는 외모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성적인 문란함 등이 포함되어있고요.
그런 측면에서 쾌락만을 위한 성관계(동성/이성 구별없이)가 만연해지는 것은 반대합니다.
율법은 글쎄요. 그 시절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한 법률이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는데, 대부분의 종교가 그러하듯이 절제하는 것을 덕목으로 권장하는 것이 일단 있고요.
또하나는, 개신교에서 인간의 목적 중 가장 큰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이해할수 있도록 가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유독 가족에 빗대어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죠.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임신한 엄마와 출산한 아기 등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온전한 가정을 이루과 그 안에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더 잘 아... 더 보기
또하나는, 개신교에서 인간의 목적 중 가장 큰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이해할수 있도록 가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유독 가족에 빗대어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죠.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임신한 엄마와 출산한 아기 등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온전한 가정을 이루과 그 안에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더 잘 아... 더 보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는데, 대부분의 종교가 그러하듯이 절제하는 것을 덕목으로 권장하는 것이 일단 있고요.
또하나는, 개신교에서 인간의 목적 중 가장 큰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이해할수 있도록 가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유독 가족에 빗대어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죠.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임신한 엄마와 출산한 아기 등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온전한 가정을 이루과 그 안에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때 마다 쓰인 단어가 히브리어로 "야다(YADA)") 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남녀사이의 성관계에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합일을 이루는 것 처럼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서로에게 내어주고 내어받으며
때로는 가장 약점이 되는 부분까지도 드러내며 마주보는, 가장 친밀하게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관계 역시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헌신과 사랑없이 쾌락만을 위해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죠.
괘락만을 위해서 먹는 간식 자체로 죄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앞서말씀드렸듯이 무절제한 행위들이 과중되고 반복되면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또하나는, 개신교에서 인간의 목적 중 가장 큰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이해할수 있도록 가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유독 가족에 빗대어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죠.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임신한 엄마와 출산한 아기 등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온전한 가정을 이루과 그 안에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때 마다 쓰인 단어가 히브리어로 "야다(YADA)") 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남녀사이의 성관계에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합일을 이루는 것 처럼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서로에게 내어주고 내어받으며
때로는 가장 약점이 되는 부분까지도 드러내며 마주보는, 가장 친밀하게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관계 역시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헌신과 사랑없이 쾌락만을 위해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죠.
괘락만을 위해서 먹는 간식 자체로 죄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앞서말씀드렸듯이 무절제한 행위들이 과중되고 반복되면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답변 감사합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모태신앙 후 19년 동안 개척교회에 주말엔 살다시피 하면서 악기, 노동, 식당봉사, 목사님 집 이사 (이삿짐 센터 부르면 20만원이면 될 것을 왜 10대 두명을 밤새가며 책을 나르게 했는지....) 등 개인적으로 안 좋은 경험을 갖다가, 문득 머리가 커 가면서 던지는 질문들에 개신교가 효과적인 답변을 주지 못하여 결국은 무교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하신 영적 경험이 없어서 일 수도 있구요.
개신교 극우 기득권층 - 그러니까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성적 소수자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 더 보기
저로 말씀드리자면 모태신앙 후 19년 동안 개척교회에 주말엔 살다시피 하면서 악기, 노동, 식당봉사, 목사님 집 이사 (이삿짐 센터 부르면 20만원이면 될 것을 왜 10대 두명을 밤새가며 책을 나르게 했는지....) 등 개인적으로 안 좋은 경험을 갖다가, 문득 머리가 커 가면서 던지는 질문들에 개신교가 효과적인 답변을 주지 못하여 결국은 무교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하신 영적 경험이 없어서 일 수도 있구요.
개신교 극우 기득권층 - 그러니까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성적 소수자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 더 보기
답변 감사합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모태신앙 후 19년 동안 개척교회에 주말엔 살다시피 하면서 악기, 노동, 식당봉사, 목사님 집 이사 (이삿짐 센터 부르면 20만원이면 될 것을 왜 10대 두명을 밤새가며 책을 나르게 했는지....) 등 개인적으로 안 좋은 경험을 갖다가, 문득 머리가 커 가면서 던지는 질문들에 개신교가 효과적인 답변을 주지 못하여 결국은 무교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하신 영적 경험이 없어서 일 수도 있구요.
개신교 극우 기득권층 - 그러니까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성적 소수자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 에 대한 환멸이 가장 큽니다. 인신매매, 인신공양, 살인 등의 지금 관점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율법들은 단지 율법으로 취급하면서 몇 줄 되지도 않는 소돔/고모라의 동성애에 대한 편린만으로, 자신과 다르다고 현대에 와서도 죄악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안도했던 경험도 있구요.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개신교인들 중 글쓴이분과 같인 개혁적인 성향의 분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극우 기득권들만 목소리가 큰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모태신앙 후 19년 동안 개척교회에 주말엔 살다시피 하면서 악기, 노동, 식당봉사, 목사님 집 이사 (이삿짐 센터 부르면 20만원이면 될 것을 왜 10대 두명을 밤새가며 책을 나르게 했는지....) 등 개인적으로 안 좋은 경험을 갖다가, 문득 머리가 커 가면서 던지는 질문들에 개신교가 효과적인 답변을 주지 못하여 결국은 무교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하신 영적 경험이 없어서 일 수도 있구요.
개신교 극우 기득권층 - 그러니까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성적 소수자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 에 대한 환멸이 가장 큽니다. 인신매매, 인신공양, 살인 등의 지금 관점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율법들은 단지 율법으로 취급하면서 몇 줄 되지도 않는 소돔/고모라의 동성애에 대한 편린만으로, 자신과 다르다고 현대에 와서도 죄악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안도했던 경험도 있구요.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개신교인들 중 글쓴이분과 같인 개혁적인 성향의 분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극우 기득권들만 목소리가 큰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의 성적인 교제에 관한 포지션은 어찌보면 훨씬 더 좁고, 어찌보면 더 꼴통에 가깝습니다.
대해서는 저는 원나잇, 헌팅, 유흥업소 등등에 대해서 배격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저는 동등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며,
제 자신이 성경에 부합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것을 이루기에 힘쓰려고 할 뿐입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국 깨달은 것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더 보기
하지만 저의 성적인 교제에 관한 포지션은 어찌보면 훨씬 더 좁고, 어찌보면 더 꼴통에 가깝습니다.
대해서는 저는 원나잇, 헌팅, 유흥업소 등등에 대해서 배격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저는 동등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며,
제 자신이 성경에 부합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것을 이루기에 힘쓰려고 할 뿐입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국 깨달은 것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더 보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의 성적인 교제에 관한 포지션은 어찌보면 훨씬 더 좁고, 어찌보면 더 꼴통에 가깝습니다.
대해서는 저는 원나잇, 헌팅, 유흥업소 등등에 대해서 배격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저는 동등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며,
제 자신이 성경에 부합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것을 이루기에 힘쓰려고 할 뿐입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국 깨달은 것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그에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바르고 깨끗하게 살자고 모인(혹은 그렇다고 믿고 싶은) 교회 안에서도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군상이 다 모여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곳이 있는가?'
'나 자신이 그런 환경 속에 처한 다면 나는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저는 사실 아직도 이 두가지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고난과 모욕을 당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곳이 Rosinante 님이 경험하셨고, 제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어찌보면 이게 "교회"의 거의 최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지금 현재가 가장 최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더 한걸음도 나아질 수 없는.
이걸 위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거죠.
하지만 저의 성적인 교제에 관한 포지션은 어찌보면 훨씬 더 좁고, 어찌보면 더 꼴통에 가깝습니다.
대해서는 저는 원나잇, 헌팅, 유흥업소 등등에 대해서 배격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저는 동등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며,
제 자신이 성경에 부합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것을 이루기에 힘쓰려고 할 뿐입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국 깨달은 것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그에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바르고 깨끗하게 살자고 모인(혹은 그렇다고 믿고 싶은) 교회 안에서도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군상이 다 모여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곳이 있는가?'
'나 자신이 그런 환경 속에 처한 다면 나는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저는 사실 아직도 이 두가지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고난과 모욕을 당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곳이 Rosinante 님이 경험하셨고, 제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어찌보면 이게 "교회"의 거의 최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지금 현재가 가장 최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더 한걸음도 나아질 수 없는.
이걸 위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거죠.
성경에는 여러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개념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채로 쓰이다보니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는데,
성경에서 쓰이는 용어는 엄밀히 말하자면 "믿지 말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로 되어있고요.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를 신으로써 섬기지 말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의 세계관에서는 여러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한 실존에 대해서는 이미 인정되고 있는 것이고요.
그 중 누구를 진짜 "신"으로써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 보기
"믿는다"는 개념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채로 쓰이다보니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는데,
성경에서 쓰이는 용어는 엄밀히 말하자면 "믿지 말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로 되어있고요.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를 신으로써 섬기지 말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의 세계관에서는 여러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한 실존에 대해서는 이미 인정되고 있는 것이고요.
그 중 누구를 진짜 "신"으로써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 보기
성경에는 여러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개념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채로 쓰이다보니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는데,
성경에서 쓰이는 용어는 엄밀히 말하자면 "믿지 말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로 되어있고요.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를 신으로써 섬기지 말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의 세계관에서는 여러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한 실존에 대해서는 이미 인정되고 있는 것이고요.
그 중 누구를 진짜 "신"으로써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굳이 가족을 예를 들어 비유를 하자면, 엄마가 아이를 낳고 기르면, 아이에게는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개념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랬는데, 이 아이를 꼬시는 다른 여자가 나타납니다. '내가 네 엄마가 되어줄께. 아니야 어쩌면 넌 진짜 내 아이일지도 몰라. 어쨌든 엄마가 되면 잘해줄께.'
그리고 이 아이는 "이제부터 당신이 내 엄마요." 하고 가는 것이죠.
애초에 친엄마는 아이에게 다른 엄마라는 개념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믿는다"는 개념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채로 쓰이다보니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는데,
성경에서 쓰이는 용어는 엄밀히 말하자면 "믿지 말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로 되어있고요.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를 신으로써 섬기지 말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의 세계관에서는 여러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한 실존에 대해서는 이미 인정되고 있는 것이고요.
그 중 누구를 진짜 "신"으로써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굳이 가족을 예를 들어 비유를 하자면, 엄마가 아이를 낳고 기르면, 아이에게는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개념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랬는데, 이 아이를 꼬시는 다른 여자가 나타납니다. '내가 네 엄마가 되어줄께. 아니야 어쩌면 넌 진짜 내 아이일지도 몰라. 어쨌든 엄마가 되면 잘해줄께.'
그리고 이 아이는 "이제부터 당신이 내 엄마요." 하고 가는 것이죠.
애초에 친엄마는 아이에게 다른 엄마라는 개념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온전히 완전한 절대자의 입장에서는 굳이 시공간을 만들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굳이 영원이라는 곳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지구를 만들고 또 물질계를 넘어선 분야까지 인식할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듭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신과 인간간의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전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로보트같이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사랑하고 복종하는 그런 관계가 아닌, 대등한 인격으로써의 자발적인 사랑이 되기위해서는
거절할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함... 더 보기
하지만 창조주는 굳이 영원이라는 곳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지구를 만들고 또 물질계를 넘어선 분야까지 인식할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듭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신과 인간간의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전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로보트같이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사랑하고 복종하는 그런 관계가 아닌, 대등한 인격으로써의 자발적인 사랑이 되기위해서는
거절할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함... 더 보기
사실 온전히 완전한 절대자의 입장에서는 굳이 시공간을 만들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굳이 영원이라는 곳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지구를 만들고 또 물질계를 넘어선 분야까지 인식할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듭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신과 인간간의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전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로보트같이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사랑하고 복종하는 그런 관계가 아닌, 대등한 인격으로써의 자발적인 사랑이 되기위해서는
거절할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재벌2세이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순전한 마음을 얻기 위해 별볼일없거나 좀 이상한 남자인척하는 드라마와 비슷한 컨셉이라고 보시면 되겠죠.
단 실제로는 여자가 진짜로 별볼일 남자처럼 오해를 너무 심하게 하니까 실제로는 재벌2세라고도 상세히 알려주고 있죠.
여자가 그말을 못믿어서 그렇지.
하지만 창조주는 굳이 영원이라는 곳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지구를 만들고 또 물질계를 넘어선 분야까지 인식할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듭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신과 인간간의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전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로보트같이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사랑하고 복종하는 그런 관계가 아닌, 대등한 인격으로써의 자발적인 사랑이 되기위해서는
거절할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재벌2세이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순전한 마음을 얻기 위해 별볼일없거나 좀 이상한 남자인척하는 드라마와 비슷한 컨셉이라고 보시면 되겠죠.
단 실제로는 여자가 진짜로 별볼일 남자처럼 오해를 너무 심하게 하니까 실제로는 재벌2세라고도 상세히 알려주고 있죠.
여자가 그말을 못믿어서 그렇지.
꿈에 지옥다녀오신 후 귀의하셨다는데
제가 아는 분 중에서도 독실한 불교신자(주말엔 절에 가고 생식을 하심)셨다가 꿈에 예수님을 만나셨다며 갑자기 개종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글쓴이께서도 본인이 꾸신 꿈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신앙의 중요한 주춧돌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우연한 계기라 생각하시나요?
도마의 이야기나,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길 권유한 악마의 이야기와 같이
신을 믿음에 있어 본인에게 '특별한 영적체험이 있었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면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라 생각하거든요.
무례할 수 있는 질문... 더 보기
제가 아는 분 중에서도 독실한 불교신자(주말엔 절에 가고 생식을 하심)셨다가 꿈에 예수님을 만나셨다며 갑자기 개종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글쓴이께서도 본인이 꾸신 꿈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신앙의 중요한 주춧돌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우연한 계기라 생각하시나요?
도마의 이야기나,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길 권유한 악마의 이야기와 같이
신을 믿음에 있어 본인에게 '특별한 영적체험이 있었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면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라 생각하거든요.
무례할 수 있는 질문... 더 보기
꿈에 지옥다녀오신 후 귀의하셨다는데
제가 아는 분 중에서도 독실한 불교신자(주말엔 절에 가고 생식을 하심)셨다가 꿈에 예수님을 만나셨다며 갑자기 개종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글쓴이께서도 본인이 꾸신 꿈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신앙의 중요한 주춧돌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우연한 계기라 생각하시나요?
도마의 이야기나,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길 권유한 악마의 이야기와 같이
신을 믿음에 있어 본인에게 '특별한 영적체험이 있었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면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라 생각하거든요.
무례할 수 있는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만, '꿈'이나 '방언기도'와 같이 비일상적인 종교체험에 대한 견해를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서도 독실한 불교신자(주말엔 절에 가고 생식을 하심)셨다가 꿈에 예수님을 만나셨다며 갑자기 개종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글쓴이께서도 본인이 꾸신 꿈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신앙의 중요한 주춧돌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우연한 계기라 생각하시나요?
도마의 이야기나,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길 권유한 악마의 이야기와 같이
신을 믿음에 있어 본인에게 '특별한 영적체험이 있었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면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라 생각하거든요.
무례할 수 있는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만, '꿈'이나 '방언기도'와 같이 비일상적인 종교체험에 대한 견해를 여쭙고 싶습니다.
일단 저의 꿈 체험은 잠들기 전에 일어난 일들과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군생활의 여러가지 어려움(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도망간다던가) 끝에 그 날 밤에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세상을 지배할 능력을 얻겠다고 (속으로, 군대니까) 울부짖으며 잠이 들었는데,
너무나 생생하게 그런 선택을 하고 난 다음의 삶의 모습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이죠.
그 꿈이 기존에 제가 경험하던 꿈과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므로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자마자 제 친... 더 보기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군생활의 여러가지 어려움(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도망간다던가) 끝에 그 날 밤에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세상을 지배할 능력을 얻겠다고 (속으로, 군대니까) 울부짖으며 잠이 들었는데,
너무나 생생하게 그런 선택을 하고 난 다음의 삶의 모습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이죠.
그 꿈이 기존에 제가 경험하던 꿈과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므로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자마자 제 친... 더 보기
일단 저의 꿈 체험은 잠들기 전에 일어난 일들과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군생활의 여러가지 어려움(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도망간다던가) 끝에 그 날 밤에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세상을 지배할 능력을 얻겠다고 (속으로, 군대니까) 울부짖으며 잠이 들었는데,
너무나 생생하게 그런 선택을 하고 난 다음의 삶의 모습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이죠.
그 꿈이 기존에 제가 경험하던 꿈과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므로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자마자 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단 성경책을 좀 보내보라고 하였고요. 그 친구는 카톨릭 신자였던 관계로 카톨릭 성경(공동번역)을 보내주게 됩니다. 그래서 카톨릭신자로서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 역시 정규교육을 받고 이과 출신의 평범한 남성입니다. 당연히 그러한 꿈이 혹시 무의식의 발로인지, 어떤 억압된 현실에 대한 왜곡된 투영인지에 대해
왜 점검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과정 끝에 이것은 자연적인 꿈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죠..
종교를 믿는 다는 것은, 즉 학(學)을 넘어서 도(道)로 넘어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초자연적인 체험을 동반하게 됩니다.
개중에는 그러한 것들 - 어떤 기적-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크건 작건간에 그러한 체험은 다들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건강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지성과 영성이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꿈을 통해서, 때로는 성경 구절을 통해서, 때로는 누군가의 지나가는 듯한 말에서, 라디오에서, tv 드라마에서도 하나님의 메세지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본인만이 알수있는 그런 주관적인 영역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착각이나 심리학적인 진단을 내리기보다,
그러한 메세지가 성경의 큰 맥락에서 적절한지 살펴보고 따져보는 검증과 분별의 과정은 필요하겠죠.
방언기도에 대해서는 저 역시 제가 체험한 부분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방언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게 된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고 주변에서 이것이 방언기도인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는 상황이어서 한 두달간의 검증과 연구 끝에 방언기도임을 알게 되었죠.
제가 경험한 방언기도의 존재의 이유는 인간 이성에 대한 겸손함의 표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방언기도를 하는 동안 스스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임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나긴 시간동안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음성을 입으로 되내이면서 있는 시간을 통해 인간 이성의 극한인 "언어"라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경험을 하는 것이죠.
사실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이성을 죽이는 행위인데, 그것의 극한이 방언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이 죽는 동안 이성에 억눌려있던 영성은 더욱 살아나서 초월적인 영역에 더 잘 머무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끝난 뒤에는 어떠한 체험이나 심경의 변화같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성경적인 가치관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검증과 분별이 필요합니다.
일부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이러한 검증의 절차가 없이 과도한 영성위주의 신앙이 강조되는 부분이 있어, 반지성주의가 퍼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조심해서 해야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군생활의 여러가지 어려움(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도망간다던가) 끝에 그 날 밤에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세상을 지배할 능력을 얻겠다고 (속으로, 군대니까) 울부짖으며 잠이 들었는데,
너무나 생생하게 그런 선택을 하고 난 다음의 삶의 모습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이죠.
그 꿈이 기존에 제가 경험하던 꿈과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므로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자마자 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단 성경책을 좀 보내보라고 하였고요. 그 친구는 카톨릭 신자였던 관계로 카톨릭 성경(공동번역)을 보내주게 됩니다. 그래서 카톨릭신자로서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 역시 정규교육을 받고 이과 출신의 평범한 남성입니다. 당연히 그러한 꿈이 혹시 무의식의 발로인지, 어떤 억압된 현실에 대한 왜곡된 투영인지에 대해
왜 점검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과정 끝에 이것은 자연적인 꿈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죠..
종교를 믿는 다는 것은, 즉 학(學)을 넘어서 도(道)로 넘어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초자연적인 체험을 동반하게 됩니다.
개중에는 그러한 것들 - 어떤 기적-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크건 작건간에 그러한 체험은 다들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건강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지성과 영성이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꿈을 통해서, 때로는 성경 구절을 통해서, 때로는 누군가의 지나가는 듯한 말에서, 라디오에서, tv 드라마에서도 하나님의 메세지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본인만이 알수있는 그런 주관적인 영역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착각이나 심리학적인 진단을 내리기보다,
그러한 메세지가 성경의 큰 맥락에서 적절한지 살펴보고 따져보는 검증과 분별의 과정은 필요하겠죠.
방언기도에 대해서는 저 역시 제가 체험한 부분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방언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게 된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고 주변에서 이것이 방언기도인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는 상황이어서 한 두달간의 검증과 연구 끝에 방언기도임을 알게 되었죠.
제가 경험한 방언기도의 존재의 이유는 인간 이성에 대한 겸손함의 표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방언기도를 하는 동안 스스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임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나긴 시간동안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음성을 입으로 되내이면서 있는 시간을 통해 인간 이성의 극한인 "언어"라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경험을 하는 것이죠.
사실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이성을 죽이는 행위인데, 그것의 극한이 방언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이 죽는 동안 이성에 억눌려있던 영성은 더욱 살아나서 초월적인 영역에 더 잘 머무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끝난 뒤에는 어떠한 체험이나 심경의 변화같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성경적인 가치관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검증과 분별이 필요합니다.
일부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이러한 검증의 절차가 없이 과도한 영성위주의 신앙이 강조되는 부분이 있어, 반지성주의가 퍼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조심해서 해야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럼 꿈에 부처님 나오면 다시 개종하실건가요??'를 묻고 싶었는데 묻지 못하여 답답했던 경험이 있어 이 기회에 풀어보고자 무례할 수 있는 질문 드렸습니다.
본인도 직접 방언기도 경험이 있으셨군요. 방언기도를 하는 동안 본인이 의미를 모르는 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으신건가요? 입으로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은 매우 의식적인 행위인데 방언기도 중에는 의도치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인가요 소리를 낸다는 의도는 있는건가요? 종료후에 본인의 기도가 어떤 의미였다는 막연한 이미지 정도는 잡히는건가요?
샤머니즘에서 나타나는 무병, 신내림 상태와는 어떤 점에서 구별된다 생각하시나요?
본인도 직접 방언기도 경험이 있으셨군요. 방언기도를 하는 동안 본인이 의미를 모르는 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으신건가요? 입으로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은 매우 의식적인 행위인데 방언기도 중에는 의도치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인가요 소리를 낸다는 의도는 있는건가요? 종료후에 본인의 기도가 어떤 의미였다는 막연한 이미지 정도는 잡히는건가요?
샤머니즘에서 나타나는 무병, 신내림 상태와는 어떤 점에서 구별된다 생각하시나요?
방언기도라는 것이 성경에는 두가지가 나오는데요.
하나는 시전하는 사람이 기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의미를 알기어러운 음성의 발현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것은 후자이고요.
후자에대해서만 말씀을 드리자면,
깊은 영적인 상태가 되면(무아지경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은 또렷합니다)
몸의 진동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방언기도라는 것은 그 진동이 혀와 입에 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저의 처음 경험은 '어 이게 뭐지?' 하고 중단하고, 다시 기도하다가'으잉? 혀가 왜이러지?' 했던... 더 보기
하나는 시전하는 사람이 기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의미를 알기어러운 음성의 발현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것은 후자이고요.
후자에대해서만 말씀을 드리자면,
깊은 영적인 상태가 되면(무아지경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은 또렷합니다)
몸의 진동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방언기도라는 것은 그 진동이 혀와 입에 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저의 처음 경험은 '어 이게 뭐지?' 하고 중단하고, 다시 기도하다가'으잉? 혀가 왜이러지?' 했던... 더 보기
방언기도라는 것이 성경에는 두가지가 나오는데요.
하나는 시전하는 사람이 기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의미를 알기어러운 음성의 발현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것은 후자이고요.
후자에대해서만 말씀을 드리자면,
깊은 영적인 상태가 되면(무아지경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은 또렷합니다)
몸의 진동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방언기도라는 것은 그 진동이 혀와 입에 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저의 처음 경험은 '어 이게 뭐지?' 하고 중단하고, 다시 기도하다가'으잉? 혀가 왜이러지?' 했던 것이 반복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질문에답변을 드리면, 자각이 됩니다. 하지만 신체의 현상이 집중하는 상태가 아니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이 말똥말똥 하므로 때와 상황에 맞게 의지적으로 통제가 됩니다.
하지만 마음놓고 통제를 풀게 되면 매우 크코 시끄럽게 소리가 나기도 합니다.
이 방언이라는 것은 다른종교에서도 나타나는 현싱입니다.
따라서 방언기도룰 하느냐 마느냐보다 중요한것은 그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병과 신내림은 다른 영에의해 본인의 영이 제압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억눌림에 의해 당사자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되지요.
하지민 방언기도는 이성에 의해 눌려있던 영을 조금이나마 해방시켜준다는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시전하는 사람이 기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의미를 알기어러운 음성의 발현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것은 후자이고요.
후자에대해서만 말씀을 드리자면,
깊은 영적인 상태가 되면(무아지경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은 또렷합니다)
몸의 진동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방언기도라는 것은 그 진동이 혀와 입에 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저의 처음 경험은 '어 이게 뭐지?' 하고 중단하고, 다시 기도하다가'으잉? 혀가 왜이러지?' 했던 것이 반복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질문에답변을 드리면, 자각이 됩니다. 하지만 신체의 현상이 집중하는 상태가 아니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이 말똥말똥 하므로 때와 상황에 맞게 의지적으로 통제가 됩니다.
하지만 마음놓고 통제를 풀게 되면 매우 크코 시끄럽게 소리가 나기도 합니다.
이 방언이라는 것은 다른종교에서도 나타나는 현싱입니다.
따라서 방언기도룰 하느냐 마느냐보다 중요한것은 그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병과 신내림은 다른 영에의해 본인의 영이 제압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억눌림에 의해 당사자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되지요.
하지민 방언기도는 이성에 의해 눌려있던 영을 조금이나마 해방시켜준다는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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