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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1/29 13:00:08수정됨 |
Name | 작고 둥근 좋은 날 |
Subject |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라는 가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자주 유리카모메 선을 떠올린다. 도쿄의 중심부에서 관람차와 아케이드와 라이브하우스와 건담과 이것저것이 있는 인공섬 오다이바로 향하는 열차. 쓸데없이 크게 휘는 선로와, 앞으로 시야가 트여있는 맨 앞자리 칸 덕에 운송 수단이라기보단 어딘가 테마파크의 관광열차 같은 경전철. 아, 맨 앞자리 관람석은 단 한번도 타보지 못했다. 언제나 시간은 모자랐으니. 4년쯤 전이었나, 몇가지 인생의 도박을 하고 안되면 진짜 모르겠네 인생 모르겠어 없으면 몰라도 되겠지 하는 심산으로 꽤 오래 좋아하던 가수의 라이브에 갔다. 라이브는 오다이바의 zepp tokyo에서 개최되었고, 나는 유리카모메 선을 타고 오다이바로 향했다. 태어나 처음 타본 유리카모메 선이었고, 태어나 처음 가본 오다이바였다. 그 전에 우연히 가 보았을 수도 타 보았을 수도 있지만 기억에 없으면 없는 일이다. 행복한 날이었다. 행복한, 앞에 어떤 부사를 고르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이후로 유리카모메 선은 내게 행복의 나라로 가는 열차가 되었다. 신의 가호 덕에 몇 가지 도박이 성공해 어쨌거나 좀 더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유리카모메를 타면 대충 행복해졌다. 아무리를 대충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란 위대한 것이다. 그 날도 유리카모메 선을 타고 라이브하우스로 향했다. 회장에 들어가기 전, 같이 라이브를 보기로 한 친구와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유리카모메 선이 너무 좋아. 유리카모메 선은 뭐랄까 내게 행복의 나라로 가는 열차처럼 느껴지니까.' 도쿄에서 몇년째 일하는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젠장, 라이브는 좋지만 유리카모메 선은 너무 비싸다고. 회사 정기권 커버범위도 아니고.' 그리고 나와 그와 몇몇 친구들은 라이브를 보았다. 물론 행복했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일 밤의 도쿄행 유리카모메, 딱히 붐비지는 않는 열차 안이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 있었다. 그것이 건장한 성인 남성의 일이다. 그리고 잠시 눈치를 보다가 교통 약자석에 앉았다. 몇 분 서서 생각해보니 나는 족부 관절의 문제로 보행에 큰 불편을 겪었으며 근 두어달간 1/3정도 목발을 집고 다닌 참이었으니까. 밖으로 티나지는 않지만 교통 약자인 건 분명했다. 그리고 내 옆에 갑자기 어느 인도인이 앉았다. 딱히 교통 약자처럼 보이지는 않는. 뭐, 그도 티나지 않는 병이 있을지도 모르겠지. 외로움이라거나. 그리고 그는 서툰 일본어로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스미마셍. 저는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인도인입니다. 잠시 저와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습니까.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건 마침 내 직업상의 직능 중 하나였고 내가 즐기는 일 중 하나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는 뭐랄까 유아원생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했다. 유치원생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하는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일본어가 막힐 때면 그는 인도식 영어를 구사했다. 나는 얼마 전에 일본에 왔습니다. 일을 하러.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너무 어렵네요. 한자는 커녕 가나도 어려워요. 지금은 식당에서 일하는데, 친구가 없어요. 언어를 배우려면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내 친구를 해 주지 않아요. 그는 점점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열차 안의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를 쳐다볼 정도로. 나는 무척 난감함을 느꼈고 그는 점점 말문이 트여갔다. 학원이라도 다니고 싶은데, 일은 고되고 월급은 너무 작아요. 시간도 없고. 일본인들은 왜 내가 말을 걸면 피하는 걸까요. 일본인인 당신은 외국인인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은 내가 일본에서 본 제일 친절한 일본인이에요. 영어도 잘 하시고요. 고마워요. 한동안 영어도 쓰지 않아서 나는 내가 영어를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 나는 식당의 작은 창고에서 혼자서 하루종일 일해요. 영어도 일본어도 쓰지 않은 채로. 그는 거의 울면서, 그리고 이제는 거의 영어로,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차라리 그가 감정이 격해진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약간 목소리가 커졌을 때 우리에게 눈초리를 보내던 승객들은 그쯤에서 마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몇 번의 일본 여행의 경험들로부터, 이는 영어라는 바이러스가 공기중에 살포되었을 때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면역 반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쯤에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밝혔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글쎄, '일본인으로서 외국인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내가 할 말이란 '나는 일본인이 아닙니다'밖에 없지 않아서였을까. 물론 간단한 거짓말을 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 상황에서 간단한 거짓말이 되어줄까. 나는 그의 외로움을 모르는데. 그는 '그렇군요. 하긴, 당신은 일본인치고 너무 친절하고, 영어도 잘 해요'라는 농담을 했다. 그쯤에서 우리는 열차의 종점, 심바시에 닿았다. 그는 내게 라인 아이디를 물어보았다. 친구가 되고 싶다고. 미안하지만 나는 라인 아이디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내게 왜 라인 아이디가 없냐고 물었다. 나는 일본의 핸드폰이 없으며, 한국 번호를 쓴다고 했다. 이건 손쉬운 거짓말이었다 : 나는 라인 아이디가 있다. 우리는 역에서 헤어졌다. 내 건너편, 일반석에 앉아있던 친구들은 '그사람 우리랑 같이 술마시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하는 농담을 건냈다. '아 뭐, 우리랑 같은 팬은 아닌 거 같으니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 돌려보냈어요. 팬이었으면 같이 가도 좋았을텐데'하고 거짓말인지 농담인지를 했다. 그는 멀리로 사라졌다. 나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앞으로도 유리카모메 선은 내게 행복의 나라로 가는 열차일 것이다. 그게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회사 정기권이 지급되지 않는 비싸고 귀찮은 열차일 뿐이고, 누군가에게는 외로운 밤을 관통하는 거대한 쇳덩어리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무례한 외국인 둘이 교통약자석을 점거하고 시끄럽게 영어로 떠들어대던 어느날 밤의 열차겠지만. 그들에게도 언젠가 유리카모메 선이 행복의 나라로 가는 열차가 될 수 있기를. 유리카모메가 아니더라도, 행복에 닿을 수 있기를.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2-12 13:0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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