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1/23 02:21:31수정됨
Name   메존일각
Subject   궁궐 건축물 위에 <서유기> 등장인물이?
* 자기 전에 가볍게 쓰는 글입니다. 



사진은 조선왕릉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건물, [정자각]입니다. 경치 좋은 곳에 설치된 停子閣이 아니고 T자형 평면을 가진 丁字閣입니다.

지붕 위의 허연 마감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양성바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궁궐의 정전이나 침전, 정문, 도성문, 일부 관영건축에서 보이고 건축물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경복궁 등 궁궐에서 한 번쯤 보셨을 것 같습니다.

한데 내림마루 위를 보면 이상한 토우 같은 것이 보입니다. 특수기와로 [잡상(雜像)]이라고 하는 것으로 종류는 총 10가지입니다.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놓이는 순서가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뒤로 용머리를 한 용두 또는 독수리 모양의 취두 등이 놓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패스하겠습니다. 아무튼 내림마루나 추녀마루의 길이에 따라 잡상 수가 달라지는데 최소 3개 정도는 놓이게 됩니다.

확대해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맨 앞 '녀석'은 뭘로 보이시나요?
17세기 초에 지어진 <어우야담>에는 '대당사부(大唐師父)'라고 나와 있습니다. 네, 그 유명한 <서유기>의 삼장법사 현장이죠.

그러면 그 다음 녀석들 이름도 대강 짐작이 되시겠네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입니다. 손행자(孫行者), 저팔계(猪八戒), 사화상(獅晝像)라고 표기되어 있어요. 정자각에는 없지만 그 다음에는 차례대로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귀찮으니 한자는 패스)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기록인 <상와도>에는 그림도 나와 있습니다. 개수는 <어우야담>과 같은데 이름이 조금 다릅니다.


출처: <한국건축용어사전>

그런데 말이죠. 맨 앞 '분'이 정말로 삼장법사로 보이십니까? 몽골식 삿갓을 쓰고 갑옷을 입은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군인 아닙니까? 그리고 철저한 숭유국가 조선에서 불교 인물을 권위 건축물 위에 올려두었다는 게 믿기 어렵잖아요.

17세기 중반에 간행된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 보면 잡상의 이름이 제법 다릅니다. 손행자, 손행자매, 준견, 준구, 마룡, 산화승, 악구 등으로 나와 있어요. 손오공만 그대로네요. 손오공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갑옷을 두른 모습이 그럴 듯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시 두 번째 사진으로 넘어가서, 정자각의 세 번째 코를 보면 아무래도 개보다는 돼지를 묘사한 게 맞는 것 같잖아요. 알쏭달쏭합니다.

사실 이 잡상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잡상 개개의 의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고려 이전에는 잡상이 놓였다는 명확한 사료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부터 놓인 것만 확실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왜 <서유기>의 등장인물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릅니다. 국내에 <서유기>가 유입된 것은 여말선초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교적 색채에 괴력난신이 판치는 <서유기>는 공식적으로 배척됐을 것이나, 사대부를 비롯 일반 백성에까지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고 이것이 잡상의 명명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화마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벽사의 내용이 들어있는 <서유기>가 연결되고, 자연스레 소설의 등장인물 이름이 잡상 하나하나에 붙었을 수도 있겠죠.

P.s.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의 잡상 개수가 다른 것은 다른 정자각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것은 건릉(정조), 두 번째 것은 융릉(사도세자, 장조 추존)의 것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2-04 18:0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11 경제파이어족이 선물해준 세가지 생각거리 6 MANAGYST 20/01/19 6469 10
    912 과학기업의 품질보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3 Fate(Profit) 20/01/22 5996 19
    913 역사궁궐 건축물 위에 <서유기> 등장인물이? 15 메존일각 20/01/23 5742 12
    914 일상/생각멘탈이 탈탈 털린 개인카페 리모델링 후기 51 swear 20/01/23 6772 32
    915 의료/건강BBC의 코로나바이러스 Q&A 14 Zel 20/01/27 6878 31
    916 창작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5 작고 둥근 좋은 날 20/01/29 6500 24
    917 일상/생각엄마 덴마크가 나 놀렸어요 ㅜㅠ 69 구밀복검 20/01/29 12749 122
    918 일상/생각처음 느낀 늙음 3 행복한사람 20/02/03 5063 22
    919 일상/생각사회주의 대 반사회주의 9 necessary evil 20/02/06 5607 30
    920 일상/생각아들놈이 대학병원에서 ADHD 판정을 받았습니다 70 아나키 20/02/06 8199 146
    921 의료/건강'코로나19'라는 이름이 구린 이유 29 Zel 20/02/14 7491 14
    922 일상/생각군대 친구 이야기 3 化神 20/02/15 5142 17
    923 문학일독김용(一讀金庸): 김용 전집 리뷰 40 기아트윈스 20/02/16 7912 27
    924 정치/사회봉준호 감독 통역을 맡은 최성재(Sharon Choi)씨를 보면서 한 영어 '능통자'에 대한 생각 31 이그나티우스 20/02/19 7363 23
    925 기타교육심리학의 20가지 주요 원리 11~20 16 호라타래 20/02/20 5684 20
    926 의료/건강지금 부터 중요한 것- 코로나환자의 병상은 어떻게 배분하여야 하나 6 Zel 20/02/27 5524 43
    927 의료/건강세계 각국의 중국과의 인적교류 통제 상황판 (업데이트끝. 나머지는 댓글로) 8 기아트윈스 20/02/28 5863 17
    928 역사역사학 강연에서 의용대를 자처하는 이들을 만난 이야기 13 Chere 20/02/29 5422 35
    929 기타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운명 12 이그나티우스 20/03/01 5831 9
    930 정치/사회섹슈얼리티 시리즈 (1) - 성인물 감상은 여성들에게 어떤 이득을 주는가? 28 호라타래 20/03/06 6971 20
    931 기타무림사계 : 변증법의 알레고리 4 작고 둥근 좋은 날 20/03/07 6283 10
    932 정치/사회빌게이츠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NEJM 기고문 (시론) 16 Zel 20/03/11 5662 13
    933 역사인도에 대하여 7 Fate(Profit) 20/03/13 6782 20
    935 의료/건강자존감은 꼭 높아야 하나요? 42 호라타래 20/03/20 8108 45
    936 역사[번역] 유발 노아 하라리: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 13 기아트윈스 20/03/21 8085 3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