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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09 13:47:14
Name   눈시
Subject   사도 - 지옥으로 가는 길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3408012_001
"어제 밤 전하께서 고민하시다 밤을 새셨다던데, 그러면 몸이 상하십니다. 저희들이 바라는 건 하나예요. 세자의 자질이 빼어나니 전하께서 관대하게 포용하여 고치게 하신다면 아무 문제 없이 덕을 쌓을 수 있을 겁니다."
"좌의정이 저러는 건 다 잘못된 거야. 스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세자를 잘 가르치지 못 하면서 내 잘못이라고만 하는데 내가 억울해서 살겠냐?"
"아니 좌의정이 그러는 건 다른 뜻이 아니라 전하의 명을 부지런히 받들다가 어쩔 수 없이 맞서는 것이고, 슬프고 괴롭고 속 타는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아니 니들은 맨날 내가 잘못됐다면서 지나치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되냐?"
"저희들이 정말 죽을 죄가 있어서 이런 명까지 듣게 됐으니 정말 원통하고 억울합니다. 전에 세자 소속 신하들의 말을 들으니 세자께서 서연을 열고 싶은데 황송해서 감히 실행 못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서연을 여는 것을 허락해 주시면 될 겁니다.
"그럴 거면 세자가 진심으로 나한테 먼저 청해야지, 내가 말을 꺼내면 그제야 청하는데, 이게 맞는 거냐? 어 그래. 너도 좌의정처럼 할 생각인가?"
"아뇨.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 뭐 이 정도로 정리가 되는군요. 1758년 8월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천보와 영조의 대화입니다.
세자에게 너무 심했다며 반성한 지 반 년, 영조는 또 이런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 시기 말 하는 것을 보면 세자가 공부 안 하는 걸 가지고 또 열 받았고, 세자가 일도 공부도 안 하니 자신도 차대(신하들을 만나는 것)와 경연을 안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에 좌의정 등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너무 다그치지 말고 조용히 잘 타이르라는 것을 건의했죠. 벼슬자리를 내놓고 명을 기다리겠다면서요. 물러났다가 부르면 돌아왔다가, 쫓아냈다가 곧 다시 불렀다가를 반복하는 게 그 시대이니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꽤 강경하게 나온 거였습니다.

+) 이 때 좌의정이 김상로입니다. 영조가 정조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라면서 임오년 5년 전에 조짐을 양성했다고 한 사람이죠. 영화 사도에서 악역으로 나온 신하입니다. 실제 그가 세자를 깠든 안 깠든, 이 때(임오년 4년 전) 영조에게 강하게 맞서며 세자를 실드친 게 보입니다. 다른 신하들의 생각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번에도 다를 건 없었습니다. 영조는 세자가 아프다 아프다 하는 걸 인정은 했지만, 그래도 공부도 일도 안 하는 걸 문제삼으며 강하게 나옵니다. 신하들도 이에 나름 강하게 나왔고, 영조는 '세자가 열흘 동안 날마다 세 번 서연을 열고, 일을 제대로 하면 나도 경연과 차대를 할 것이다'고 했죠. 신하들은 세자에게도 이를 알리며 강력히 건의했고, 세자는 '열흘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하겠다'면서 받아들였지만, 실제로 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영조는 얼마 안 가 세자의 스승들과 소속 관리들을 모조리 자릅니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에도 세자는 자기 거처인 덕성합 등에서 일을 봤으니...

1759년부터 1760년까지 가면 영조의 질책이 실록에선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6개월 동안 상참(신하 보는 것)을 두 번밖에 안 했다면서 욕 하는 게 있지만요. 혜경궁도 이 해 세손의 세손 책봉례가 있었고 영조가 새 장가를 들어서 바빠서 별 일이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 때부터 영조가 본격적으로 세손에 빠져들었던 것도 있겠죠. 그래도 세자 욕은 여전히 많이 한 모양입니다.


정순왕후는 이 때 열다섯의 나이로 궁에 들어옵니다. 간택할 때 제일 아름다운 꽃은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요 제일 힘든 고개는 보릿고개라 한 전설을 남긴 이죠. 자기 아버지 이름이 적힌 방석이라 앉을 수 없다는 등의 행동으로 영조의 마음에 들었고 왕비가 된 후에도 자기 가족들을 중용하지 말라는 건의로 또 이쁨 받습니다.
사도세자에 관한 음모론에서 그녀가 사도세자를 모함한 주인공으로 다룹니다만, 그러기엔 그녀가 너무 어렸고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으며 그녀의 세력도 없었습니다. 정조 때 오면 정말 큰 존재감을 보입니다만.

그 동안 세자의 증세는 더 심해졌다 합니다. 혹시 시비걸까 두려워 세자가 가는 길에 미리 사람을 보내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 하게 했고, 옷을 찢고 불태우기를 반복해서 비단이 남아나질 않았다 합니다. 생일 때 하도 신하들 앞에서 욕 먹은 게 서러웠는지 1760년의 생일 땐 영조와 선희궁(영빈 이씨) 욕을 계속 했다 합니다. 세손을 비롯한 자식들이 와도 '부모도 모르는데 자식을 어찌 알리' 하면서 쫓아냈다 하죠.

1760년 7월에는 같은 궁 안에 도저히 못 있겠다면서 화완옹주를 협박해서 경희궁으로 옮기게 하라 합니다. (당시 둘 다 창덕궁에 있었습니다) 또 궁궐에 있어서 답답하니 온양 갔다오게 해 달라고 말하라 하죠. 칼을 들고 그렇게 말 하니 화완옹주도 떨면서 알겠다 알겠다 했고, 실제로 두 개가 다 이루어집니다. 이 때 혜경궁한테도 영조가 경희궁으로 가게 만들라면서 바둑판을 던져 눈에 맞아서 크게 부었다고 합니다.


화완옹주, '정처'라고도 불립니다. 세자의 친동생으로 영조의 이쁨을 받는 딸이었습니다. 세자와도 친하게 지내서 위의 요구들을 들어주었는데, 혜경궁도 그런 공을 인정하면서 더 말 잘해서 부자 사이를 더 좋게 해줬어야 하고 썼죠. 정치달이라는 자와 결혼했는데 먼저 죽어버렸고 궁으로 돌아온 상태였습니다. 세자가 죽은 후에는 세손에게도 겸상을 하는 등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 없는 애정을 세손에게 쏟은 걸까요. 양아들 정후겸이 권력을 얻은 이후에는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세자가 온양온천에 갔을 때 행렬은 오백명 정도, 참 초라했다 합니다. (왕은 4천명이 호위합니다) 거기다 공부 가르쳐줄 스승들을 하나도 안 데려갔다 하죠. 그래도 해방감이었는지 별 민폐는 없었고, 백성들도 좋아했다 합니다. 그렇게 십여일 머물고 돌아온 후 온양이 별로니 황해도 평산 온천에 가고 싶다 했는데 그건 말려서 못 갔다 하죠.

+) 정조는 나중에 이 때 온천에 가서도 스승들과 공부를 했다며 미화합니다. 신빙성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반면 신하들은 갈수록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됐고, 둘 사이를 최대한 봉합하려 했습니다. 둘 다 세자의 병을 핑계로 진현(세자가 왕에게 인사하러 가는 것)을 거부해도 계속 진현을 촉구했죠. 영조는 세자가 병이 있으니 필요없다면서 거부했고, 이를 주장하는 신하를 파직하기까지 합니다. 세자가 꼴도 보기 싫었던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세자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길 바란 거겠죠. 세자는 그런 형식적인 거부를 당연히 따릅니다. 아버지를 보기 싫었으니까요. 영조에게는 계속 아비의 자애를, 세자에게는 더욱 더 공부에 힘쓸 것과 더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만날 것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영조는 세손에게만 더욱 사랑을 쏟았고 세자는 더 엇나갔죠.

영조가 같은 궁에 없으니 세자에겐 참 좋았을 겁니다. 말 달리고 칼도 잔뜩 갖추고 놀았죠. 홧김에 사람 죽이는 것도 계속됐습니다. 특히 빙애를 죽인 것이 컸죠. 1761년 1월의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옷을 갈아입다가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가 사람 죽이는 게 다 이랬습니다. 몰래 궁 밖으로 나가 노는 것도 계속됐고, 그렇게 세자인데도 가진 돈이 다 떨어져 민간인에게 빌려야 했습니다. 그게 극으로 간 게 이른바 '세자의 (관)서행'입니다. 병을 핑계로 문을 닫아건 후 4월 초부터 말까지 20여일간 평양에 갔다 온 것이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 때 평안감사 정휘량이 화완옹주의 시삼촌이었는데 그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합니다. 당연히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죠. 단 한 사람, 영조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저하께서 책을 치워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신하를 접견하지 않은 지도 역시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 좌우에서 모시는 자는 오직 환관이나 액속(궁의 잡무를 맡은 자들)들이니, 반드시 말을 타고 달리며 사냥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재물을 늘리며 음악과 여색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드나들며 유람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세자도 찔리긴 찔린 모양입니다. 갔다오자마자 유생들을 만났고, 서연을 열고 신하들을 만났죠. 하지만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일개 유생의 입에서 나온 게 저 말입니다.

"가만히 듣건대, 저하께서 뉘우치고 깨달은 뒤에 여러 신하들이 유독 관서에 행차한 한 가지 일을 글에 올려서 적기를 감히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더구나 이번의 관서로 행차한 한 사건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인데도 유독 저하 앞에서만은 가리고 숨기니, 이것이 오히려 훌륭한 명예와 좋은 명성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중략) 그리고 천리(千里)를 갔다가 돌아오신 몸인데도 아직까지 지척(코 앞)에서의 진현하는 예를 행하지 못했으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타고 달린 예후(병세)인데도 약원에서의 기거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시니, 사람들은 모두 이것으로 저하의 뉘우침과 깨달음이 미진한 뉘우침과 깨달음이라고 의심을 합니다. 신이 아무리 저하를 위하여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변명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그 의혹을 풀 수 있겠습니까?" - 서명응

위의 서명응을 비롯한 신하들이 이렇게 세자를 강력하게 책합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세자의 답입니다.

"내가 이미 뉘우치고 깨달았으니, 뉘우치고 깨닫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런데 서명응이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서 또 어찌하여 글을 올렸는가?"

이런 하소연을 하는 자리에서도 신하들은 관서 유람을 꼬신 아랫것들을 내쫓고 제대로 글을 지어 신하와 백성들에게 반성의 뜻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 이런저런 비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자기들도 안다면서요. 세자는 반성했다면서 변명도 하고 영조에게 알릴 거냐면서 화도 내고 하죠. 잠도 잘 못잤다는 걸 보면 어지간히 걱정됐나 봅니다.

이 관서행이 세자가 역모를 시도한 걸로 보기도 하고 정조는 오히려 역적을 잡으러 갔다왔다고 미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위의 모습을 보면 그냥 큰 사건을 친 사람이 그걸 덮으려고 급급한 것으로밖에 안 보이죠. -_-; 그게 찔려서 나름 적극적으로 공부와 일을 하는 모습을 보인 후 간만에 진현을 갑니다. 영조는 '살 쪘더구만' 하는 말 정도만 했구요.

4월에 있었던 일을 영조가 알게 된 건 9월이었습니다.

"어제 서명응의 글을 보았는데 이는 반드시 선왕(先王)의 영혼이 나를 인도하신 것이다. 도성 10리의 땅을 그가 출입하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지만 어찌 천리(千里)나 멀리 가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그러면서 세자 소속의 신하들을 또 다 갈아버립니다. 세자는 결국 들켰다는 걸 알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고민하다가 뜰에 앉아 그저 죽여줍쇼 하면서 대죄하죠. 죄를 지은 상태에서 어찌 진찰을 받겠냐며 거부했구요. 홍봉한은 좌의정이었다가 이 죄로 잘렸는데, 곧바로 영의정으로 다시 복직한 후 둘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관서행 당시 펑안감사였던 정휘량 등 다른 신하들도 그랬죠. 그러기를 십여일, 겨우 진현에 성공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영조가 큰 말은 없었고 세자나 홍봉한이나 다행이다 다행이다 했습니다만...

이 시기 (아마도 진현 전) 세자와 혜경궁의 대화입니다. 몇 년 동안 듣지 못했던 부드러운 말이었다 합니다.

"아마도 무사치 못할 듯하니 어찌할꼬."
"안타깝소마는 설마 어찌하시리이까.(뭔 일이라도 있겠습니까)"
"어이 그러할까. 세손을 귀하게 대하시니, 세손이 있는 이상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은가?"
"세손이 당신 아들인데 부자가 화복이 같지, 어찌 다르리이까?"
"자네는 잘못 생각했네. 더욱 날 미워하시어 살길이 점점 어려우니, 나를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면 어찌하겠는가?"
"그럴 리 없습니다."
"두고 보소. 자네는 귀히 대하시니, 내 부인이라도 자네는 물론 자식들도 무사하겠지만, 나는 병이 들어 이러하니 어찌 살게 하겠는가?"

+) 이 때 혜경궁은 세자를 마누라(위에선 당신으로 바꿨습니다)라고 부릅니다. 언어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세자도 슬슬 자기의 운명을 예상한 것 같습니다. 뭐 굳이 예상이라고 할 필요까지도 없는 것 같습니다. 더 욕 먹을 걸 뻔히 알면서도 관서행을 저지른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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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임오년의 시작은 세손의 혼례였습니다. 정월부터 간택이 시작됐고, 2월에 혼례를 했죠. 세손 나이 열한 살, 어리긴 하지만 본격적인 제왕수업에 들어가게 됐죠. 하지만 간택을 하는데 정작 아버지인 세자가 쫓겨나게 됩니다. 관자를 잘못 달고 있다는 거였죠. 혼례 때도 3일에 걸쳐서 하는 걸 첫 날만 보고 돌아가라 합니다.


귀 위에 동그란 거요.

이러니 병은 더욱더 심해집니다. 허구한 날 술을 퍼 마시면서 기생과 여승, 무당, 맹인 점쟁이들을 끌어들여 놉니다. 심지어 내관의 아내들까지 불러와서 같이 놀았죠. 이 때 화완옹주도 계속 있게 하면서 영조 욕을 했다 합니다. 화완도 어쩔 수 없이 욕을 하며 맞춰줬다 하죠. 그렇게 밤새도록 마시고 놀다가 다 같이 쓰러져 잠듭니다.
이런 걸 말린다면요? 말리기는 무슨 그냥 마음에 안 들기만 해도 죽여버리는데 말릴 수 있겠습니까. 이 즈음까지 오면 죽인 사람만 백여명이요, 폭력을 휘두른 건 훨씬 많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가 갈수록 죽을 짓을 저질러 가고 있다는 걸 알긴 알았나 봅니다. 집을 마치 상갓집처럼 꾸며놓고 관 같은 것을 만들어 안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5월이 되면 아예 굴을 파서 관 같은 방을 만듭니다. 정말 무덤 같은 방이었죠.


+) 이 때 선희궁이 창덕궁에 왔는데, 엄마 오니 좋다고 왕이 탈 큰 가마에 태워서 큰 깃발을 들고 음악을 크게 연주하며 다녔다고 합니다. 세자야 엄마를 정말 왕비처럼 대접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선희궁과 혜경궁의 걱정은 더욱 커져만 갔죠.

세자의 마음이야 짐작이 갑니다. 자기가 큰 잘못을 하고 있지만 그걸 주체하지 못하고 있죠. 이렇게 가면 나 죽겠다, 걸리면 어떡하지? 에이 그냥 죽었다 생각하자, 일단 오늘은 마시자...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5월 22일이 옵니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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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에 뜻밖의 고변이 들어옵니다. 역모에 대한 것이었죠. 급히 영의정 홍봉한한테 전해졌고, 영조에게 전해집니다. 참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말, 역모였죠. 영조는 당연히 직접 국문하겠다고 나섭니다.

그 자의 이름은 나경언, 왕이 궁궐 깊숙한 곳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형조에 먼저 말해서 올라가게 했다면서 소매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바칩니다. 거기엔 10여개의 죄가 있었는데, 모두 세자와 관계된 거였습니다.

... 그런데 역모는 또 아니었죠. 하지만 영조가 화나게 하기엔 더 없이 충분한 거였습니다.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세자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그 내용이 참 막장이어서 불태우자는 청이 나왔고 불태웁니다. 어차피 내용은 모두 다 알고 있었지만요. 한참 후에 세자가 급히 달려와 엎드립니다. 영조가 분노해서 문을 닫고 있다가 승지가 다시 알리니 창문을 열고 세자에게 고함을 지릅니다.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가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 왕손의 어미가 바로 빙애입니다. 여승의 아들을 어쩌고 하는 건 다른 사람을 빙애인 척 돌려보내려 했던 걸 말한 거구요.

세자가 억울하다면서 대질을 시켜달라 하자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라면서 대리하는 세자가 죄인과 대질하는 게 말이 되냐고 나옵니다. 그러자 울면서 이렇게 말 하죠.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홧병이라는 것. 영조는 이렇게 답하죠.


"차라리 발광을 하지 그러냐?"

세자는 다리에서 대죄하면서 기다렸지만, 영조는 다시 그를 보지 않습니다. 하릴없이 돌아가야 했죠. 그런 가운데서 나경언에 대한 처분이 이뤄집니다. 세자의 비행을 알리기엔 영조까지 가기 힘들었으니 처음에 반역인 척 했다는 것, 돈이 없어서 세자를 모함해 한 몫 챙기려 했다는 것 등이었죠. 어쨌든 이를 가만 두면 안 된다는 신하들의 요구에 영조는 그를 죽입니다. 그의 뒤를 캐 보았지만 제대로 나온 것이 없었구요. 나경언의 글에 나온 세자의 빚 역시 영조가 직접 갚아주었죠.

관서행도 그렇지만, 이 '나경언의 고변'에서도 뭔가 결정적으로 나온 건 없습니다. 하지만 영조에게 그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것이 있을 겁니다. 관서행은 4개월 후에야 자신에게 알려졌고, 나경언의 고변에서 나온 것도 신하들과 유생들, 궁의 일반 백성들도 충분히 알고 있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만 몰랐죠. 지금까지 세자가 영조에게 받은 피해 위주로만 다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세자는 세자였습니다. 충분히 살아있는 권력이었죠. 그 위에는 왕 밖에 없는 권력이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세자는 경희궁 금천교에서 잠시 대죄한 후 창덕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기나긴 대죄를 하게 되죠.

+) 대죄, 대명... 뭐 이렇게 말 하는데 밖에 앉아서 죄를 말 하며 처벌을 기다린다는 겁니다. 진짜 죄를 지었을 때나 왕의 노여움을 샀을 때 등에 하죠. 세자는 자기 잘못이든 아니든 참 많이도 해 왔습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요. 이번은 제법 길었네요. 그 이후엔 대죄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죠.

5월 22일부터 다음달인 윤 5월 12일까지, 근 20일간을 세자는 뜰에 앉아서 대죄합니다. 하지만 영조의 명은 떨어지지 않았죠.

아, 한 번 둘이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세자가 대죄하던 곳은 창덕궁 시민당, 영조가 윤 5월 2일에 창덕궁을 찾아옵니다. 전날 하늘이 단비를 내려줬으니 선왕들의 어진(그림)이 있는 선원전에 가겠다는 거였죠. 이 때 세자한테 오지 말랬는데 진짜 안 오니까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아이고 조상님들, 여기서 자고 싶은데 세자가 무서워하니 도로 가겠습니다."라면서 돌아갑니다.

글쎄요. 마지막으로 살 기회를 버린 걸지도요.

그렇게 또 10일, 영조에겐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세자는 결국 여기서 내가 죽겠구나 하면서 폭발하죠.

"수구(水口)를 통해 윗대궐(경희궁)으로 가신다 하다가 못 가시고 도로 오시니, 이는 처분을 받으시기 전전날과 전날인 윤 5월 11일과 12일 사이라. 상황이 이러니 어찌 허황한 소문인들 나지 않으리오. 소문들이 낭자하니, 전후 일이 다 본심으로 하신 것이 아니지만, 정신을 잃고 인사도 모르실 적은 하시는 말씀이" - 한중록


"병기로 아무리나 하려노라."
"칼을 차고 가서 아무리나 하고 오고 싶다."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는 혜경궁이 직접 옮길 수 없어서 거시기처럼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또 기록해 놨죠. 부왕을 죽이고 싶다는 극언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11일과 12일 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날이 밝은 13일, 영조는 마침내 창덕궁으로 왔고, 세자를 부르게 되죠.

훗날, 이 날부터 있었던 8일간의 일을 '임오화변'이라 부르게 됩니다.

* 난커피가더좋아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10-1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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