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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7/24 00:05:18수정됨 |
Name | 메존일각 |
Subject | 고려청자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
* 본래 탐라에 쓰려던 글인데 많이 길어져 티타임 게시판에 씁니다. 애당초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략과 비약이 심해져 어중간한 글이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비색(翡色)으로 대표되는 고려청자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지요? 고려청자 하면, 고려시대 청자의 위상은 세계 최고였고, 그 빛깔은 현대 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고 등등이 흔히 얘기됩니다. 이처럼 고려청자의 위대함을 논하다 보면 국뽕도 잔뜩 들어가기 일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고려청자를 어느 정도로 인식하면 될까요? [중국의 청자 개발] 고려청자를 얘기하기에 앞서 중국의 청자를 반드시 먼저 언급해야 합니다. 중국에는 절강성의 월주요(越州窯)나 용천요(龍泉窯), 섬서성의 요주요(耀州窯), 하남성의 여주요(汝州窯) 등 고래로부터 유명한 도요지가 많습니다. 그중 청자는 후한기부터 명품 자기 생산지로 알려진 월주요(越州窯)에서 탄생합니다. 10세기경이 되면 비색(秘色) 청자가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3~4세기 동진시기의 초기 청자. 옛 월주요에서 생산된 자기라 하여 '고월자(古越瓷)'라고도 부른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오랫동안 발전되어 오던 도기는 한나라 시대를 거치며 초보적인 자기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조악하나마 청자라 말할 만한 수준으로 발전하다가 당나라 시대에 이르면 우리가 납득할 만한 청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동쪽 정중앙에 파란색으로 표시된 오월국과 월주가 보인다> 그리고 당송 혼란기의 오대십국 중 하나인 오월(吳越)국에서 청자는 꽃피게 됩니다. 오월국이 해상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이익을 기반으로 펼친 문화진흥 정책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이곳은 현재의 중국 저장성(절강성) 일대인데, 삼국시대부터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입니다. 백제 무령왕릉 등에서도 남조 시대의 월주요 자기가 부장품으로 발견되었을 정도입니다. 선진국에서 제작된 귀중품이었단 얘기죠. <9세기 당나라 월주요 청자 팔각병> [고려청자의 탄생부터 발전까지] 고려청자는 일제 강점기 무렵, 일본인들이 고려왕릉을 도굴하며 본격적으로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 고려청자는 우리의 기억속에 많이 잊혀진 물품이었습니다. 20세기 말부터 최근까지 불과 30~40년 사이, 십이동파도선, 마도선, 태안선 등 조운선 경로의 고려 선박들 내에서 화물로 실린 고려청자가 해저유물로 대거 발견되기 전까지, 국내 학계에서조차 "고려청자는 부장품으로만 쓰이기 위해 제작된 것"이란 인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고려청자는 10세기 말부터 당시 월주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탄생합니다. 학계의 일부에서는 통일신라기부터 이어온 도기 제작 기술도 언급하기는 하나, 이는 우리 자기의 고유한 선형(線形)을 보여주는 기형(器形)에 더 관련이 크다고 보입니다. <국보 제326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고려 태묘에 사용하기 위해 993년에 제작된 왕실 제기이다.> 당시 고려에서 제작된 청자는 누런 빛깔이 강하고 유약도 균질하게 시유하지 못하던 조악한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사진의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는 고려의 극초기 청자 제작수준을 명확히 보여주는 유물로써, 제작 연도와 제작자 명까지 명확하게 적혀 역사성이 뛰어나단 점이 인정되어 최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습니다. 고려 성종대에 태조를 비롯한 선대 국왕들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제작된 제기입니다. 왕실 제기로 쓰이기에는 수준이 형편 없었지만 이 정도조차 훌륭하다고 여길 만큼 10세기 말 고려의 자기 제작 수준은 낮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100여년이 지난 12세기 초에 이르면 우리가 '고려청자'하면 흔히 떠올리는 비취색(翡色) 자기로 완성됩니다. 황해도와 경기도 등지에 남은 벽돌식 도요지들은 중국의 도기 기술을 그대로 흡수하려 한 고려 청자 초기 발전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순수하게 고려인의 기술만으로 따라잡은 것은 아니고, 송의 기술자나 요나라 기술자의 도움도 받은 것 같습니다. 여요전쟁을 거치며 약 120년 간 태평성대가 펼쳐지고 송과 요 등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던 덕을 본 것입니다. 물론 당대의 장인들이 무던하게 노력을 기울였고,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기를 거쳐 쌓여온 도기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에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국이 근 1500년 동안 발전시킨 도자 기술을 200년만에 따라잡거나 능가하게 된 것이죠. <국보 제94호 청자참외모양병. 1146년 승하한 고려 인종 장릉에서 발견되었다.> 12세기 초 국신사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선화봉사 고려도경』을 통해 "그릇은 금이나 은으로 도금한 것이 많으나 청자를 귀하게 여긴다.(器皿多以塗金, 或以銀, 而以靑陶器爲貴)"거나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 制作工巧, 色澤尤佳)"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려를 얕잡아 보는 듯한 내용이 많은 고려도경에서 청자에 대하여 기술한 부분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즈음부터 고려는 기술적으로 송의 청자를 완전히 따라잡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자의 빛깔을 중국에서 비색(秘色)이라 칭하고 고려에서 비색(翡色)이라 불렀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지요.
[고려청자의 전성기, 상감기법의 개발] 이후 고려에서는 동물이나 사람 모양 등을 나타낸 상형청자(象形靑瓷)를 제작하며 청자의 형태미를 계속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러나 청자의 음각이나 양각 정도의 문양은 유약의 반사가 심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형청자를 제작하며 모양을 다채롭게 만들었던 사정도 있었습니다. 청자 기술의 발전은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국보 제61호 청자 어룡모양 주전자. 12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단계에서 고려는 '상감(象嵌)'이라는, 중국과 차별화한 독보적인 기법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릇 표면에 문양을 파내고 그 틈에 백토나 자토를 채워 문양을 보여주는 고급기법으로, 12세기경 청동그릇에 홈을 판 후 은실을 밀어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청동 은입사 기법'의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현재 나전칠기를 만드는 것과 방식 면에서 근본적으로 같습니다. 중국 또한 12세기가 청자의 최전성기였지만 여요(汝窯) 등지에서는 점차 하늘색을 띤 청백자로 노선을 바꾸어 갔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국보 제171호 청동 은입사 봉황문 합. 청동그릇에 홈을 파고 은실을 밀어 넣어 무늬를 나타낸다.> <12세기 남송대 여요(汝窯) 청백자. 붓씻는 접시로 보인다> 상감기법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1159년에 세상을 떠난 고려시대 문신 문공유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진 '청자 상감당초문 완'이 있으나, 이는 일제 강점기 무렵 일본인 골동품상을 통해 유통된 것이어서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1202년 세상을 뜬 명종의 지릉에서 상감청자 유물이 발견되었으므로 13세기부터는 확실히 청자에 상감기법이 쓰이게 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국보 제115호 청자 상감당초문 완. 문공유 무덤에서 출토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는 중국의 남송시대인데, 태평노인이라는 사람은 『수중금(袖中錦)』이라는 책에서 다른 곳에서는 따라할 수 없는 천하제일 리스트를 읊조리며 '고려비색(高麗翡色)'을 언급합니다. 고려청자의 위엄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만, 중국의 다른 문헌에서는 이만큼 고려청자를 치켜세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개인의 사견인지 당대의 공통된 인식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남송 황실에서 고려의 상감청자를 수입하여 사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중국에서도 명품자기로 인식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고려청자의 쇠퇴부터 분청사기까지] 여하튼 13~14세기의 몽고 간섭기를 거치면서 몽고 문화의 유입으로 고려에서 유행이 크게 변화합니다. 고려청자 역시 질보다는 양에 주력하는 쪽으로 생산 노선이 바뀌며 형태나 문양이 단순해지는 등 점차 쇠퇴의 길을 걷습니다. <청자상감산수인물문편호. 몽고 간섭기 시대의 청자로 기형과 문양이 단순해졌다> 고려 말인 14세기 중반부터는 고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는 왜구의 극심한 침략 및 약탈이 시작됩니다. 서해안의 조운 시스템이 관리에게 줄 녹봉이 밀릴 만큼 붕괴에 가까울 정도로 마비되고, 연안에 위치한 강진이나 해남, 부안 등의 관요를 운영할 수 없게 되면서 고려청자 생산은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당시 왜구가 약탈해 간 고려청자의 양도 엄청나서, 현재 일본의 개인이나 박물관이 소장 중인 고려청자의 80~90%는 이때의 약탈품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자행한 고려왕릉과 귀족 무덤의 도굴품입니다. 혼란기 동안 고려의 도자기 장인들은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고, 품질은 높지만 형태는 명확했던 관요 중심의 자기 생산에서 기형이나 문양 등에서 지역별 특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민요 중심으로 흐름이 변화합니다. 이때 나타난 자기를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인) 분청사기라고 하며 조선조가 들어선 후 전성기인 15세기를 거치며 백자가 주류가 되는 16세기까지 이어집니다. 이 역시 중국에는 없는 독자적인 기법입니다. <보물 제347호 분청사기 상감어문 매병(粉靑沙器 象嵌魚文 梅甁). 15세기에 제작되었다.> [고려청자의 의의와 한계] 청자를 만들 수 있던 나라는 전세계에서 중국과 한국밖에 없었습니다. 오로지 중국과 한국에서만 나타납니다. 아니 16세기까지 제대로 된 자기를 만들 수 있던 나라가 중국과 한국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자기 제작술이 당대에는 고급기술이었습니다. 현재의 베트남인 안남(安南)국에서도 조악한 자기는 생산했지만 녹색칠로 청자 비슷하게 흉내내려 하였을 뿐 투명한 비색은 끝내 구현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하였습니다. 12세기 중국 송나라도 청자의 전성기였으나 고려의 청자도 그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12세기의 고려는 자신만의 품격을 갖춘 도자기를 만들게 되고 특히 상감청자의 문양은 독보적이었습니다. 현재의 중국 학계에서도 이를 분명히 인정할 정도입니다. '남송 황실에서 고려청자가 쓰였다' 이상의 얘기는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국보 제68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풍만한 몸체와 유려한 선에서 고려 상감청자의 최절정의 미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고려청자는 세계화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아시아의 중심이었던 중국은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에 자기를 아주 오랫동안 꾸준히 수출합니다. 유럽의 경우 17세기 독일 드레스덴에서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고, 18세기 영국에서 본 차이나 생산에 성공하지만 중국 자기는 여전히 수입품에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고려청자는 중국과 일본, 동남아보다 더 멀리까지는 퍼지지 못했습니다. 역시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지만 고려청자보다도 빛을 보지 못한 조선백자도 있습니다. 정작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도공을 잔뜩 데려갔던 일본은 명청 교체 혼란기를 틈타 중국의 자기를 흉내내어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쌓인 명성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론] 고려청자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나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 12~13세기의 고려청자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중국 청자를 능가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비등한 수준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2. 그렇지만 고려청자는 세계화에 실패했다. 고려의 지정학적 위치가 변방이었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 이후 고려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청자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8-0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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