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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4/22 19:59:03 |
Name | Danial Plainview(Profit) |
Subject | 픽션은 사회를 어떻게 이끄는가 (1) |
아직도 내게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2010년대에 나온 가장 뛰어난 저작으로 남아 있다. <사피엔스>의 탁월함은 우리이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기 마련인 우리를 낯설게 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특이성을 밝힌 데 있었다. 어째서 인류는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는가? 기존의 상식은 인류는 대뇌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했으며, 직립보행을 선택했기에 두 손이 자유로울 수 있었고, 따라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하라리는 그럼 왜 다른 유인원들은 인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는가라고 되물었다. 발달한 두뇌, 직립보행, 양손의 자유, 나아가 도구가 핵심 요인이라면 동시대에 호모 사피엔스와 경쟁했던 다른 인간Homo 종들;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호모 데니소바 등은 왜 호모 사피엔스와 경쟁해서 멸종했는가? 심지어는 더 강한 완력과 신체적 조건, 이주에 온 사피엔스에 비해 지리에 밝다는 이점을 안고서도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해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지구 제패의 핵심은 인간Homo이 아니라 사피엔스Sapiens 그 자체였다. 그리고 사피엔스가 가진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서로 믿음으로써, 그것들을 존재하도록 하는 데 있다. 하라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동차 회사 푸조Peugeot의 예를 든다. 푸조라는 회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푸조라는 브랜드를 단 차는 많이 있지만 그것이 푸조는 아니다. 푸조 공장들을 모두 합친다고, 심지어는 직원들을 모두 모은다고 푸조가 되는 것도 아니다. 푸조는 사원과 경영자와 주주가 있지만 이들이 모두 해고된다 해도 다시 새로운 직원들과 경영자와 주주들과 함께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푸조가 BMW에게 인수합병당한다면 푸조의 차, 푸조의 공장, 푸조의 직원, 푸조의 경영자, 푸조의 주주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푸조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푸조는 어디 있는가? 정답은 우리의 마음속이다. 푸조는 우리 모두가 그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럼으로써 푸조는 직원을 고용하고 차를 생산하는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하라리는 이런 집단적 상상력에 기반한 픽션을 상호주관적 실재라 불렀다. 상호주관적 실재는 돌이나 중력처럼 인간이 없더라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는 아니다. 그렇다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모욕당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창피함처럼 나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주관적 개념도 아니다. 푸조는 "서로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즉 상호주관적 실재인 것이다. 이것이 다른 영장류들은 갖지 못하고 사피엔스만이 가졌던 비밀이며, 이를 통해 집단적 협력이 가능해진 사피엔스는 무지막지한 집단의 힘으로 전 지구를 쓸어버렸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재에는 단순한 회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문자, 종교, 화폐, 계급, 법, 국가, 민족과 같은 친숙한 개념들이 모두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위의 것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믿고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진 채 존재한다. 예컨대 비무장지대DMZ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2km씩 뻗어 나간 평원에 불과하지만, 보이지 않는 군사분계선을 넘었는지 여부는 정전협정을 위반하였는가 아닌가라는 심각한 외교적 충돌을 야기한다. 그곳을 뛰어다니는 노루에게는 군사분계선은 북쪽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우거진 수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귀순하는 북한군에게 그 선은 자유의 땅으로 가는 데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의 차이이다. 2 : 상호주관적 실재 : 건국신화 영화 <인셉션>에서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대사가 있다. 가장 생명력이 강한 기생충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는 장면이다. 코브로 분한 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생각'입니다. 질기고, 매우 전염성이 강하죠. 한 번 머릿속에 자리잡은 하나의 생각은 제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완전히 형성되고, 완벽하게 이해된, 달라붙은 생각. 바로 거기 어딘가에." 생각들은 끈질기다. 한 번 자리잡은 관념들은 다른 관념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기원전 203년, 한고조 유방은 전중국을 통일했고, 그로부터 이천년이 넘도록 중국은 '하나의 중국'*1과 '한족'이라는 문화적 정체성 아래 살고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이론인 천명天命 개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늘은 정통성 있는 권력의 원천으로서, 천명을 받은 지배자는 보편적 권력으로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하늘은 하나이기에 천명은 둘 이상의 지도자에게 동시에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중화는 정통성을 가진 단 한 명의 지도자 아래에 통합되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총기사고로 매년 사망하는 사람들이 발생하지만 자체적으로 무장하고 결집한 민병대의 힘으로 대영제국의 정규군을 물리친 미국의 건국신화는 총기규제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서부 개척시대의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의 집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생각은 그런 그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그들의 의식세계 어딘가에 뿌리박혀 있다. 한국은 어떨까? 대한민국의 탄생은 미완의 건국이라는 신화로 뒤덮여 있다. 원래 한 국가여야 할 나라가 외세에 의해 분단되고, 청산됐어야 할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신화, 그리하여 처음부터 잘못 끼운 단추라는 신화이다. 실제로 당대의 어떤 독립운동가도 친일파 모두를 수용소에 가둔 뒤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사실은 기억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파의 범위는 점점 넓어진다. 물론 이러한 신화가 자리잡게 된 큰 원인은 친일파가 죗값을 치루고 용서받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끌려가자 즉시 반응했다. 그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었든, 혹은 일각의 주장처럼 반공투사로서의 신념 때문이었든 이승만은 해방 후 자신이 당면한 최대 적수가 공산주의자임을 즉시 인식했고,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경찰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반민특위가 노덕술의 석방을 거부하자 그들을 습격하여 반민특위를 무산시켰고, 그 사건은 당대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떵떵거리는 친일파와 가난한 독립운동가라는 대대로 전승될 신화를 만들어 냈다. 개인의 기억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생각은 계속해서 계승된다. 가장 큰 피해자가 공동체의 더 큰 선을 위해 개인을 초극하여 가해자를 용서한 넬슨 만델라의 사례와 비교해 보면 이 점은 더욱 뚜렷해진다. 또 다른 극적인 신화도 있다. 제 6공화국의 건국신화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은 민중이 단결하고 결집할 때 어떤 총칼을 든 정권이라 해도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 광경은 30년 뒤에 다시 한 번 변주되었다. 처음 정치권은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 스캔들에 대해 거국내각이나 '명예로운 퇴진' 같은 정치지형을 유리하게 하려는 시도들을 들먹였지만 곧 민중의 거센 요구에 화들짝 놀라 탄핵으로 선회했다. 물론 1987년과 2017년은 제도권 안과 밖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기억은 현대 한국의 새로운 신화로 계속해서 계승된다. 설사 극우의 주장처럼 한국이 북한에게 적화통일된다 하더라도 이 기억은 계속해서 작용한다. 토마스 쿤은 그의 저작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엄밀한 실험과 관찰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과학이 실제로는 어떻게 사회과학적으로 작용하는지를 패러다임의 형성과 전환을 통해 이야기했다. 많은 사람들은 책에서 묘사된 부분 중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주목했지만, 사실 그가 계속해서 강조한 부분은 패러다임의 전환보다는 패러다임의 학습이었다. 쿤에 따르면, 우리는 일종의 '교과서'의 존재를 통해, 예제-연습문제를 풀이해 가며 기존의 패러다임을 체화한다. 마찬가지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6월 민주항쟁을 겪지 못한 40대 미만의 세대들도 <택시 운전사>나 <1987>같은 미디어를 통해 그 때의 기억을 배우고 신화를 대물림한다. <인천상륙작전>같은 영화는 확실히 제 1공화국의 건국신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망의 기로에서 나라를 구한 작전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흥행에서 알 수 있듯이 더 이상 이 신화는 대중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 신화를 체험했거나 직접 구전으로 전해들은 노년층에게만 어필하는 신화인 것이다. 이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기억들 중 어떤 기억이 남고 어떤 기억이 사라지느냐는 과거뿐만 아니라 늘 현재가 개입한다. 참여정부는 2007년을 기점으로 종료되었지만 2007년에 그들에게 내려졌던 평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긍정적으로 선회하는 양상이 보인다. 한편 문재인 정부가 2017년 대규모 반정부/박근혜 퇴진시위를 '촛불혁명의 정신'운운하며 새로운 헌법에 넣겠다고 했을 때, 그것은 내게 작년 일어났던 시위를 자신의 정통성으로 선점하려는 목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2 3 : 사실에서 가치를 만들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어떤 사실로부터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끌어내는 것을 자연법칙의 오류라고 한다. 이는 어떤 사실이 곧 어떤 당위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과 가치 사이의 존재하지 않는 연결관계를 극단적으로 연결시킨 사례가 있다. 면죄부다. 면죄부는 내가 교회에 돈을 내는 행위와 내가 주에게 구원받는 것이라는 가치를 서로 연결시켰다. 이를 도미니크회 수사 요하네스 테첼(그는 아마 당대의 가장 뛰어난 세일즈맨 중 하나일 것이다)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당신이 모금함에 넣는 동전이 짤랑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당신의 영혼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날아오른다"고.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면죄부를 비판했다. 그의 비판의 핵심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연옥에 가고 천국에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야훼뿐이며, 인간의 행위가 죄와 구원이라는 신의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오만이라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 1:17) 그러나 루터마저도 틀렸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신의 판단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 역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의 판단이란 건 없다. 우주 어딘가에서 행동을 평가하며, 누군가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보이지 않는 업보 -100점을 매기는 시스템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보통 끔찍하게 받아들이는 살인을 예로 들더라도, 한 사람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1) 그가 대한민국에서 다른 시민을 살해한 시민이라면,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을 것이다. 4 : 믿음의 피라미드 현대 한국 사회의 최상위에 존재하는 믿음은 과학, 자유주의, 평등의 세 가지이다. 과학은 객관적 실재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믿음이 있을 수 있지만, 과학법칙은 객관적 사실일지라도, 가설을 세우고 대조군과 실험군을 비교하는 과학적 사고방식,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지속적인 성장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들은 사실이 아닌 신화의 영역이다. 평등과 자유는 우리가 배운 대로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갖고 태어나며, 이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자유가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제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 다음으로 신뢰되는 신화는 능력주의, 민주정, 사법제도이다. 능력주의란 어떤 지위에는 해당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능력이 없는 자가 그 지위를 차지하도록 시스템은 설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고, 현대 민주정은 정치권력의 원천은 인민에게 있으며, 독재를 막기 위한 삼권분립의 개념, 중우정치를 막기 위한 대의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설계된 정치제도이다. 사법제도는 자력구제를 금지하고, 죄는 법에 규정되어야 처벌할 수 있다는 죄형법정주의, 무죄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때는 피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라는 무죄추정의 원칙 등에 기반해 있는 법치 시스템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들은 하나의 큰 원칙 하에 합목적적으로 구성된 개념이 아니며, 사회의 다양한 원인으로부터 형성된 상상의 질서라는 것이다. 이런 질서들은 개별적으로는 유의하지만 동시에 겹쳐질 때는 무수한 모순이 펼쳐지게 된다. 당장 제일 기본적인 가치인 자유와 평등만 해도 그렇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엔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는 금이 간다. 이런 상상의 질서들의 충돌은 독립적으로 존중받지 않으며 피라미드에 따른 우승열패 역시 존재한다. 예컨대 기독교를 믿는 것은 자유주의 아래에서 존중받지만 과학의 경계를 넘어 수혈을 거부할 때는 논란이 된다.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는 강남에 사는 학생이 농어촌에 사는 학생보다 더 성적이 높을지라도 농어촌의 학생을 대학에 합격시킴으로써 평등의 원칙에 기반해 능력주의에 도전한다. 반면 국방부는 평등을 무시하고 능력을 근거로 남성 위주의 징병을 실시한다. 심지어는 각 질서들이 "올바른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허상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우리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우열이 있는 바빌로니아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는 한국을 비교했다. 우리는 고대 바빌로니아는 틀렸고, 현대 한국은 맞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실은 양쪽 모두가 믿는 것 전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상상의 질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그 평등이 시스템에 대한 것이라면, 그 평등은 결과의 평등인가, 과정의 평등인가? 민주정은 어떨까? 우리는 보통 민주정에서 언론에 의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선동되는지, 혹은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야당을 보며 상대방의 발목잡기에 의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는지 불평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민의 위기가 아니라 이론의 위기다. 민주정은 보통의 인민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지 도달할 수도 없는 높은 기준을 세워 놓고 인민들이 쫓아오지 못한다고 질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불평은 민주정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알려주는 방증에 지나지 않는다. 사법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법제도가 정의를 실현하는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믿는다. 물론 명시적으로 보장하는 사법제도의 절차는 크게 흠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실현될 때 얼마나 불평등한 제한들이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비싼 변호사를 고용해 서민들은 유죄를 받을 사건도 무혐의를 받아 내곤 하며, 부자병 같은 헛소리를 하기도 한다. 임금체불 사건은 고용주의 지연전 하에 지친 피해자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전창진 사건은 어떤가? 그는 프로농구 감독으로서 대포폰을 사용했고, 불법 스포츠 도박업자와 금전거래 내역이 있으며, 그 스포츠 도박업자가 전창진의 경기에 돈을 건 내역까지 확인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이 대포폰을 구하고, 불법 스포츠 도박업자와 통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전창진이 실제로 죄를 저질렀음은 거의 명확하다. 하지만 전창진의 해명, 대포폰은 어머니 병환으로 기자들의 연락을 피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불법 스포츠 도박업자는 원래 알던 지인에 불과하다, 라는 말의 신빙성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기에 무혐의로 끝났다.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물론 우리는 이것이 민주정을 효울적인 독재로 대체해야 한다거나, 사법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체제는 기존 체제보다 더 낫기 때문에 살아남았다.*3 현대 한국의 가난한 시민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법제도 하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노예가 전능한 아누, 엔릴, 마르두크가 함무라비에게 불러준 법전을 믿는 것보다 더 유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시스템들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는 정오正誤의 문제가 아닌 정도定度의 문제다. 그러나 이 신화를 영원히 변치 않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는 것은 금물이다. 과학이 성장을 영원히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은 환경파괴 아래 깨질 수 있으며, 사법제도 역시 보다 더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정의의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예전 나는 민주주의의 흥미로운 대안 중 하나로 제곱투표제*4를 본 기억이 있다. 이 신화들은 계속해서 모순들이 터져나올 때마다 임시방편ad hoc으로 누덕누덕 기워놓은 체제에 가깝다. 보론 *1 하나의 중국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중국과 대만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중국 대륙 전체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즉 중국의 역사는 통합과 분열의 역사라는 관념을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이 '대륙'의 범위는 지속적으로 넓어져 왔다. *2 혁명이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광범위한 사회 구조의 변동을 파급시키는 갑작스러운 사건이다. 2017년 촛불시위는 기존의 헌정 체제를 존중하면서 합법적인 탄핵을 이끌었지, 체제를 뒤집어 엎자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대규모 시위의 결과, 제도권 내의 합법적인 정치권력 교체를 이끌어 냈지만 그 외에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대규모 변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것이 '혁명'이라고 불릴 어떤 이유가 있단 말인가? *3 물론 이 논리를 우연에 의해 형성된 불평등한 사회제도(인종주의, 카스트 제도)를 살아남았기 때문에 올바른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악용할 수 있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4 표당 제곱의 돈을 내고 표를 구매한 다음, 투표 이후 모든 수익금을 투표 참여자에게 1/n으로 나누는 방식, 1명의 부자와 9명의 빈민이 있다면, 부유층 친화적인 정책이 있다고 하면, 부자는 81배의 돈을 써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의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그 대신 투자한 돈의 90%를 빈민들에게 분배하게 된다. *** 글을 너무 오래 달고 있다 보니 힘들어서 방출했습니다. 다소간 무리한 전개가 눈에 띄지만 부족한 점은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5-07 19:0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시리즈물 이동에 따라 (2)편 주소를 아래와 같이 첨부합니다. 픽션은 사회를 어떻게 이끄는가 (2) : https://kongcha.net/?b=3&n=742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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