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8/02/23 19:39:17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옛날 즁궈런의 도덕관 하나
불교가 중국땅에 들어와서 즁궈런의 다른 사상조류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상호 많은 차이점을 확인하게 됐어요. 그 중 하나가 '완전성'에 대한 입장차이였구요.

당시 불교러들은 인간은 올바른 수련을 통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완벽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어요. 이걸 얘들 말로 무루(無漏)라고 해요. 새는 곳이 없다는 것. '물 샐 틈 없는' 완전함.

근데 즁궈런, 특히 (성리학 이전의) 유교러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어요. 그거 뭐...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있는데, 이게 리얼 월드에는 쉬운 도덕적 상황과 어려운 도덕적 상황이란게 있어서, 쉬운 거 잘 하는 사람도 어려운 상황에선 자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도덕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본 거예요. 스포츠랑 아주 비슷해요. 한국 프로야구 팀에서 에이스놀이하던 투수도 메이쟈리그가서 눈물 젖은 빵만 먹을 수 있어요. 그렇게 눈물 젖은 빵만 먹다가 어쩌다 아다리가 맞으면 폭풍 삼진 잡고 하루 이틀 정도는 슈퍼히어로급 활약을 할 수도 있는 거구요 (윤..석민..ㅠㅠ).

이런 도덕관 (퍼포먼스 도덕?) 하에서 도덕수양이란 무엇인가하면, 그런 퍼포먼스를 좀 더 일관되게, 자주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달리 말하자면 자기 약점과 리스크를 잘 관리해서 '사고'가 날 확률을 줄이는 거지요. 역시 운동 선수들의 기초훈련이랑 비슷해요. 예컨대 그런 훈련은 [골대 앞 30.23m 거리에서 수비수 두 명이 붙었을 때 삭삭 제끼고 빵 슈팅하는 훈련]보다는 [체력, 주력, 지구력 등을 길러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퍼포먼스의 항상성(constancy)과 일관성(consistency)을 높이려는 훈련]과 비슷해요.

반면에 도덕적으로 좀 덜 된 사람은 뭐 본질적으로 나쁜넘이고 사탄이 영혼을 주무르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예요. 유교러들의 생각에 그건 나쁜 게 아니라 게으른 거에 가까워요. 운동부족인 운동선수 같달까 (게으른 천재...고종수...ㅠㅠ). 그래서 논어를 보면 공자가 게으른놈에겐 열라 짱내면서도 의외로 멍청이나 못된놈에겐 모질지 않은 모습이 종종 나와요.

여기까지만 보면 엄청 힙하고 포스트모던한 도덕관 같지만, 이런 도덕관이 또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구석도 있어요. 그게 뭔가하면, 실수에 관대해진다는 거예요. 평소 아주 도덕적이던 사람도 아주 잠깐, 아주 순간적인 방심 탓에 엄청난 실수를 범할 수 있어요. 물론 그 실수는 나쁘지만, 그 실수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은 영혼이 타락했다느니 구제불가라느니 매도하긴 어려워요. 한 번 실수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도덕 퍼포먼스가 좋았던 사람이고, 그러니 가벼운 벌금 맥이고 다시 훈련시켜서 그라운드에 복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었던 선수도 문제를 진단하고 훈련을 조금 바꾸면 다음 경기에서 월드클래스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도 있고, 어제 실투 하나를 던져서 만루 홈런을 맞은 투수도 이리저리 노력하면 다음 경기에선 무결점 피칭을 해낼 수 있지요. 하지만 신도와 잠자리를 가진 목사님이 회개하고 다시 돌아온다면? 음... 성직자의 성적 자기단속이 매우 매우 어려운 건 맞아요. 따라서 실수를 범할 확률이 남들보다 높다는 건 감안해줄 수 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꾸 실수하고 자꾸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는데 사람들이 막 용서해주고 그러는 건 딱히 좋아보이지 않지요 ㅎㅎ

그런데 이 글을 왜 썼더라.

아. 여러분 제가 혹 실수해도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실투 하나 던진 거라능. 젤다의 전설 방패 튕겨내기 넘나 어려워서 실수가 많이 나온다능.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3-05 08:09)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1
  • 춫천
  • 재밌게 읽었습니다
  • 이 글은 좋은 글이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78 일상/생각이불킥하게 만드는 이야기. 28 HanaBi 18/01/16 6137 21
579 체육/스포츠미식축구 입문 : 오펜시브 코디네이터처럼 생각하기 (스압, 용량 많음) 10 Danial Plainview(Profit) 18/01/19 7246 17
580 일상/생각포맷과 탄띠 10 quip 18/01/21 7112 14
581 일상/생각 19 기쁨평안 18/01/23 6012 27
582 과학국뽕론 44 기아트윈스 18/01/25 7794 36
583 체육/스포츠테니스를 araboza 22 무더니 18/01/25 8379 18
584 문화/예술프사 그려드립니다. 72 1일3똥 18/01/28 8635 24
585 여행힐링이고 싶었던 제주 여행기 上 15 소라게 18/01/31 7165 23
586 일상/생각조카들과 어느 삼촌 이야기. 9 tannenbaum 18/02/02 7632 33
587 체육/스포츠2017-18 발베르데의 바르셀로나 단평 14 구밀복검 18/02/04 11296 14
588 문화/예술사라진 세계, 우아한 유령(Vanished World, Graceful Ghost) 9 하얀 18/02/06 7943 16
589 게임최근에 한 어떤 게임의 후기 19 모선 18/02/08 9520 20
590 일상/생각자아비판 - 커뮤니티의 유혹 7 epic 18/02/09 6726 18
591 철학/종교한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종말. 9 quip 18/02/11 8187 18
592 철학/종교푸코의 자기 배려와 철학상담(1) 3 메아리 18/02/11 6633 10
593 IT/컴퓨터금융권의 차세대 시스템이 도입되는 과정 41 기쁨평안 18/02/13 10692 26
594 체육/스포츠축구에서 세트피스 공격은 얼마나 효과적일까 11 기아트윈스 18/02/18 9031 13
595 일상/생각따듯한 난제 10 Homo_Skeptic 18/02/23 5796 35
596 철학/종교옛날 즁궈런의 도덕관 하나 6 기아트윈스 18/02/23 6898 21
597 경제'식근론'에 대한 단상, 한국은 독립국이 맞는가? 25 hojai 18/02/23 8841 6
598 일상/생각순백의 피해자 3 라밤바바밤바 18/02/27 6208 15
599 일상/생각#metoo 2017년 11월 30일의 일기 41 새벽3시 18/02/28 7137 54
600 일상/생각다들 좀 더 즐거웠으면 좋겠다. 9 판다뫙난 18/03/05 5487 21
601 일상/생각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않겠다! 35 얼그레이 18/03/06 7209 45
602 정치/사회난민에 대햐여 18 DrCuddy 18/03/15 6606 1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