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8/01/06 03:02:11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무굴제국의 기원
제가요, 바빠지면 홍차넷에 글을 씁니다. 안바쁠 때는 안쓰다가 오히려 바빠지면 도피처로 홍차넷을.....'ㅅ'

여튼 무지 바쁜 기념으로 하나 잽싸게 싸지르고 갈께용.


-----------

여러사람이 공유하는 기억을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이라고 불러요. 이건 다수에게, 단시간에, 강한 충격을 줘야 생성되는 물건인데 그런 기회가 흔치 않아서 만들기가 어려워요. 한국인에겐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이라든지, 6월 항쟁 등이 여기에 해당해요. 대신에 집단기억은 한 번 생성되고나면 적절한 관리를 받는다는 전제 하에 (기념행사, 영화화 등) 오랬동안 지속하면서 스스로를 재생산해냅니다. 그래서 정작 6월항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6월정신 운운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대규모 집단이 같은 기억을 공유하면 자연히 그런 공유집단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상상하게 돼요. 우리는 모두 6월의 후예라든지,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라든지, 우리는 모두 안동김씨라든지 등등. 따라서 집단기억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속성을 가집니다.

지중해세계에서 그 규모와 여파가 가장 큰 축에 속하는 집단기억으로 로마제국의 등장을 꼽을 수 있고, 동아시아에서는 주(周)의 건국을 들 수 있습니다. 서구놈들은 로마제국과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미쿡이나 롯씨아까지도 자기들 인장에 독수리를 넣지요. 그러면 뭔가 로마로마하고 제국제국해서 멋있어보이니까요. 동아시아 각국의 지도자들은 (20세기 전까지) 조석으로 주나라 꿈을 꾸며 살았구요. 고종황제가 광무개혁인가 뭔가 하면서 주나라처럼 되자고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예요.

중앙아시아에도 그런 존재가 하나 있으니 바로 몽골제국입니다. 몽골의 세계정복은 넘나 유래없는 것인지라 초원, 중원, 사막을 막론하고 제민족에게 거대한 인상을 심어주었어요. 그래서 몽골제국이 사실상 망한 뒤에도 이놈저놈 뛰쳐나와 '내가 대칸이다. 내가 몽골의 후예다'라며 설치고 다녔지요.

소련의 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을 토대로 복원한 흉상

티무르(Timur)가 세운 티무르제국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티무르는 지금의 중앙아시아(대략 이란-키르기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지)께에 위치했던 차가타이 칸국의 한 부족원이었어요. 차가타이 칸국은 칭기즈칸의 차남이 세운 나라였지요. 그니까, 혈통상 몽골족인 셈. 티무르라는 이름부터가 칭기스칸의 이름 테무친의 '테무'에서 따온 거예요. 몽골어로 '철鐵'이라는 뜻이래요. 티무르는 사고로 절름발이가 되었고, 그래서 별명이 '티무리 랑(Tīmūr-i Lang, 페르시아어로 절름발이 티무르)'라고 불렀는데, 이게 유럽으로 흘러들어가서 태멀레인(Tamerlane)이 되었어요. 이 말은 지금도 영어사전에 '절름발이', 혹은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으로 등재되어있답니다.

티무르는 스스로는 '칸'을 칭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몽골제국의 관습상 칭기즈칸의 직계후예가 아니면 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대제국을 세우고도 대칸이 못되다니... 이게 큰 컴플렉스였던 티무르는 결국 어찌어찌 직계후예 여성을 하나 구해서 결혼함으로써 소원성취합니다 ㅎㅎ.

이 티무르의 직계 5대손 중에 '바부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15세기경 사람인데, 이 양반이 어쩌다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하고 왕국을 세웠어요. 원래 목표는 거기를 근거로 사마르칸트로 진군하는 거였는데 일이 잘 안되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델리를 점령한 게 무굴제국의 시작이 됩니다.

바부르, 그리고 '사실상'의 개국황제인 그의 아들 후마윤은 모두 자신들이 대칸의 후예, 차가타이 칸국의 후손임을 무척 자랑스러워했어요. 그래서 마치 동로마 서로마 신성로마 슈발로마 등등이 다들 로마의 후예라고 떠들고다닌 것처럼, 무굴제국은 자기들이야말로 진정한 '몽골제국'이라고 선포했지요. 이들은 모두 페르시아어를 썼는데, 페르시아어로 몽골을 '무굴'이라고 불렀대요. 그러니까, 무굴제국은 문자 그대로 몽골제국인 셈.

1857년에 영국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무굴제국은 유럽친구들의 안정적인 무역상대였어요. 많은 유럽 상인과 사절단이 무굴제국의 황제를 이런저런 이유로 알현하러 갔었고, 갈 때마다 그 리얼 부(富)를 보고 압도당했대요. 그러다보니 유럽사람들은 자기네들 중에 떼부자가 나오면 '와 니 마 이래 성공했나? 윽수로 부자데이! 완죤 무굴아이가.' 이라고 하기 시작했고, 이게 영단어 Mogul (업계의 거물)의 기원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빌 게이츠, 제프 베조스도 다 업계의 '몽골'이라는군요 ㅎㅎ. 미국엔 몽골이 너무 많아.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1-15 09:21)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4
  • 재미있는 글은 추천이요
  • 갓갓트윈스님 아니 갓갓갓갓갓
  • 이 글은 재미와 유익함을 다 잡은 좋은 글이다.
  • 감사합니다 또 바빠주세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72 역사무굴제국의 기원 26 기아트윈스 18/01/06 6432 24
566 의료/건강완벽한 보건의료제도는 없다 ('완벽한 보건의료제도를 찾아서'를 읽고) 18 Erzenico 17/12/26 7237 24
515 일상/생각조카사위 이야기. 47 tannenbaum 17/09/21 8266 24
483 일상/생각인생은 다이어트. 12 프렉 17/07/26 6964 24
400 일상/생각부쉬 드 노엘 18 소라게 17/03/28 6033 24
399 일상/생각쪽지가 도착했습니다. 36 tannenbaum 17/03/27 5698 24
442 일상/생각누워 침뱉기 17 tannenbaum 17/06/01 5385 24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2008 23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2173 23
1341 꿀팁/강좌스몰웨딩 하고싶은 티백들에게-1 31 흑마법사 23/11/30 3002 23
1301 일상/생각팬은 없어도 굴러가는 공놀이: 릅신이 주도하는 질서는 거역할 수 없읍니다. 8 구밀복검 23/05/20 3107 23
1228 의료/건강아산병원사건 서울대 교수 실명글과 개인적인 견해 20 cummings 22/08/04 4743 23
1224 경제코인·투자 손실금까지 변제해주는 게 맞냐? 25 Wolf 22/07/20 4907 23
1218 정치/사회너말고 니오빠 - 누구랑 바람피는 것이 더 화나는가? 23 소요 22/06/28 5528 23
1175 일상/생각농촌생활)봄에는 굼벵이도 석 자씩 뛴다 16 천하대장군 22/03/07 3834 23
1162 경제게임이 청년 남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줄였다? 28 카르스 22/01/20 5275 23
1134 정치/사회IT 중소기업을 선택할 그리고 선택한 이들을 위한 -틀-의 조언 14 아재 21/10/07 6394 23
1104 기타남자 빅사이즈 인터넷 옷쇼핑(3XL이상부터)+그외인터넷쇼핑후기 27 흑마법사 21/07/12 8228 23
1050 일상/생각자다 말고 일어나 쓰는 이야기 7 Schweigen 21/01/05 4497 23
939 정치/사회가속주의: 전세계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을 고무하는 모호한 사상 - 기술자본주의적 철학은 어떻게 살인에 대한 정당화로 변형되었는가. 18 구밀복검 20/03/24 7668 23
924 정치/사회봉준호 감독 통역을 맡은 최성재(Sharon Choi)씨를 보면서 한 영어 '능통자'에 대한 생각 31 이그나티우스 20/02/19 7399 23
891 창작은밀한 통역 3 작고 둥근 좋은 날 19/11/23 6402 23
844 꿀팁/강좌영어 공부도 하고, 고 퀄리티의 기사도 보고 싶으시다면... 9 Jerry 19/08/14 7209 23
824 일상/생각20년전 운동권의 추억 36 제로스 19/06/27 7120 23
823 일상/생각매일매일 타인의 공포 - 안면인식장애 28 리오니크 19/06/25 5755 2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