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니라 제 (외)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 엄마, 애기 얘기는 쫌 치트키같아 감동코드 없이 팩트만 나열하겠습니다.
<오늘자 생일 케익 사진>
할아버지는 1917년생으로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101살이 되셨습니다.
제목에도 썼듯 절세미남이심. 저 콧날과 턱선 보이십니까. 머리숱도 엄청 많으시고요,
아 할아버지 사진은 허락 맡지 않고 막 올려도 됩니다. 왜냐면 인터넷을 못하심ㅋㅋㅋ 홍차넷이라고 하면 정말 홍차 넷이라고 생각하실지도
초상권 역시 모르십니다. 초상권을 아셨대도 그 나이쯤 되면 돈은 종이쪼가리, 카드는 플라스틱 쪼가리입니다.
이건 불과 3,4년 전입니다. 97년생 아니 97살 쯤 되셨을 때입니다.
자뻑 장난 아니셔서 공원에 모자 쓰고 다니시고 사진 찍는다니 다리 꼬고 폼잡으실 정도로 간지작살 풍기셨습니다.
이건 작년 100세 잔치 때입니다.
저는 USB 에 트로트 모음과, 민요 등을 모아 갖고 가서 틀어드리고 영상과 사진을 열심히 찍었습니다.
이날 할아버지는 박자 다 틀리게 장구 신나게 치시고, 소싯적에 추셨다는 댄스로 저희 엄니를 리드하셨습니다
만 솔까 춤은 제가 더 낫습니다. 재즈댄스나 발레를 배운 적이 없는 할아버지 춤은 너무 촌스럽거든요.ㅋㅋㅋㅋ
플랭크나 스쿼트도 아예 안하셔서 춤출 때 필요한 코어도 부족하시고요.
이날 우리 식구랑 할아버지는 따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웃지를 않으시길래 웃으라고 막내딸(울엄니)이 입을 손가락으로 잡고 벌렸더니 웃으셨습니다. 사진은 뭔가 화나 계신 거 같지만, 아니예요.
저는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턱걸이 팍팍 할 정도로 튼튼한데, 저희 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습니다.
어디에 병이 있는게 아니라, 그냥 나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1917년생이시니 송해 할아버지보다 10살 많으심.
스탠딩 코미디언 누가 그랬죠. 노인들은 트럭에 치여도 자연사라고. 젊었으면 피했을 거니까.
워낙 오랫동안 정정하셨기 때문에 예전에 그 소리 들었으면 글쎄? 했을텐데 지금은, 맞습니다. 반응이 느리세요.
하루하루가 눈에 띄게 다릅니다.
큰 글씨로 메모해서 눈앞에 들이밀면 그나마 한글자씩 읽으셔서 소통이 되는데, 옆에서 큰소리로 말해도 잘 못 알아들으십니다.
가끔 지인들에게 영상을 편집해서 만들어주는 게 반응이 좋아 100세 잔치 때 찍었던 영상을 편집해 틀어드려도 별 반응 없으십니다.
영상 아니라 사진 찍은 거만 나중에 보시라고 스마트폰에 담아드리려고 해도 소용 없어요.
할아버지에게 스마트폰 홈버튼을 눌러서 키고, 어플을 터치해서 누르고 사진을 '감상'한다는 건
수영 못하는 제가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헤엄쳐 들어가서 바닥에 있는 진주목걸이를 가져오라는 것과 비슷하게 막막한 일일 겁니다.
이거 편하게 USB 에 담은 거니까, TV 뒤에 꽂기만 하면 돼요.
편의성 좋게 넓은 화면, 좋은 터치감, 이런 거 그냥 안됩니다.
그냥 손으로 들고 넘기는 앨범이 짱입니다.
그래서 100세 잔치 때 사진은 크게 액자로 만들어 드리니 좋아하시대요.
평소엔 그냥 꽃나무 만지면서 소일하세요.
이제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올해 아니 이번달이, 당장 다음주가 마지막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날, 추석에는 물론이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가서 사진과 영상을 찍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희 어머니를 위해서요.
어머니랑 같이 외가 있는 시골로 이사를 온 지 20년이 가까워옵니다. 문자 그대로 외가 옆동네예요.
하프마라톤까지 장착한 저는 토네이도 불어 차들이 다 뒤집어져도 저 혼자 다 피해 뛰어서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서울에선 멀지만, 뭐 괜찮아요. 공기도 맑고. 어머니 고향이라 어머니 친구분들도 많으시고요.
이번 설날에는 사촌형이 저한테 뭘 그렇게 열심히 찍어 묻길래, '어~ 언제 마지막일지 몰라서~ 그냥 다 찍어두려고.' 했더니
형도 '할아버지! 여기보세요.' 이러고 옆에서 나란히 사진 찍었습니다.
동물원 원숭이 마냥 얼굴 앞에 렌즈 들이밀고 사진 찍고 옆에서 얼굴 들이밀고 셀카 찍어도 지금 뭐하냐고 화 안내십니다. 할아버지 착하심. 히힣
오늘 101살 생일을 맞아 집앞 식당에서 장년노년인 아들딸들 같이 모여서 고기를 드셨습니다. 저희 식구도 총출동.
맛있게 드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는 길이 약 30m 정도 되는데 할아버지에겐 먼 거리이기 때문에 차를 태워드렸습니다.
근데 차 안에서 운전대 잡은 저희 큰누나에게 '누구니?' 물으셨습니다. 허허 누나 충격 먹음.. ...
치매가 있어서 오락가락 하신 게 아니고, 그냥 까먹으신 겁니다. 사십년 넘게 봐온 손녀를요. 이건 그냥 허허허 웃음이 나올 밖에요. 화낼 사람이 없어요.
할아버지에겐 '자연스러운' 겁니다. 작년 추석만 해도 안 그랬는데.
탐읽남에서도 얘기했었는데 '아유 이제 잘 안들리고 잘 보이지도 않고 답답해 내가 힘들어. 아니 이렇게 살아서 뭐해'
이러고 저희 어머니한테 토로하시기도 했어요. 어머니는 펑펑 울고 오셨어요. 저는 감히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때 백점 받아오던 제 머리로 가늠이 안 돼요.
차 뒷문에서 내려 다시 집이 있는 3층까지가 또 엄청 험난하기 때문에 제가 업어드리려고 하니, 할아버지는 몇 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대신 지팡이와 계단난간을 붙잡고 직접 3층까지 오르셨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시던 분,
장성한 손자 등 뿌리치실 자존심은 고대로 남으셨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그렇게 올라가셔서 오늘 생일 케익 촛불도 한 번에 끄셨어요. 제 폐활량과 발성은 아마 할아버지를 닮았을 수도 있습니다.
올해엔 대통령 선물로 지팡이가 나온다네요.
어릴 때 시골 가면 동네에 친구 할아버지 할머니 들이 꽤 계셨는데,
이제 우리 할아버지만 남았습니다.
아유 우리 아부지 이제 한살 드셨어(백한살). 떠먹여드려야돼. 이러고 막내딸이 떠드렸습니다.
인제 내년에 두살 되면 자기가 떠드셔야지.
식구들 또 깔깔깔 웃었습니다. 놀려도 모르십니다. 유머는 설명하면 지는 거기 때문에 할아버지한테는 설명 안 해드립니다.
아재개그는 애들이나 하는 거라 이해 못하신 거 같지만, 다 좋아하니까 좋아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절세미남에게서 태어나 절세미남을 낳으신 역시 절세미녀 울엄마와 할아버지의 투샷입니다. 아부지 많이 드셨어? 뭐라구? 아니 많이 드시라궇ㅎㅎ
이 샷 객관적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진 진짜 잘 찍었습니다. 이거 찍은 거 엄청 뿌듯합니다. 역사적인 사진. 그래서 카테고리가 역사입니다.
할아버지 뭐 위인도 아니고, 네임드도 아니고, 젊으실 때 어떻게 사셨는지, 독립운동 하셨는지, 해방 때 태극기는 흔드셨는지,
대통령은 누굴 찍었는지 뭐 그런 것도 잘 모르지만
그냥 지금 저한텐 눈 앞에서 걸어주시고 울엄마랑 얘기하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신 거 이게 역사입니다.
할아버지!!! 손자가~! 따봉~! 많이! 받아줄게요!! 저~ 요새~ 인기~ 엄~청! 많어요!
어? 아니~ 제가~ 뭐 사람들~ 얘기 몇 개 ~!! 읽어주니깐!! 뭐만 하면 다 좋대!!
근데 할아버지는 따봉 받아도 안 좋아하실 거예요. 따봉이 뭔지 모르셔서ㅠㅠ
그때 델몬트 때도 할아버지셨어.
아니 그냥 올 겨울 추워도 잘 나셨으니깐 올 여름 너무 더워도 무사히 나셔요. 건강하셔요.
홍차클러 여러분 우리 할아버지 짱이죵. 오늘 생일 축하해드리고 자랑하고 싶어서요.
잘생기심ㅇㅈ 인증은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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