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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10/31 07:10:12 |
Name | 기아트윈스 |
Subject | 만 4세, 실존적 위기에 봉착하다. |
https://kongcha.net/?b=7&n=1703 요런 질문 글을 올렸었는데, 어찌저찌 해결을 보았기에 여기 보고드려요. 1. 기 애 엄마가 요즘 입덧으로 힘들어해서 쌍둥이를 데리고 인근 자연사박물관에 갔습니다. 애들도 잘 아는 곳이에요. 몇 번 갔었거든요. 예전에 재밌게 놀았던 만큼 이번에도 재밌게 놀아주길 바랬지요. 공룡 뼉다구도 보고 코끼리 뼉다구도 보고 이것저것 재밌게 많이 보면서 돌아다니다보니 어느덧 사람 뼈가 있는 곳까지 왔어요. 모조품이겠지만 전신 뼉다구를 잘 갖춰놨더라구요. 이게 뭐냐고 알파 (여, 만4세)가 묻길래 별 생각 없이 말했어요. "응 이건 우리 몸 속에 있는 뼈야. 우리 몸엔 다 이런 게 있어. 그러다 나중에 죽으면 이렇게 뼈만 남지." "아빠도 죽으면 이렇게 뼈만 남아?" "응 아빠도 언젠가 죽어. 죽으면 이렇게 해골이 될거야. 사람은 다 죽게 마련이고 죽으면 다 이렇게 돼." 약간 망설였지만, 그래도 많이 생각하지 않고 혀 가는대로 말해버렸어요. 벌써 저만치 도망가서 다른 공룡에 관심을 팔고 있는 베타 (여, 만 4세, 활동력 +1)의 움직임을 추적하느라 알파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알파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나도 죽어서 해골이 돼?"라며 반문했을 때, 그래서 그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확인했을 땐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2. 승 애 표정이 그냥 좋지 않다 수준이 아니었어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수준으로 질려있는 거예요. 지금 죽는 게 아니다, 아주아주 나중에 죽는 거다, 할아버지가 된 다음에야 죽는 거다, 죽는 것도 까짓 거 별거 아니다 (...) 등등 당황해서 온갖 뻘소리를 했는데 뭐 하나 먹히는 게 없더군요. 먹히는 게 없는 정도였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을.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어요.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려고 "저것봐! 티라노 사우르스야!" 라며 거대 티라노 뼈 모형을 가리켜도 "나 저렇게 되기 싫어" 하면서 우니 이거야 원 도저히 박물관 투어를 계속할 수가 없었어요. 3. 전 어떻게 저떻게 집에 돌아온 뒤에도 애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더라구요. 전 당황한 나머지 죽음이 아니라 해골이 문제일 거라는 생각에 [재밌고 유쾌한 해골을 보여주면 되겠다]라고 오판을 했어요. 그래서 대충 유튜브에 dancing skeletons 같은 걸 검색해서 보여줬지요. "자 이것봐. 해골 친구들 진짜 웃긴다 그치? 얘들은 전혀 무서운 게 아냐. 우리도 나중에 해골이 되면 이렇게 재밌게 놀 수 있어." 젠장. 안 웃어요 -_-;; 이 때 즈음 홍차넷 질게에 글을 올려서 질문도 하고 답변도 달고, 동시에 아빠에게 카톡으로 구조요청을 보냈어요. 홍차넷에서 답글을 다는 와중에 아빠에게서 답이 왔는데 대강 요약하자면, "얌마 ㅜㅜ 애들한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애한테 객관적/과학적 언어를 쓰려고 하지 말고 시어를 써 시어. 삶과 죽음 같은 큰 문제는 애가 나이가 차서 스스로 고민할 힘이 생기면 그 때 가서 자기 힘으로 자기 답을 찾아서 긴 여정을 시작할 거야. 훗날의 일은 걔 몫으로 남겨두고, 그 전까진 은유적으로/시적으로/신화적으로 사유하며 힘을 기르게 해주면 되는 거야." 라더라구요. 저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럼 거짓말을 하라구?" 라고 했더니, "아이구. 방편을 쓰라는 거지. 광광 우는 아이에게 '여기 돈줄께~' 하면서 나뭇잎을 쥐어주는 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통제를 주는 거야." 라고합니다. 그렇군요. 4. 결 아빠에게 페북 영상통화를 걸어서 알파에게 보여줬어요. 할아버지에게 지금 고민되는 거 물어보라고 했지요. "할아버지. 나 죽으면 해골되는거야 (울먹울먹)?" "어 아냐. 너희 아빠가 이상한 소리 했지? 아빠가 원래 가끔 잘 모르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런 거 무시해버려. 사람이 죽으면 별님이 돼. 훌륭한 사람은 달님도 되고 햇님도 될 수 있어. 너 라이온킹 봤지?" "응" "라이온킹 보면 심바 아빠가 죽어서 별님이 되잖아? 별님이 되어서 심바에게 말도 걸고 그러잖아. 그것처럼 우리도 죽으면 별님이 되는 거야." "([공신력] 있는 레퍼런스까지 나오자 더 믿는 눈치로)그...그래?" "그럼그럼. 할아버지가 이렇게 보니까 우리 알파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될 것 같아. 그러니까 아무 걱정 안해도 돼." 이런 대화를 몇 번 주고받다보니 애가 표정이 확 피는 거예요. 우왕 ㅋ. 영상통화를 끊은 뒤로도 알파는 저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계속 물어봤어요. 누차에 걸친 문답의 결과 알파는 이제 별님교 (Startology)의 교리를 믿게 되었어요. 알파에 따르면: 우리들 마음 속엔 모두 별님이 있어요. 별님은 우리를 숨쉬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춤추게 해요. 그러다 언젠가 우리가 죽게되면 별님들은 모두 하늘로 돌아가지요. 별님들은 밤이 되면 나와서 하늘을 돌며 놀다가 낮이 되면 집에 가서 편안히 쉬어요.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지요. 언젠가 알파가 죽게 되어도 베타와 함께, 엄마와 함께, 아빠와 함께, 그리고 모든 친구들과 함께 밤하늘의 별님이 되어 영원히 사람들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지낼테니 전혀 무섭지 않아요. 휴.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언젠가 자라서 까뮈 같은 걸 보게 되는 그날 까지 별님이 너의 앞길을 비춰주며 축복하길.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1-14 09:31)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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